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나대는 빌런들을 마주칠 때

눈 딱 감을까?

by 카야

히어로 무비에 꼭 등장하는 빌런은 한 마음 한뜻으로 저주하고 미워하고 주저 없이 지탄하고 공격해도 그 타당성이 보장되지만, 사실 우리가 그러한 무시무시한 빌런을 일상에서 마주칠 일은 거의 없다.


우리의 일상에서 소소하게 부딪히는 무례한 언행과 비상식적인 행동을 일삼는 이른바 '진상'으로 분류되는 그들을 나는 일상의 빌런 들이라 부르겠다. 물론 여기서 상식의 기준이 저마다 현저한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한다. 서로 간의 입장 차이와 상황적 연계성으로 나눠지는 것을 제외한 지극히 보편적인 상황을 말함이다.











젊은 시절엔 상식과 사회적 매너 기준이 어긋나는 상황에 놓이면 화들짝 놀란 가슴으로 동공이 흔들리고, 입은 꾹 다문채 도망가기 일쑤였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비슷한 상황을 마주할 때, 나는 심한 내적 갈등에 휩싸이며 자꾸만 용감해지고 싶은 강렬한 욕망에 휩싸인다. 사실 스스로 헷갈린다. 이것이 사회적 정의감인꼰대 의식의 근자감인지.. 여하튼 나는 예전과 달라진 내 모습에 흠칫 놀라기도 하고 후회하기도 한다. 이것이 갱년기 화병의 도짐인지 종잡을 수 없는 나이가 되었으니.. 참 이제는 이러나저러나 본전도 못 찾는 현실이다.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며 무리에 속한 운동을 해보니 세대를 초월하여 많은 이와 소통하는 즐거움도 있지만, 그 수가 많으니, 당연히 나와 다른 상식의 기준을 가진 자들을 접하는 것은 필연의 현실이다.

눈을 질끈 감고 입을 다물라고 수많은 현인들이 충고하건만 나는 가끔 오지라퍼 기질을 드러내고 만다.


어른 2.jpg

나이 값 하는 어른이란 무엇일까?..


나이 많은 게 특권도 아니고 참으로 조심스럽기만 한데.. 그래서 기질과 성향을 누르고 사회적 가면을 쓰고 조용히 살아가고자 하지만.. 인생은 꼭 뜻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나 자신을 드러내면서 건강하고 유쾌한 나이 어린 이들과 친구가 되었지만, 간혹 경계를 넘나드는 무례함을 느낄 때는 잠시 흔들리고 당황스러워 마음을 어찌 다스릴지 골똘히 생각에 잠기곤 했다.

잠깐 스치는 사람들이야 그냥 무시하며 넘어갈 수 있지만, 정기적으로 만나는 취미 활동에서는 한 번 두 번 반복되는 거슬림으로 불편함이 조금씩 더 커져갈 즈음 다시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 우연히 코미디 쇼츠를 보게 되었다. 요즘 MZ세대의 현실을 반영한 프로였는데, 속마음이나 행동을 거침없이 풀어내며 풍자하는 심야 개그쇼였다. 현실 고증이라 더욱 와닿으며 깔깔대고 한참 웃다가.. 갑자기 이거다 싶었다.

유레카2.jpg


유레카!!!!

속이 시원하고 허를 찔리는 데도 그 모습과 상황에 유머와 코믹함이 더해지니 불편했던 갈등상황이 한 편의 유쾌한 시트콤이 되는 것이다.

나는 그 후 한동안 그 프로에 심취하여 그들의 유머 코드와 표현 방식을 습득하기 시작했다. ㅋㅋㅋ

비슷하지도 않은 성대모사를 하며 그들의 대사를 흉내 내니 나 스스로 무안함은 내 몫이고 그 노력이 가상하여 어린 친구들은 웃어주고 응원해 주니 철없는 나의 인정욕구가 뿜뿜! 나의 캐릭터인양 입에 착착 감겨버렸다. 나는 그렇게 욕쟁이 왕언니라는 부캐도 추가되었다.














