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다 못배우고 그래서 다들 그렇게 살았어
몇년 전 아빠가 아직 돌아가시기 전에 요양원에서 지내던 때의 일이다.
오랫만에..정말 오랫만에..아빠를 만나러 갔다. 본문과는 상관없지만 아빠에게 새로 생긴 요양원 친구들은 하나같이 "이야기 많이 들었다"면서 나를 반가워하면서도 뜬금없이 이상한 조언들을 해대기 시작했다.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지 나중에 알게된다는 둥 아버지가 너를 얼마나 생각하는지 아느냐 와 같은..
이상한게 보통 처음 보는 사람에게 할만 한 이야기가 아닌데 너무 자연스럽게 여려명이 표현만 다른 같은 이야기를 해대는게 나로서는 머랄까 굉장히 이질적인 느낌이였다.
원인은 나중에 알게 됐는데 요양원에 있는 자신을 자주 병문안 오지 않던 나에게 굉장한 서운함을 느끼고 있었더라고 엄마가 이야기 해줬다.
아!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자식 키워봤자 소용없다는 둥 내가 자기를 어떻게 키웠는데 라는 둥의 자식비판을 엄청 나게 했댔었구나..라고 이해했다.
우리 아빠는 그런 사람이다. 한없이 철없고 부족하고 이기적인 일생을 살다가 주변에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거의..? 전혀..? 암튼 남지 않은 인생을 살다간..그런 하류 인생.
여튼 정말 오랫만에 아빠를 만나러 가서 요양원 바깥의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던 와중에 뜬금없이 예전에 아빠가 엄마에게 손찌검을 하던 게 생각나서 아빠한테 물어봤다.
"아빠 그땐 왜 그랬어?"
아빠는 이제 와서 그런 이야기를 해서 뭐하냐는 듯이
"그땐 다 못 배우고 그래서 다들 그렇게 살았어...이제와서 그런 얘기해서 뭐해?"
라고 아무렇지 않게 귀찮다는 말투로 대답했다.
그땐 다 못 배우고 그래서 다들 그렇게 살았어.
그때 우리는 전주의 변두리 동네 서민 복도형 아파트에서 살았다.
지금 생각하면 작고 초라한 집이였음에도 초등학교 2학년 2학기에 아파트로 이사 갔던 나는 천국에 들어온 줄 알았다.
그도 그럴것이 이사하기 이전에 살았던 집은 집 바깥에 있는 푸세식 화장실과 아궁이가 놓여있는 부엌, 심지어 세면장도 담배가게 주인집이 같이쓰는 바깥에 있는 아주아주 가난한 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날 갑자기 21평짜리 아파트로 이사가서 초인종도 달려 있고 집안에 있는 수세식 화장실에다가 따뜻한 물도 틀면 나오는 (이전에는 철로 된 큰 냄비에 물을 받아 끓인 다음에 옆에 한켠에 두고 수돗물을 틀면 나오는 찬물을 세숫대야 함께 받아 온도를 맞춘 뒤 그 물로 씻곤 했었다) 욕조도 있는 세면장, 방 두개 거실 하나짜리 아파트는 그야말로 나에게 천국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304호에 살았는데 계단을 올라오면 계단을 경계로 301호 ~ 304호까지가 좌측 305호 ~ 308호까지가 우측 또 하나의 계단칸이 있었고 그 옆에 309호, 310호가 있는 형태였다.
우리 3층의 302호에는 우리 누나와 동갑인 누나가 있었고 303호에는 나보다 한살인가? 두살인가? 어렸던 남자 아이 그리고 나보다 한살 많았던 누나가 있어서 302호, 303호, 우리집인 304호가 그래도 제법 교류를 해가면서 살았었다.
처음에 이사갔을때 내가 초등학교 2학년 우리 친누나가 초등학교 4학년 이였다.
그때 302호의 막내딸이 누나랑 동갑이였는데 또래에 비해 키가 월등하게 컸다. 정확히 몇이나 되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마 140 ~ 150cm 사이였었나부다.
