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까지는 그렇다 해도 'ㅈ'과 'ㅡ'가 만나는 지점에서 느껴지는 마찰음의 거북스러움 때문에 이 말을 좀체로 입에 올리기 싫어한다. 소리 자체가 그 의미 같지 않나. 없던 그것도 생겨버릴 것 같지 않나 말이다.
내리 내리는 비도, 건조 코스를 돌리지 못한 빨래도, 아들 방 베란다에 실례해 놓은 태순이 응가도. 내가 복직하고는 혼자 있는 시간이 힘든지 쑨이의 배변이 일정치 못하다. 다시 훈련을 해야 한단다. 가시나야! 엄마 출근해야 된다고이!
어제 까인 발등이 신을 신어 보니 아프다. 아야.. 대일 밴드. 약서랍에 밴드가 없다. 뭐지... 뒤적뒤적...더마 밴드는 있구나. 오래됐는데.. 이거라도.. 음쓰는 나갈 때 버려야겠다. 오늘은 야근하는 날. 밤늦게 버리러 다시 나오지 않을 거야, 분명.
이렇게 나부대다 보니 덥다. 수월한 원단이라지만 밝은 테일러드가 웬 말이냐. 아서라 말어라. 벗어 건다. 그래도 에어컨이 춥고 밤엔 비로 쌀쌀할 수 있으니 긴팔 걸칠 것이... 없다.. 또 남편 면 재킷을 입는다. 딱이구나 오늘 날씨에. 다행이다....
장마 준비를 미처 못했다. 장마가 온 줄도 몰랐네. 뭐 하고 산다고 그랬을까. 주부의 장마 준비란 주로 섬유에 대한 것이다. 이불, 옷 등을 잘 세탁하고 뽀송하게 만들어 놓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습도는 쾨쾨한 냄새를 살아 숨 쉬게 할 것이다. 그 호흡을 맡을 때면 그간의 게으름에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을 테고. 기계의 덕을 보는 요즘이라 그런가, 장마에 무심해진 것이.
출근하는 나로서 장마에 제일 먼저 부딪는 것은 신발이다. 차를 가지고 다닐 때는 몰랐다. 지하 주차장에서 지하 주차장으로 쏘옥 들어갔다 나왔으니 우산도 필요 없고 신도, 옷도 맑은 날과 다를 바 없이 살았다. 편한 인생이었구나.
우기에 맞춤한 신발을 주말에 그럭저럭 하나 마련하여 비가 많이 오던 어제 하루 신었다. 아주 편했지만 사이즈가 조금 작았던 모양이다. 집에 오니 발등이 까였던데 대수롭잖게 여겼다. 아침에 현관에 서 보니 빨간 안에 살이 콩알 반쯤 드러났다. 신에 닿으니 아프다. 고 조그만 것도 상처라고. 에효. 대일 밴드. 그러다 저 사달이 났다. 더워서 부랴부랴 옷도 갈아입어야 했고 오늘 비엔 뭘 신어야 하나, 집을 나설 시간은 다가오는데. 산에 가거나 걷기 할 때 신는 스포츠 샌들이 생각난다. 그래. 이거라도 신자. 좀 심한가? 뭐, 요즘은 볼드한 것이 트렌드이기도 하더구만. 어? 생각보다 룩이 괜찮네.
뚜벅이 동료가 장마철, 태풍철 조언을 해 준다.
"우비, 필요 없어요. 더워서 못 입어요. 장화도 마찬가지. 그냥 슬리퍼 신고 오고요, 바람 불면 옷 다 버리니 반바지 입고 와서 갈아입으세요. 여긴 강 근처라 그런지 바람이 세요."
흑.. 근가.
다행히 오늘 아침은 바람과 비가 적다.
지하철을 내리니 저 앞으로 동료 두 분이 가신다. 음.. 오늘은 짜증이 만땅이라 나 혼자 삭이는 시간이 필요하다.
연못가에 서서 잠시 눈을 내리깔고 있으면 금세 이 길엔 나 혼자가 된다. 수련 봉오리들이 내 발밑으로 오를 것만 같아 한참을 본다. 짜증으로 부산스러운 내 마음과 연못의 잔잔함이 만나 부딪힌다.
글을 쓰고 싶다. '안중근'도 떠오르고 '개'도 생각난다. 그 세계로 들어가고 싶다. 거기 들어앉아 있는 동안은 해방이니까.
