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 인연임을 받아들이면 안타까울 것도 슬플 것도 없다. 곧 가기 때문에 피어 있는 이 순간이 찬란하고 아름답다. 사람도 인생도 그러하다. 그대와의 인연도 그러하다.
나에게 왔던 장면을 떠올려 보고 싶어 진다. 이 길에서 멍하니 있다가 갈 때가 많았다.
3월 초. 엄청 추웠다. 지하철 역사 곁에 목련 혼자 웨딩마치 같더군.
동백의 삐져나온 머리칼도 귀엽다. 시골 색시의 볼 같지, 저 붉은 미소는 항상.
목련은 신혼여행 갔고, 이젠 벚꽃이.
내 홍해의 갈림길. 꽃을 이고 있었지.
저 꽃을 내가 이고 그 밑에 서 본다.
벚꽃 아래 서면
이상하다
살아있다는 것이
하이쿠를 좋아하지 않는다. 얄밉다. 그럴듯한 뭔가가 도사리고 있는 것 같아 보이는 것도 밉다. 왜 그런진 모르겠다. 그런데 저런 하이쿠는 그만 받아들이게 된다. 정확한 지 모르겠고 '잇사'인지 작가도 기억나지 않는다마는 만개한 벚꽃 아래 서면 나는 늘 저렇게 느꼈으므로. 차안인지 피안인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늘 헷갈렸다, 분홍의 옅고도 진한 그늘에 갇히면. 내 것을 도둑맞은 것 같아 더 얄미웠다
올해는 저희 아래 서서 또 저 하이쿠를 떠올리려는 나를 이상해 하는 벚꽃 송이들을 본다.
"그냥 날 봐."
그래서 그냥 벚꽃을 보았다. 벚꽃을 벚꽃으로만 보았다, 처음으로.
4월. 유채가 오고 있네. 강에 색이 든다.
지하철에서 내리니 무슨... 그대의 자전거가 내게로 온다던 그 카피가 떡 하니. 저 건너 튤립은 또 뭔가. 이 쪽은 못 보았구나.
퇴근 때 다가가 한참 머문다. 비현실적인 찬란이다. 당연히 지금은 많이 졌다.
어느 아침, 인연이 간다.
시절 인연이 왔다가 간다.
다만 이 생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다가 나도 가게 될 것이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한다. 세상의 찬란에 빛 하나 포갤 수 있을까.
야근 마치고 가는 길. 지하철교가 올려다 보인다. 내게 주어진 하루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나.
올해가 두 달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래서 가을이 온통인데 벚꽃 이야기가 웬 말이냐 하시겠다.
어떻게 감당하나 싶다가도 익숙해지면 그럭저럭 내 것으로 인정하게 된다. 처음 엄마가 되었을 때, 따박따박 이자를 빼먹는 은행이 밉기 시작했을 때, 모르던 병을 처음 앓게 되었을 때, 자고 일어나 보니 내 얼굴에도 큰 주름 하나 생겼을 때. 그런데 익숙해져도 늘 아픈 것이 있다. 그건 이별이라 할 인연이다. 마음을 내었던 사람과 인연이 다하는 것.
퇴근길은 이제 스산하여 하릴없는 마음이 쓸쓸해지는데 지난 봄에 썼던 내 글을 만난다. '시절 인연'이란 말에 잠시 멈춘다. 어느 봄날 꽃과 함께 온 생각이 살아서 다시 곁으로 오니 가만히 눈을 감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