"기집애가 저렇게 멀뚱하니 키만 커서 나중에 시집이나 갈수 있을런지 모르겠다" 라고 그 집 아주머니가 자주 이야기 했었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4학년 여자아이에게 할 소린가?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땐 진짜 그렇게 이야기 했다.
진짜 문제는 그 아주머니는 "기집애가 멀뚱하게 키만커서 나중에 시집이나 갈수 있을런지 모르겠다"는 고민을 고민에서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초등학교 5학년이 넘어서서는 그 누나의 키가 150이 넘어가자 큰 일 났다는 듯이 무슨 한약방에서 키안크는 약을 해 먹였다.
그런 약이 있겠는가? 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 당시에 "이게 키 안크는 약이래" 하면서 우리 앞에서 반투명한 한약 봉지에 담긴 약을 자랑하듯 마시던 그 장면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 아주머니는 초등학교 5학년이던 막내 딸에게 진짜 그 약을 해 먹였다.
결과는 대성공이였다.
우리는 그 아파트에서 꽤나 오래 살았는데 이사를 나오던때 내 나이가 20대 중반..(25쯤이였던것 같다) 이였는데 그때 302호도 아직 거기에 살았었다. 아마 그 때쯤 시집을 간다고 했었던것 같다.
그렇게 막내딸의 시집을 걱정하던 아주머니는 막내딸을 시집 보내는데 성공했고 그때 그 누나의 키는 150초반이였다.
그 약을 먹은 때부터 한치도 자라지 않았다.
그 때 그 누나가 그 약을 먹지 않았으면 그 누나는 얼마나 키가 자랐을까? 만약에 키가 자랐다면 무엇이 되었을까? 그건 모른다. 그 누나는 공부는 잘 하지 못했었던 모양이다.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에 실패하고 상고를 다니고 있었고 전주의 작은 백화점에서 판매직을 하고 있었다.
만약에 그 기세대로 키가 자라서 모델이라도 되었다면..? 미스코리아라도 되었다면..?
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른다. 아마도 되지 못할 가능성이 더 컸겠지만 그래도 모른다. 가능성이라는 것은 많으면 많을수록 선택지가 다양해지는 것이니까.
내 생각이지만 302호 아주머니는 막내딸이 시집을 못갈까봐 걱정스러움에 키 안크는 약을 선택했고 그 선택을 함으로서 그녀의 인생에서 큰 키로서 살 수 있는..또는 될 수 있는 무엇이 될 가능성은 100% 차단 당했다.
이 얼마나 무지한 선택인가? 나중에 시집을 못갈까봐 초등학교 5학년 생의 성장을 차단 했다는 것이..얼마나 무지하고 잔인한 선택인가?
그 누나도 어느날 문득 엄마한테 그 때 왜 나한테 그 약을 해 먹였어? 그 때 키가 더 컸으면 내가 지금 어떻게 되어 있을줄 알고? 라고 물어보지 않았을까?
그럼 그 아주머니는 이렇게 대답하겠지?
그땐 다 못 배우고 그래서 다들 그렇게 살았어.
303호에는 나보다 한살 어린 남자아이와 한살 많은 누나가 살고 있었다.
그 집 아주머니는 머랄까? 좀 특이했다. 그 때 엄마들은 다는 아니지만 높은 비율로 파마머리에 펑퍼짐한 몸매를 하고 있었는데 그 아주머니는 긴 생머리를 고수했고 펑퍼짐한 정도도 다른 아주머니들에 비해 덜한 모양새 였다.
그래서인지라고 하기는 좀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그 아주머니는 자주 바람을 피웠던 모양이였고 자녀들에게 꽤나 신경질적이였다.
우리와 바로 옆집이였고 집이 그렇게 방음이 잘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였기 때문에 옆집에서 싸움이 나면 거의 생생하게 옆집의 소리가 들리곤 했는데..다툼의 빈도가 우리집만큼 많았다.