운동 후 다 함께 커뮤니티 카페에서 티타임을 즐기는 게 우리의 루틴이 돼버렸다. 개성 만점 개그의 피가 흐르는 친구부터 툭툭 내뱉는 시크한 유머 감각을 곁들인 친구들은 물론 내향형의 자상하고 리액션 잘해주는 다양한 이들이 하모니를 이루며 우리의 티타임은 운동이 먼저인지 사람이 먼저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모두가 즐거웠고 또 서로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사람이 유독 많이 모인 날, 길게 늘어진 자리에 안쪽부터 자리를 잡지 않고 바깥쪽에 미리 자리를 잡은 사람들 때문에 뒤에 오는 사람들은 안쪽으로 사람들 다리를 헤집고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미리 자리 잡은 사람들이 만원 버스 속 상황처럼 다리를 오므리고 자신 쪽으로 바짝 당겨 길을 터주어야 했는데, 한 친구가 다리를 오므리지 않아 들어가기가 힘들어진 순간, 일이 났다. 나이로 두 번째인 친구가 한참 어린 친구에게 말한다. " 얘, 언니 지나가잖아 좀 비켜봐."


평상시의 젠체하는 둘째 언니의 말투로 별다를 게 없던 상황이었다.




" 왜 이래, 내 밑으로도 동생들이 얼마나 많은데!!! "




받아치는 한참 어린 친구의 도전적 어투에 모두가 화들짝 놀라며, 갑자기 정적이 흘렀다.......


평상시도 인사를 무시하거나 외모나 말투가 다소 튀는 관계로 모두가 그 친구를 무섭다며 완곡하게 표현하는 와중에 나는 그 친구에게 '센 언니'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던 터이다.


갑자기 싸한 분위기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고 특히 농담조로 건넸던 소심했던 언니의 얼굴은 굳어져 있었다. 그때 나의 측근들은 눈을 깜박이며 나만 바라보며 어떻게 해보라는 신호를 계속 쏘아댔다. 조카뻘 대는 친구에게 음.. 대략 난감한 상황... 사실 나도 센 언니는 조금 무서웠지만 어떻게든 이 분위기를 몇 분 전 화기애애한 기류로 돌리고자 머리를 굴리며 나의 개그 부심을 드러내었다.


" 어이구, 여하튼 어딜 가든.. 싸가지 없는 눔은 있다니까.. 군대에도 하극상은 존재하니까 쯧쯧 "


개그맨 목소리로 빙의하여 한 소리 하니.. 갑자기 모두가 빵 터졌다. 내 측근들은 '언니 사이다! 최고!'라고 작게 속삭이며 좋아한다. 나는 나와 한 참 멀리 떨어져 앉은 그 센 언니의 표정을 한 번 쓰윽 훑었다. 내심 떨리는 마음을 숨기고 ㅎㅎ. 그 쏀 언니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옆의 친구와 수다에 빠져 있었다. 여하튼 그 후로 그 센 언니 발언의 수위가 더 이상 올라가지 않은 걸로 봐서는 눈치를 챈 것이리라.


나는 유머 파워에 힘입어 그 후에도 농담과 무례의 경계가 흐려질 때면, 영화 '범죄 도시'의 장첸 말투를 흉내 내며 꾸짖곤 했다.


범죄도시.jpg

" 니 내 누군지 아니? " 하하하하


참 비슷하지 않다며 어린 친구들이 무안을 줘도 끊임없는 나의 개그 도전으로 어찌 됐든 분위기는 어색함 없이 흘러가고 있으니, 관계의 다양한 해법 중에 유머는 참으로 유효한 해결 방안이 되어주었다. 부작용이 있다면 나의 개그 부심에 몰두하다 어느 순간 나의 화법이 점점 더 교양과는 거리가 멀어진다는 불편한 진실 ㅋㅋㅋ



이제 이 모임에서 굳어지는 나의 캐릭터는 음.. 처음 내가 가졌던 큰 언니의 이미지는 언감생심.

처음 보는 이들은 수다쟁이 개그 부심 쪄는 욕쟁이 왕언니로만 보일지도? 모른다는 살짝의 우려가 들었으나, 까짓 거 그럼 어떠냐 싶다. 모두가 유쾌하게 잘 어우러지는 모임이 될 수만 있다면, 나 하나 망가져도 괜찮지 않나 싶다.



현타.jpg





이전 04화 MZ 친구들 사귀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