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혼자 살아?!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오랜 시간 동안 ' 사이좋게 지내라'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이 말은 이웃은 물론이고, 집단생활이 시작되는 시기부터 쭉 따라다닌 말이다. 이는 비단 나 혼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사회 문화 정서적으로 오랜 기간 몸에 밴 사회생활의 핵심 요인으로 전해 내려 왔다.
인간은 진화 생물학적으로도 무리를 지어 생활하며, 스스로를 외부의 적으로부터 보호하고 소속감을 통해 심리적 안정과 유대를 통해 발전해 왔기에 그것이 당연한 이치이고, 더 이상 거기에 대한 추호의 의문 없이 지내왔다.
그러던 어느 날, 세상의 흐름이 뒤바뀌었다. 과학 기술이 발전하고 첨단 테크놀로지 시대에 접어들자 사람들은 점차 무리의 소속감에 '피로'감을 호소하기 시작했고, 혼자 하는 삶을 보여주며 새로운 사회 문화 개념이 퍼지기 시작했다. 언론과 각종 방송매체에서 '혼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자연인부터 유명 연예인까지 집중 조명하며, 전국적으로 인기를 끌게 되었다.
몇 해전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 인기를 끈 철학자 쇼펜 하우어의 담론 중에서도 '인간관계 다 필요 없다.' '혼자 사는 법을 배워라'라는 자극적인 문구가 유튜브 채널에서 도배되는 현상을 목격한 바 있다.
오랫동안 살고 있던 동네를 떠나오기 전 많은 생각들이 나를 잠식했다. 십여 년이 넘게 살아온 곳에서 생면 부지 새로운 곳으로 떠난다는 두려움. 많은 세월을 함께 한 이들과 멀어진다는 사실이 가슴 한편 꽉 막힌 듯 아파오기도 하였지만, 남몰래 자유에 대한 갈망과 희망도 함께 솟고 있었다.
외로움의 대가로 관계로부터의 '자유'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긍정적 주문을 몰래 외우곤 했다. 아름다운 이별을 꿈꾸며 관계에 얽매이지 않는 독립적인 삶. 유연하고 건강하지만 나를 옥죄이지 않고 내가 주도하는 그런 관계를 이어가리란 환상은 산산조각이 난 채 이사를 오게 되었다.
자발적 능동적인 독립은 어리석은 허세에 불과했고, 처절히 파탄난 관계의 후폭풍으로 마음은 너덜너덜해졌으며, 새로 이사 온 신축 아파트의 설렘도 아무 감동을 주지 못한 채 집안에서 점점 우울의 늪으로 침잠하기 시작했다.
눈에 들어오는 책들은 모두 관계에 대한 회의감과 부정적 소모를 들먹이며, 혼자 하는 삶을 찬양하는 듯 보였다. 유튜브를 켜봐도 모두 '사이좋게 지내라'라는 말은 거의 들리지 않는다. 속마음을 숨기고, 사람에게 얽매이지 말고, 눈치 보지 말고 당당히 살아라. 외로움과 고독을 즐기라는 말뿐이었다.
'그러지 뭐. 이제 어차피 난 여기 아는 사람은커녕 친구도 없다.'
하지만 혼자 하는 삶은 그다지 멋지고 생산적이지 못했다. 낮밤이 바뀌고, 소파를 침대 삼아 넷플릭스가 유일한 친구이자 위안의 대상이 되었다.
20여 년 동안 맞벌이랍시고, 집안일 못하는 면죄부를 이제는 더 이상 얻지 못하는 관계로, 남들 하는 모양처럼 제때 밥 해 주고, 빨래 쌓이지 않게 집안일에 몰두하는 체 하며 그렇게 살았다.
이제 외벌이 가장이 된 남편의 더 무거워진 어깨와 입시생이 되면서 까칠해진 큰 아이. 늦둥이로 낳은 아들 눔. 겉으로 보기에는 그럭저럭 무난히 흘러가고 있었다.
수동적이고 다소 폐쇄적인 삶도 편하긴 하였다. 아는 사람이 없으니, 동네를 나갈 때 아무렇게나 하고 나가도 흠칫 당황스러운 상황도 없고, 하여튼 조용하고 밋밋하게 삶이 흐르고 있었다.
이렇게 적응하고 지내는 차에 복병이 생겼다. 바로 아들 눔이다. 아직 어린 저학년 아이가 전학을 왔으니, 엄마가 집안에만 있을 수 없는 일이 종종 생긴다. 참관 수업을 한단다.
아, 외출하기 싫은데.. 엄마들 사귀기 싫은데...
자꾸 귀찮고 성가신 마음이 솟는다. 더구나 이 녀석은 스스로 친구를 사귀는 능력도 없으면서, 친구는 환장한다. 즉, 엄마의 노력이 필요하다. 나중에 다 필요 없단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먹는다. 자식이 보배인지 웬수인지 나중에 더 두고 볼 일이다.
맨 뒷줄에 서서 아이에게 자상한 척 웃어주며 몇 시간을 서있는데,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프고 죽겠다.
아휴, 정말 늦둥이는 비추이다. 아이는 젊을 때 낳으라는 어른들 말씀을 날이 갈수록 뼈아프게 깨우치고 있다.