그냥 말싸움 정도가 아니라 때려부수는 소리 때리고 울고 고함치는 소리들..이런 소리들이 자주 들리곤 했었다.
여담이지만 빈도는 우리집이 더 높았기 때문에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진 않았고 다들 그러나부다 하고 그땐 생각했다.
여튼 동네에서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집 아주머니가 바람이 나서 쫓겨 났다더라 몇일만에 돌아왔다더라 하는 이야기들이 많았고 실제로 우리 엄마가 그 집 남매에게 밥을 해 먹이기도 하면서 그 아주머니가 바람난게 걸려서 쫓겨나 있는 동안 아이들을 챙기곤 하던 기억이 있어서 그냥 소문만은 아니였던 것 같고 실제로 그랬었던 것 같다.
아무튼 원인이 어떻든 간에 그 집 아저씨도 아주머니에게 손찌검을 해댔고 그 집 아주머니는 그 화풀이를 아이들에게 했었던 모양이다. 그 집 남매들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머니에게 혼나서 두 남매가 동시에 머리가 터졌었다. 머리가 터졌었다? 이상한 표현이지만 우리엄마는 그렇게 표현했고 실제로 두 남매가 머리에 붕대를 감고 얼마간 지냈었던 기억도 난다. 그 머리가 터진 기간에 그 집 남매는 외출을 꺼렸었던것 같지만 나보다 한살 어린 그 남자 아이와 나는 자주 놀이터에서 함께 놀았기 때문에 작은 방 창문 (복도쪽에 작은방이 있었고 창문이 아파트 복도 쪽으로 나 있는 구조였다.)을 통해 놀러나가자는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는데 그 때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로 아파서 못나간다고 이야기했던 기억이 난다.
여기까지의 303호의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동년배 아주머니들 보다 멋부리기를 좋아했던 아주머니는 바람이 나서 남편에게 손찌검을 당하고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어떤 잘못을 한 아이 둘에게 체벌을 가해서 동시에 머리를 터트렸다.
성인이 되기까지의 그 남매의 소식은 모른다. 다만 그 남매도 302호 누나처럼 공부는 잘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둘 다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에는 실패했고 그 누나는 상업계 고등학교 그 남자아이는 후기 고등학교에 진학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머리를 터트릴 정도로 엄한 교육을 자행했던 두 남매의 어머니는 두 남매를 결국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시키지 못했다. 지금에 와서 인문계 고등학교가 머 그렇게 중요하냐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 당시에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은 지금으로 치면 대학을 입학하냐 하지 않느냐 (대학의 수준을 떠나서 단순히 입학 비입학)의 차이였던 것이여서 중학생 자녀를 둔 부모입장에서는 꽤나 중요한 문제였었다.
그 남매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도 역시 그때를 회상하면서 아빠 혹은 엄마에게
"왜 그때 손찌검을 그렇게 해댔어?" 라고 묻지 않을까?
그러면 그 아저씨나 아주머니는 대답 하겠지?
그땐 다 못 배우고 그래서 다들 그렇게 살았어.
쓰다보니 생각나는 친구가 한명 더 있었다. 같은 아파트의 207호에 아빠의 직장동료이자 친구가 살고 있었다. 그 집에는 실제로 나와 중학교때까지 매우 친하게 지냈던 동년배 친구와 그의 두살 터울 동생이 있었는데 그 형제와 나는 정말로 친하게 잘 지냈다.
그 집에 있는 게임기와 우리집에 있는 게임기가 달라서 서로의 집을 오가며 함께 게임도 하고 자전거도 같이 타러 다니고 교회도 같이 다니고 했었다. 내 친구는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였고 그 때의 나는 꽤나 까부는 성격이였는데 그 두살 터울의 동생이 오히려 더 활동적이여서 동생과 더 잘 놀았던 기억도 있다. 하지만 중학생쯤 되어서부터는 그 친구와 같은 반이기도 하고 짝궁도 하고 해서 둘이 더 친하게 지냈었다.
