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그윽이 들어다가 공중에 흩뿌리는 것만 같다. 마지막 한 잎이 떨어져 앉을 때까지, 그 직후의 정적까지 들어 보시면 좋겠다...
나의 글에 나오는 그는 1악장 팡파르가 울리는 부분과 느낌이 더 맞을 것 같지만 이 아다지에토가 날리우는 사랑의 꽃잎 끝에,
"Beautiful."
하던 그의 목소리를 기억하는 것도 황홀의 한 방식이리.
일하는 여성으로서 그녀가 워너비다. 영화 속 인물인 타르냐 케이트 블란쳇이냐? 둘 중 누굴 언급하든 같다. 물론 타르의 경우는 자기 음악에 정직해 있을 때의 리디아 타르이다.
이 마에스트로의 세계를 위상적으로 잘 표현한 포스터다. 세간은 올려다 볼 수밖에 없다
영화 마니아는 아니라서 배우니 감독이니 전문 용어니를 잘 모른다. 들어도 금방 까먹는다. 마치 러시아 소설을 읽으면 그 무슨 '~스키'들이 맨날 헷갈리듯이. 변명 말고 머리가 나쁜 건지도;; 근데 그렇게 모르고 보는 게 훨씬 즐길 수 있는 거 같다. 모르는데 무슨 선입견이 있는가? 난 누구보다 백지상태로 영화를 빨아들일 수 있는 이 무지가 좋다.
영화 선택의 기준은 주로 포스터와 제목이다. 대개의 경우, 그것이 맘에 들면 무조건 보러 가야겠단 설렘이 첫사랑처럼 울렁인다.
끌릴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다. 그냥 보러 바로 달려가고 싶은 건 나만이 아닐 것이라 믿고 싶은. 좀 거시기한 영화 선택법이다. ;;
'캐롤'에서 처음 보았다. 그녀를 안 것은 2015년, 지금은 사라진 추억의 '국도'에서. 그러니까 한참 늦었지. 물론 포스터 속의 그녀가 궁금했다. 고혹 속에 숨겨진 금기. 그 속에서 피는 사랑이기 때문에 더 잔인하게 매력이다. 나라도 저 여성과 사랑에 빠질 것 같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이 생각나는 '고독과 도시라는 것의 허접함'을 배경으로 사랑을 연기하는 그녀는 붉은 백조 같았다고나 할까. 이후로 그녀 말고 '고혹'이란 말을 더 잘 연기할 수 있는 배우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타르'는 무조건 그녀이기 때문에 보는 것이다. (그런데 포스터도, 제목도 ㅠ) 결론적으로 이 영화는 도끼질이라 할 깊고 선명한 자국을 내게 또 남기고 말았다. 아카데미는 그녀에게!
좌 에드워드 호퍼 작, 우 '캐롤'의 케이트 블란쳇.
한 사람의 감성 혹은 페이소스라 해도 믿긴다.
케이트 블란쳇의 양성적인 매력은 억압된 여성성을 해방시켜 준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양성을 넘나들 수 있게끔 각 성의 변별적 자질 몇을 정확히 가지고 있다고나 할까. 다음 생에는 남성으로 태어나고 싶은 1인이기 때문에 여성으로서도 충분히 그런 자질을 가진 그녀가 좋다. 어쨌든 섹슈얼리티에 대한 화두를 잘 소화해 내는 그녀라서 '타르'도 더 빛난다.
사실 그녀는 연극에서부터 출발하였다. 영화를 하는 도중에도 연극 무대에 서고 연출을 하였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에서 바냐의 사랑, 엘레나를 연기하는 걸 보고 역쉬~했던. 연극하는 연기자들은 일단 고수이니 그녀에 대해 더 신뢰가 간다.
타르의 예술 감각은 에르메스 급만이 보조를 맞출 수 있다는 걸 그의 코스튬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를 비롯하여 저 마에스트로의 예술적, 사회적 성공에 대한 묘사는 한 마디로 귀와 눈이 즐겁다. 긴 인터뷰만이 계속되는 첫 장면에서 음악과 지휘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의 음성, 몸짓, 발언의 내용 한 마디 한 마디. 그 모든 것이 극강의 미감을 발산한다. 사실 평범한 우리는 이런 영화에서나 이만큼의 '찐'을 경험할 뿐이겠지만 그러한 미의 세계는 누구에게나 매혹적인 관음의 대상이리라. 오로지 그의 앉은 자세로만 진행되는 긴 시간에 그저 빨려 들어간다.