비가 오는 날은 초록색이 더 선명하다. 잔디도 더 폭신하다. 여기서 뭉그적거리고 있으니 좋다. 물을 머금은 잔디를 포옥포옥 밟아 본다. 골목에는 늘 나를 맞이하는 녀석들이 있다. 조그마한 요 화석을 보니 웃음이 나고야 만다. 비를 머금고 있네, 고것도 공간이라고. 네 발의 리듬에 맞춰 볼까. 난 참 거인이로구나.오늘은 불타는 쌍심지와 꽃송이가 보인다. 또 한 번 웃는다.
직장가는 시멘트 골목길 댕댕이 화석
우리 실로 들어오자마자 아아로 속을 달래 본다. 시원하다.
바쁜 출근 시간에 사소한 것으로 짜증이 이는데 사실, 그 근저에는 어제 회사 일이 있다. 시스템 오류에 상관없이 해라면 해내야 하는 부당함 때문에. 까라면 까는 게 직장 생활이다 싶어서 그런지 한두 마디 하다 다들 또 해서 낸다. 화를 삭이지 못하는 사람은 나뿐이다. 회사 컴 시스템 때문에 날려 먹은 문서들. 나의 고급 노동력이 기껏 복사기로 쓰여야 한단 말인가. 내 시간, 내 노력, 돌리 도!
담당 부서에 부당함을 말해 보지만 시스템 앞에서 무력할 때. 동료들의 애로를 최소화하는 수준이라는 것도 윗선과 우리의 입장이 다르다. 나에게 미안하다고 해야 할 사람은 저 동료가 아니다. 흠...결국 나도 해서 낸다. 참. 이거 뭐 하는 거지. 차라리 말없이 할 걸 그랬나. 내 분노라는 것의 가치가 있었나. 구내 식당에서 만난 동료는 나를 조심스러워한다. 이런 것도 처음이니 불편스럽다. 시스템의 벽이 답답하고, 변죽만 울린 내가 싫다.
은유의 초록 책.
'자기 고통에 품위를 부여하는 글쓰기 독학자의 탄생을 기다린다. '
- 은유, '쓰기의 말들', 프롤로그에서
글쓰기도 '학學'이구나. 생경하다. 나는 그냥 쓰는데.... 일하는 도중 이 초록 책 꺼풀을 쳐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눈이 조금 시원해진다. 나도 글쓰기에 대한 책을 눈앞에 두는 날이 오는구나.
이제 저것이 얼마나 말 그대로 똥고집인지 알게 되었다. 글 쓰기를 배우겠다에 앞서 글 쓰는 사람의 마음을 엿보고 싶었다. 마치 소설을 읽고 그의 삶처럼 살겠다기보다는 그가 어떻게 사는지 엿보고 싶은 마음이 더 큰 것처럼. '그와 같은 삶을 살겠다.'라는 것만큼 자신 없는 말이 있을까. 마찬가지로 '그처럼 쓰겠다.'라는 것같이 허전한 말도 없다. 나는 나이기 때문에 그처럼 쓸 필요도 없지만.
글 쓰는 이의 마음을 엿보고 싶었다. 그의 화가 어떻게 글로 하여 정도(正道)를 다루고 일을 이루고 마음을 크게 하는지.
도서관에 은유의 책은 다 대출되고 없었다. 남은 이 책은 이 반찬 저 반찬 원하는 대로 젓가락을 대듯이 어디든 뒤적이며 읽을 수 있도록 편집되어 손쉽다. 초록 표지는 아침에 밟았던 잔디 같이 내 일터에서 장마 속 경쾌함을 주고 있다. 펼쳐서 잠시 읽다가 넣고 또 조금 읽고 하다 보니 짜증이었던 하루에 균열이 가는 것만은 틀림없다.
다들 퇴근한 직장. 조용한 복도에 앉아 본다. 야근할 일거리를 잠시 두고 은유를 뒤적여 본다.
글 쓰는 사람. 내게 글쓰기는 창작 행위보다 사는 행위에 가깝다.
- 은유, '쓰기의 말들', P. 45
'작가'로부터 이 이야기를 들으니 '사는 행위'로서 글쓰기라는 것이 인정받는 느낌이 든다. 어느새 비도 사그라들어 있었네. 그런 줄도 모른 채 바쁜 하루를 보냈다.
다시 '안중근'과 '개'를 생각한다.'고매한 정신이란 것을 그리워하게 되는 날이 있다.'그렇게 첫 문장을 쓰고 싶다. '짜증'은 복도 모퉁이에 꼬리를 조금 남기고 둔중한 제 몸의 각도를 틀어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야근 마치고 집으로 갈 무렵, 다시 빗발이 흩뿌리기 시작했다. 오늘 선택한 이 신발은 신의 한 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