그 집 아주머니는 우리 엄마보다 한참 어렸다. 그 아주머니도 긴생머리를 했었고 펑퍼짐한 몸매도 아니였다. 303호 아주머니는 펑퍼짐한 정도가 덜한 수준이였는데 이 아주머니는 날씬한 편에 속했다.
우리 엄마가 교회에 본격적으로 빠져들기전에 이런저런 일을 많이 했었는데 그 때 회사 구내식당에서 밥을 짓기도 했고 쥬스배달을 하기도 했고 쌀집에서 일하기도 했다. 그때는 쌀집에서 일하던 때였는데 그 207호와 가족끼리 친하게 지내던 때여서 이 아주머니가 우리엄마가 일하는 쌀집에 자주 놀러왔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쌀집에서 우리엄마와 종종 시간을 보내던 이 아주머니는 쌀집 사장님과 바람이 났다.
그 사건이 아저씨에게 발각되어지고 극대노한 아저씨는 그야말로 무지막지하게 그 아주머니를 쥐어팼다.
실제로 그 때 내 친구가 우리집에 도움을 요청하러 왔고 아빠는 그 아저씨를 말리러 갔고 그 아주머니를 우리집에 피난을 왔다. 여기저기 피를 흘리고 있는 아주머니를 우리엄마가 치료해주던 모습이 기억난다.
그 후로 그 부부는 이혼을 했다. 아저씨가 아주머니를 쫓아냈다는 이야기도 있고 아주머니가 바람을 끊지 못해 쌀집 사장님과 도망쳤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어쨋든 그 아주머니는 그후로 보지 못했고 내 친구네 집은 아쩌시와 두 형제가 세식구를 이루어 살았다.
그 때 교회를 같이 가려고 내가 그 친구집에 가면 자주 세식구가 짜장면을 먹고 있었다. 교회가 2시 시작이였으니 그 때 쯤이 주로 점심식사 시간이였던 모양이다. 가끔 내게 반그릇쯤 덜어주기도 했었는데 철없던 나는 짜장면을 먹는 게 부럽기도 했었다.
그 반면에 원래 내성적이였던 내 친구는 그 사건 이후로 더 내성적이였던 아이가 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중학교 2학년 때인가? 그 때 쯤 나는 인생의 큰 변화를 겪으면서 성격도 주변 공기도 변하게 되었는데 (괴롭힘으로 부터의 탈피?) 무언가 그때 쯤 나에게 못되게 굴어서 한번 크게 싸웠던 기억이 나고 3학년때는 반이 갈라지면서 그때부터 친하게 지내지 않았었던것 같다.
아무튼 그 친구도 그 친구의 동생도 역시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에는 실패했다. 그 친구는 고등학교 졸업 후 무슨 공장에 들어가 아직까지도 공장에서 일하면서 꽤나 잘 살고 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우리 아빠가 제대하고 돌아온 나에게 복학하지 말고 공장에 자리를 알아봐줄테니 거기에서 돈이나 벌으라고 권유했었다. 나는 실제로 그 당시에 스스로 미래가 불투명하다 생각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진지하게 고민하긴 했지만 다행스럽게 나는 불안함 이상으로 나를 꽤나 믿고 있었던 모양이였다. 그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않고 복학을 결정했고 그래서 한동안 나를 꽤나 못 마땅해했던 기억이 있다. 무슨 일이 있을때마다 "그러니까 공장에 들어가서 돈이나 벌으라니까" 라며 꾸짖던 기억이 나는 걸 보니..
그래놓고 무슨 가족이 소중하다느니 나를 얼마나 생각하는지 아느냐느니 같은 소리를 지껄이는지...
암튼 인문계고등학교 진학에는 실패했지만 공장에 들어가 하루하루 살아갈 돈을 버는 것으로 우리 아버지의 부러움을 샀던 207호에 살던 내 친구는 엄마가 동네 쌀집 아저씨와 바람이 나서 아빠가 엄마를 처참할 정도로 쥐어패댔고 그길로 집을 나간 엄마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 경우에는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빠에게라면 왜 엄마에게 그렇게 손찌검을 해댔어?