명망 있는 마에스트로라 하여 지휘가 다 멋있어 보이는 건 아니었다. 몇은 쇼맨십이 끝내준다는 느낌을 받기도 하고 또 몇몇은 매력이라곤 찾을 수 없는.. 그러나 지휘봉을 들고 두 눈을 감은 카라얀의 예의 그 포스터 혹은 당시의 젊은 두다멜이 시몬 볼리바르와 신나게 어깨춤을 추던 그런 모습에는 매료되지 않을 수 없는데, 실상은 지휘자의 서사를 소비하는 수준이란 걸 부인할 수 없다. 문외한인 나는;;
두 팔을 벌려 하늘의 박동 어디쯤을 강하게 찌르거나 중력과 무관한 어떤 불가사의를 움켜쥐면서 오케스트라보다 미묘한 시각時刻의 선행을 연출하며 음악을 이끌 때, 또는 최극의 음을 뽑아내곤 두 눈을 감은 채 '아름답다.'라고 혼잣말을 할 때.
리디아 타르는,
멋. 있. 다.
나도 저 숨 막히는 '훈장'을 달고 싶은 욕망이 꿈틀댄다. '스스로가 내 커리어에 주는 어깨 견장' 정도에 이냥저냥 만족하며 사는 내가 말이다. 유독 일하는 나에 대해 생각하며 보게 된다는 것이지.
저 광채가 훈장이다.
자기 일에서 완벽한 절정을 일구어 내는 순간.
처음 보았을 때는 타르에 경도되어 그의 아픔이 많이 느껴졌다. 진실은 모르는 것이고 실제 이상의 공격도 많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 보았을 때는 그의 잘못이 더 잘 보이고 그로 인한 절규와 발버둥이 크게 보였다.
'고통받는 옆집 노파의 흉한 나신裸身'.
두 번째 관람에서 노파 장면이 찰나의 인서트처럼 각인되는 순간, 숨이 멎는다. 묘하게 그 나신은 타르와 유사한 외형으로 보인다. 저 모습이 곧 타르이구나...... .
에르메스를 걸치는 그녀와 추한 나신의 노파는 극과 극이지만 또 한편으론 하나인 것 같다. 사회적 명성, 권력 같은 것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자신의 모습은 저러할 것이다. 산발을 하고 흉하게 뒤틀린 나신은 타락의 나락으로 떨어진 자신이 아닌가. 외면당할 사회적 매장의 모습이 아닌가.
단테가 묘사한 지옥의 인간을 형상화한다면 바로 저럴 것이다. '신곡'에서 금방 기어 나왔다 해도 틀리지 않을. 그래서 타르가 그렇게 몸을 씻어 내려했을 것이다. 이 '살아있는 신화'는 그것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을 테니까.
노파의 시체가 운구되는 곁에서 경계하며 그것을 바라보던 타르. 저승의 신 하데스의 그림자가 저 노파보다 오히려 그에게 있는 것 같은 건 흑빛 길고 무거운 그의 외투 때문만은 아니었을 듯.
절규하는 지옥의 나신을 단테와 베르길리우스가 바라보고 있다. 타르도 노파의 뒤틀린 나신에서 자신의 미래를 보았을 것이다. /출처. 명화로 보는 단테의 신곡
하지만 그것을 보았다는 것은 이미 그녀의 속죄가 시작된 것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누구든 그런 지독한 자신의 모습을 응시할 수 있다면 발버둥을 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베아트리체, 아니 마돈나라고 해야지. 구원의 끈을 향해 몸부림치는 것만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일 테니까. 그리고 그것은 '삶의 원형'이란 것으로 회귀할 때에만 답을 보여주기 시작하는 것 같다.
어린 시절의 집으로 간다. 어린 시절의 메달을 메고 그 시절 좋아했던 마에스트로의 비디오를 튼다. 비디오 속 젊은 마에스트로는 연주를 마치고 말했다. 그의 말은 너무 익숙한 류의 말이어서 감동스럽지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늘 있는 공기 같은, 그냥 진실이기 때문에. 다만 그 말을 상기시키려는 젊은 마에스트로의 의도가 감동스러운 것이지.
짐작하듯 그 말은 대략 이러한 것이다.
악보, 샾, 플랫. 그런 것들이 음악이 아니다. 음악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음악이다. 음악은 한계가 없다.
그 말에 우리들의 일그러진 마에스트로는 울었다. 자신의 업業.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일의 본질을 대면할 때 인간은 저렇게 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항상 단순하고도 명료한 법이다. 그래서 '처음'같은 것이다.
본질에 충실하고 그것만을 추구하다가 어느 순간 변한다. 내 고집이 맞고 그것만이 무결이라는 아상에 빠진다. 단순 명료함은 사라지고 정치와 불투명이 개입한다. 본질을 완성하려는 것이라는 '자기 합리화'와 항상 함께 오지, 그것은.
정신을 차려 보면 멀리 와 있다. 억울하기도 하다. 그래서 나에 반反하는 것들을 부수어 버리기도 한다. 말러 교향곡 5번이 연주되려고 하던 무대를 파괴하던 그를 보라. 남은 것은 파멸이다.
