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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내 글은 인기가 없다

브린이의 일기

by 하은수

사람들이 잘 읽지 않는다는 말이다. 발행 단추를 누른 후, 진동이 울리면서 라이킷이 우왕우왕 수없이 뜨면 어떨까? 구독자도.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영역의 일이다. 아무튼 내 브런치는 썰렁하다. 그럼에도 읽어 주시는 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싶다. -무슨 수상 소감 같구나. 내 인생에는 고孤가 끼었는데 브런치 세계에서 고독한 것이 특이 사항은 짜다리 아니란 생각이 퍼뜩 든다. 이것이 내 정체성인지도.


읽으신 분들의 반응에 대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는 사실 '독자'를 상정한 글쓰기를 한 적이 거의 없다. 여지껏 나에 대한 토로가 주인 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코가 석자. -아, 이런 식상한 표현만 생각나다니. 내 삶을 단속하느라 타인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 혹은 무엇을 주어야 하는지를 생각할 여력이 없다. 글 잘 쓰는 자들의 성지인 브런치에 내 글을 공개하는 용기를 장착한 것만으로도 나에게 훈장을 주고 싶을 정도이니. 그런데 이젠 '독자'라는 개념을 생각하게 되는 순간을 맞닥뜨리고 말았다. 무려 '독자'.


사람들은 어떤 글을 좋아할까란 생각을 처음으로 해 본다. 역으로 나는 어떤 글이 좋았었나 생각해 본다. 얻을 게 있는 글, 재밌고 공감 가는 글, 위로와 감동을 주는 진솔한 글. 그러니까 은유 작가의 말을 빌면 '마음을 흔들어 놓는 글'이다. 이럴 줄 알면 나는 진즉 작가였겠지.


브런치에는 작가지망생들이 많다. 잘 쓰시는 분이 그토록 많은데 작가지망생도 아닌 내가 뭐라고 열화와 같은 성원을 바라겠는가. 내가 쓴 글이 잉여나 아니면 좋겠단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는 커녕 내 삶이나 흔들리지 않고 살면 감지덕지이다. 타인에게 무엇을 준다는 것이 내겐 주제넘는다는 말이다. 이렇게 말하면 좀 거시기한 자기 비하라거나 용기를 가지라거나 하시고 싶을지도 모르겠만 오십 넘은 나라는 이웃집 여자가 사는 모습. 생각만 해도 하품이 나오는 걸.




프리다 칼로는 말했다.

"내가 가장 잘 아는 것은 나이다. 그래서 나를 그린다."

그녀의 그림 앞에서 삶을 본다.


나 역시 그렇다.

"내가 가장 잘 아는 것은 나이다. 그래서 나를 쓴다."


렇게 패러디 -이건 패러디라기보단 추앙인가? 를 해 놓고 보니 그럴싸 하다. 내 코가 석자라 내 앞에 닥친 삶-너무 평면적이어서 죄송한. 을 쓰기에 바쁘지만 내가 가장 잘 아는 것이 나이기에 나를 쓰고, 나를 달래어 살아가게 하기 위해 쓴다는 사실.


썰렁한 내 브런치를 보고 '그만 쓸 날이 언제일까'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언뜻 든 날이 있었다. 내 글이 잘 읽히지 않는데 기서 왜 쓰고 있나 하는 비애감. -이런 모순이 있나. 들입다 자기만 생각하고 쓰면서 '읽힌다'? 그런데 그때, 가만히 내 마음을 들여다보니 내가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안 읽히는' 고통보다는 '안 쓰게 되는' 고통었다. 안 쓰는 고통이 그다지도 클 것이라면 결국 나는 쓰겠구나 싶어지는 순간, 심장은 다시 이전의 보폭으로 한 걸음씩을 떼었고 비로소 몸은 온기를 회복하였다.



쓰는 고통이 크면 안 쓴다.
안 쓰는 고통이 더 큰 사람은 쓴다.


-은유, '쓰기의 말들' 중에서





여기까지 오니, 이름 없이 반짝이는 수많은 글들에게 경의를 드리고 싶어 진다. 그리고 뜬금없이 예전에 어느 개그맨이 익살부리던 유행어가 떠오른다.

'살아, 살아. 내 살들아.'

나도 흉내내 본다.

- 글아, 글아. 내 글들아.

한 마디 더 얹어 본다.

- 소중한 내 글들아.




삶이 있고 글이 있다. 잘 살기 위해 쓴다. 고독한 브런치는 오히려 나를 일깨운다. 진부하다만 나는 '다시 자판 앞에 앉는다.'라는 문장으로 이 글을 맺을 것이다. 자판 앞에 다시 앉을 때, 내 삶의 결을 하나하나 뒤적이고 이름 붙여주고 안아 줄 것과 놓을 것을 가르고. 그러다 보면 나는 한결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차니까. 이것이 바로 '희망'란 것일까.




다시 자판 앞에 앉는다.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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