엄마에게는 우리를 버릴 정도로 그 아저씨가 그렇게 좋았어? 라고 묻는다면
그 아저씨 혹은 아주머니는 말하겠지?
그땐 다 못 배우고 그래서 다들 그렇게 살았어.
이쯤되면 정말 "다들" 그렇게 살았다. 그 초등학교 시절 함께 놀이터에서 우리집에서 그들의 집에서 함께 놀던 동네의 아이들 모두 진짜 "다들" 그렇게 살았다. 그래서 이해한다. 그땐 다 못배우고 그래서 다들 그렇게 살았다는 이야기를...이제는 이해한다.
라고 말할줄 알았냐?
지금까지는 중학교 때까지의 이야기다. 전주에서도 변두리 동네..그 동네에서도 구석에 있는 서민아파트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리고 도심으로 고등학교를 진학한 나는 새로운 친구를 사귀게 됐고 그때 만난 친구들의 삶은 완전히 다르다. 생일이면 가족들끼리 모여서 외식을 하고 일년에 한두번은 여행도 다니고 입학식이면 졸업식이면 아빠엄마가 축하하러 학교에 찾아와 꽃다발을 전해주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였다. 참고로 나의 중학교, 고등학교 졸업식에는 우리 부모 모두 찾아와주지 않았다. 아빠는 일하러 가고 엄마는 교회에 기도하러 갔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졸업식 모두 같은 사유였다.
초등학교 때 이사갔던 그때의 그 동네에는 아빠의 회사 친구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비슷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한 동네의 이곳저곳에 모인 것이다. 아빠는 도박을 했다. 벌금형으로 2번 경찰에 잡혀갔었고 (3번 걸리면 실형이다.라고 경찰이 아빠에게 이야기 하는 걸 들었다.) 나중에는 도박으로 승용차도 넘겼다. 회사에서 고된일을 마치고 나면 사무실에 모여 함께 도박을 했던 친구들이 모여 사는 동네였다.
우리 아빠는 도박을 함께 하던 친구들이 모여사는 동네로 가정을 끌고 이사를 갔고 그 동네에 이사 온 대부분의 사람들이..적어도 그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비슷한 수준이 아니였을까?
그래서 마음껏 가족에게 손찌검을 해대는 아빠들과 마음 기댈곳이 없어 교회에 쉽게 빠져버리거나 바람을 피우는 아주머니들이 즐비하고..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조차 못하는 아이들의 비중이 훨씬 높았던 그 아파트 (그 때 당시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율이 전주권 전체에서 70% 정도 수준이였다.)
그 사람들이 모여서 "그 땐 다들" 을 형성 했다.
나아지려는 노력도 더 나은 삶을 사려는 노력도 하지 않아도 된다. 다들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
시궁창에 기어들어가서 "주변을 둘러봐, 다들 드럽게 그지같이 굴러다니면서 살아! 그러니 내가 이렇게 사는 것도 괜찮아, 그때 그렇게 살았던 것도 이해해" 라고 자위한다.
유감스럽게도 세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땐 다들"이라고 했던 그 부류들은 보통의 사람들이 무시하고 손가락질 하던 하류 인생들의 집합이며 그 순간에 거기에서 살면서 거기서 벗어나려는 노력 따윈 하지 않고 하류 인생들의 집합체들을 "다 들"이라고 인식하며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며 매일 같이 거지같은 하루하루를 보냄에도 "나만 그런게 아니야" 라며 "사람 사는게 다 똑같아"라며 위로받고 시간이 지나고 나서 " 다들 그렇게 살았다"며 변명한다.