그가 향한 동남아 어느 곳에서의 연주는 초라한 '파멸' 같았다. 그나마 음악은 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렇게. 그러나 두 번째 봤을 때는 신성한 '시작'이면서 영락없는 '절정'일 것이고 여전히 '투쟁'일 것으로 보인다. 영화의 마지막이 이렇게 달리 다가오다니.
외딴곳, 푸른빛이 강렬하던 무대. 빛의 속도로 음악은 그의 심장을 향해 달려가다 한순간 훅 멈춰버린다. 그가 음악의 비수를 온몸으로 맞고 대적하리라는 것을 순간의 절정과도 같은 멈춤. 그것이 말해 주거든. 침묵의 아우성 속, 내 심장에도 야수의 푸른 물이 들기 시작한다. 빛나던 베를린 필의 무대가 차라리 관습처럼 구겨져 보이는 순간이 되어 버리고 만다.
그래서 '마에스트로'란 단어가 그 장면에서 비소로 꿈틀거린다. 그리고 그의 '훈장'이 푸른빛 속에서 번쩍 진정한 존재를 알린다.
이 모든 것은 그가 그날 노파를 통하여 단테를 만났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천국을 향한 길고 고달픈 여정이 또 펼쳐지겠으나. 어찌하든 신곡의 힘은 대단하다. 5번에 대한 그의 구토는 그래서 지난날과의 이별로 보인다.
"메트로놈과 지휘자는 뭐가 다른가?"
"지휘자는 시간을 지배한다. 내가 아니면 그 누구도 시작할 수 없다. "
삼십 년 동안 해 온 내 일이 그것의 뜨거운 입김을 느낄 정도로 전당의 내 옆 좌석으로 바짝 다가와 앉는다. 그 온도와 숨소리를 맞는다.
내가 지배하는 것도 역시 시간, 나 아니면 그 누구도 시작할 수 없다. 나의 지휘 아래 내 일이 가진 생명의 화음, 찬란한 오케스트라가 살아나는 것이다.
내 일의 본질을 여과 없이 대면할 때, 뒤집어 말하면 지옥의 나신을 응시하는 용기를 잃지 않을 때, 나도 저렇게 훈장을 달 수 있을 것이다. 사회나, 제도나, 여타의 권위가 나에게 주는 훈장 따위가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성공과 배타성의 함의를 누리는 '에르메스'를 휘감는다고 저 찬란한 훈장을 달 수 있는 것은 진정 아니다.
저 대사는 영화 초반, 권력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는 모티프이고 결국은 '지배'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화두 아닌가. 그 대상이 내 자신이든 타인이든.
세 번을 본다면 또 다른 것이 보일 것 같다. 그건 케이트 블란쳇이기 때문일 것이라는 확신. 지휘와 피아노, 바흐의 연주곡을 배우고 독일어를 빠르게 습득하고 했을 현실적인 과정. 그것도 당연하겠지만 배우로서 그녀는 자신을 지우고 오로지 리디아 타르로만 존재하는 158분을 우리 앞에 여지없이 선사하므로.
'리디아 타르' 그 이름도 참 강건하다! 독일어로 들리던 그의 발음을 떠올려 보라.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헤어질 결심'과 헤어질 결심을 하게 된다.
예술가의 경우, 늘 정치적 상황에 놓인다. 인간의 사회적 활동이란 건 권력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 세계가 싫어서 옛사람들이 초야에 묻혀 천석고황을 즐긴다 하는 게 이해가 된다. 그러나 심지어 그렇게 정치를 떠나겠다는 것도 정치적이지 않은가. 침묵은 결과적 동의일 수밖에 없으므로.
예술도, 예술가도, 그것을 기리는 상賞도, 그 음울한 카르텔을 견뎌야지만 있다고 생각하면 밥맛이 뚝 떨어지게 마련이다. 타르 역시 그러한 세계의 한계에 있었다.
이건희 컬렉션에서 두 작가가 기억에 남았다. 그중 한 사람. 뭔가 다른 느낌. 그래서 설명을 읽어 보니 작품이 몇 없는 요절 작가였다.
이러지 않으면 그 카르텔을 벗어나 순수를 유지할 순 없는 걸까...... .
사내아이, 김종태, 1929 캔버스에 유채, 43.7*36cm
'김종태는 20세의 젊은 나이에 한국 미술계에 등장하여 29세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현재까지 알려진 그의 작품은 불과 4점에 불과하다.' 라고 씌어 있었다.
ㅡ추천하고 싶은 리뷰
내가 타르를 두 번 보고서야 느낀 것과 유사해서 놀라웠다. 음악에 대한 식견을 보완할 수 있고 5라는 숫자에 대한 해석에 무릎을 쳤다. 첨 봤을 때는 마지막 장면이 누추했다. 두 번 보고야 그 장면이 숭고했다. 이 글쓴이가 단번에 그걸 알았다면 참 부러운 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