간간이 엄마들을 쓰윽 훑어봐도 역시나 다들 젊은 엄마 아빠들이다.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마음속 갈등을 잠재우고, 머릿속으로 결심한다.
'여기서 딱 두 명만 사귀자! '
큰 애를 키운 경험으로 학교와 아이에 대한 정보망은 또래 친구 엄마들이 없으면, 무지성 외톨이가 된다. 아직 갈길이 멀다. 왜 애는 늦게 낳아가지고.. 또 한 번 내 발등을 찧고 싶다.
어찌어찌하여 같은 반 엄마들 중 또래 맘들을 만났다. 물론 나보다 두 살에서 네 살 어리지만, 같은 세대의 엄마를 만났다는 사실은 사막 한가운데 '오아시스'와 같은 청량한 설렘을 주었다.
어여쁘고 젊은 엄마들은 삼삼오오 무리 지어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 틈에 말을 몇 번 붙이다가 거절을 당한 후 만났으니, 그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일이냐! 더욱이 그 기쁨은 나만의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다시 한번 폭소가 나왔다. 그들도 나이 든 엄마로 주눅 들어 조용히 사라질 즈음, 단 몇 살이라도 많은 나를 만나서 격하게 반가워하니, 하하하! 이심전심이지^^
우리는 늦둥이 엄마의 동질감으로 한데 뭉쳐 모든 얘기가 술술 풀리며,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하지만, 집에 돌아오면 나는 이 친화 속도에 당황스럽고, 새로운 인간관계에 대한 경계심으로 많이 혼란스럽고 걱정이 되었다.
사실 새로운 관계에 관심도 없었고 회의적이었기에 내가 주도하는 적정선을 넘지 않는 그런 관계를 지향하던 차에 갑자기 훅 들어온 사람들로 마음이 어수선하고 조금 짜증스럽기도 했다. 통제권을 잠시 놓쳐버린 느낌이었다.
가장 문제는 '나 자신'이었다. 말하기 좋아하고 경계를 허무며 수다 삼매경에 빠지는 '나'!
정말 대책 없다. 모두가 웃고 깔깔대는 사이에 나는 내 맘속 깊은 경계심의 문을 스스로 박차고 달려 나오고 있었다.
모임이 끝나고 돌아오면, 정신이 번뜩 났다. '아, 이게 아닌데... 이렇게 나를 오픈하고 히스토리를
주저리주저리 .. 이렇게 확 친해지면 안 되는데.. 이들은 그냥 학부모 모임의 지인들로 지내야 하는 사람들인데..
'나 뭐 하는 거야!'
마치 오랜 친구인양 TMI를 남발하는 내 모습을 성찰하며, 참 웃기지도 않은 고민에 휩싸였다.
어느 날은 마구 얘기가 입밖에 나오려는 걸 허벅지를 꼬집으며 참기도 하는 웃픈 상황도 반복되었다. 정말 어째야 하나.. 분위기에 휩싸이면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걸 자각하고는 결심을 했다.
'그래, 만나지 말아야 해. 그 수밖에 없어.' 그래서 나는 의도적으로 만남을 피하려고 노력했다. 갖은 핑계를 대고, 그들끼리 친해질 시간을 충분히 벌면서, 나는 서서히 주변인으로 남으리라.
그렇게 다시 집안에 칩거하며 내 안의 사회적 고립감을 스스로 선택하여 나의 주도적 관계로 착각하며 지냈다. 하지만, 식구들은 그런 나를 걱정스레 바라보기 시작했다.
어느 날 남편이 한 말이 내 결심을 지우게 되었다.
" 언제까지 집에만 있으려고? 밖에 나가 산책도 하고, 친구도 사귀어야지. 언제까지 벽을 쌓고 살 거야? 당신은 저쪽 동네 사람들에게 상처받고 아직도 거기에 미련을 두고서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을 안열 거야? 잘은 모르겠지만, 그렇게 불러내주고 찾아주는 것도 고마운 거 아냐? 말 들어보니 나쁜 사람들 같진 않은데.."
한 대 맞은 듯했다. 그래, 그렇다. 내가 뭐라고.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그들을 경계하고 멀리하고. 손 내밀어 주는 것도 고맙지.. 이 나이에 친구 사귀기도 힘든데, 뭐 대단히 고고한 철학자인양. 웃기지도 않다. 생각해 보니, 내가 하는 모양새가 참 어리석고 유치하게 느껴졌다.
나는 닫힌 마음의 문을 열고 그들의 손을 잡기로 했다. 나는 그렇게 세상 밖으로 나왔다.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었고, 생각만큼 나쁘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친구가 되었고, 세상에는 아직 좋은 사람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본인이 가진 경험의 데이터가 세상 진리인양 여기며 고수하는 것도 꼰대의 삶으로 가는 것이리라. '손절' 열풍은 자극적인 자기 보호 처세일 뿐. 어울리며 살아가는 삶이 마냥 핑크빛은 아니나, 기냥 포기하고 살기엔 남은 생이 너무 길다.
관계에 대한 지나친 집착과 기대를 버리고 단순하고 건강하게 유지하는 법 을 죽을 때까지 배우고 실천하며 살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