자기들이야 그렇게 살아도 무슨 걱정이랴? 하지만 아니다. 그 시간들을 함께 살아 낸 아이들은 그것이 다 모두 쌓여서 더 나은 삶이 선택지에도 없을수도 있고 아무리 노력해도 못배운 자신은 행복한 가정을 만들지 못한다고 생각할수도 있다. 물론 그것들을 바탕으로 더 나은 삶이 목표가 되어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수도 있겠지만 이마저도 보통의 삶을 지나온 아이들에 비하면 극복해내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 이런 어린시절을 보낸 사람이 보통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린 시절의 경험과 배움과 역할과 정도를 극복해내야 하는 것이다.
극복해야 내야 할 것들 천지인 세상에 지금 내가 처해야 할 행동과 생각을 결정하는 경험과 기억조차 극복해 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어릴 때 연애하던 시절에 여자친구들에게 수없이 했던 말 중에 하나가
"내가 널 어디까지 맞추고 얼마나 멀 더 해줘야 해?" 였던거 같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가정생활에 비하면 그녀들에게 나는 사실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았었던 반면 나의 경험과 기억에 의하면 그때의 나는 그녀들에게 어마어마한 사랑을 베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나는 매순간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노력하지 않으면 시궁창에 살게 된다는 것이다. 일상을..매 순간을 노력해야만 보통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불행해지기 쉬운 사람인가? 매일 매일을 외줄타기처럼 집중하고 노력해야만 보통으로 살수 있고 어느날 술이라도 먹고 아 더이상은 못해 나도 아빠처럼 할꺼야 라고 다짐하는 순간!
시궁창이다. 그리고나서 아 몰라 시발 다들 그렇게 살어~ 라고 소리치면 되는거다.
이 얼마나 편한가? 그리고 이 얼마나 쓰레기 같은가?
우리 부모가 "그땐 다들" 그렇게 살았던 덕분에 나는 이런 어려움을 견뎌내야 하는 삶을 선물 받았다.
한가지 장점이 있다면 실패하고 시궁창에 떨어졌을때 자기변명 하기에는 꽤나 용이하겠다...는 점이다.
최근에 다리를 다쳐서 수술을 했다. 병실에 누워 있는 와중에 고통을 참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할 시간이 많아졌다. 일주일 가까이 병원에 있었는데 사람이 다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상하게도 내 머릿속은 생각할 시간이 많을수록 상처받았던 이야기, 억울했던 사건, 부끄러웠던 에피소드 와 같은 일을 많이 생각하게 된다. 그 몇일간 했던 부정적인 생각중에 가장 Best가 바로
"그땐 다 못 배우고 그래서 다들 그렇게 살았어"이다.
너무 기분이 나쁘고 드러워서 꼭 글로 남겨두고 싶었다. 절대로 저런 자기변명을 혹시 나이들어서라도 이해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혹시 모를 나의 자기변명에 저러한 뉘앙스를 포함시키지 않기 위해서..?
저 대화를 하고나서 일년즈음 지나서 아빠는 돌아가셨다. 일 평생을 반성하나 없이 철없이 순수하게 살다가 진심으로 울어주는 이 하나 없는 불행한 장례식을 끝으로 볼품없는 그의 인생은 마무리 되었다.
그 때 아빠가
"그 땐 정말 미안했어, 나는 부족한 사람이여서 많은 실수를 저질렀어, 인생을 정리하면서 나도 많은 부분을 후회하고 미안하게 생각해" 라고 했다면
적어도 나는..아빠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했을까?
끝으로
혹시 내가 살면서 나도 모르게 했던 생각과 행동에 상처 받은 사람들에게 전해두고 싶다.
"그 땐 정말 미안했어. 나는 부족한 사람이여서 많은 실수를 저질렀고 지금도 저지르고 살아.
나도 지나 온 시간중에 어떤 순간은 후회하고 함께 겪었거나 일방적으로 상처를 줬을지도 모르는 당신에게 미안하게 생각해.
나는 아직 인생의 한가운데에 있고 계속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과정이야. 될 수 있으면 당신에게 어떤 방식이든 직접적으로 위로와 사과를 전해주고 싶어,
고마워, 미안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