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어쩔 수가 없었을까

박찬욱의 <어쩔 수가 없다>가 묻는 정체성과 선택의 숙제

by 비해브

박찬욱이 설계한 잔혹한 생존 게임, <어쩔 수가 없다>


영화 <어쩔 수가 없다>(No Other Choice)는 거장 박찬욱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이병헌, 손예진 등 압도적인 배우들이 호흡을 맞춘 서스펜스 드라마입니다.

25년간 몸담았던 제지 회사에서 갑작스럽게 해고된 주인공 '만수(이병헌)'가

재취업을 위해 자신보다 유능한 잠재적 경쟁자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는 과정을 그립니다.

평범한 가장이 괴물로 변해가는 이 과정은 단순한 범죄 스릴러를 넘어,

현대 사회의 고용 불안과 인간 본성의 밑바닥을 서늘하게 조명합니다.




1) '어쩔 수가 없다'는 변명, 그 다층적인 얼굴들


이 영화의 제목은 극 중 모든 인물에게 각기 다른 무게로 작용합니다.


주인공 '만수'(이병헌): 가장으로서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절박함은 타인의 희생을 정당화하는 '어쩔 수 없는' 방패가 됩니다. 이는 그와 함께 해고된 전문직 종사자들(이성민, 차승원 등)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생존의 논리입니다.


아내 '미리'(손예진): 살인을 저지르고 돌아온 남편을 마주한 그녀는 경악하지만, 결국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지키기 위해 남편을 '어쩔 수 없이' 수용하고 용서합니다.


아들: 무너져가는 가정을 보며 친구 아버지의 가게를 털기로 결심하는 아들의 모습은, 부모의 타락이 대물림되는 비극을 보여줍니다.


사회와 기업: AI와 자동화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노동자를 '비용'으로 취급하며 내쫓는 기업의 논리 역시 '시대적 흐름이라 어쩔 수 없다'는 차가운 방관으로 일관합니다.


2) 극명한 대비가 주는 서늘한 시사점


영화 속에는 뇌리에 박히는 두 가지 대비되는 장면이 있습니다.


- 연대의 포효 vs 고립의 포효: 초반부, 해고 노동자들을 대표해 사측과 당당히 맞서 싸우던 만수의 모습과, 후반부 어두운 공장에서 혼자 남겨져 "해냈다"며 포효하는 모습의 대비입니다. 정의를 위해 싸우던 리더는 사라지고, 오직 자신만을 위해 남을 짓밟은 '생존자'만 남은 공허한 승리를 보여줍니다.


- 슬픔의 포옹 vs 희열의 피로: 피 묻은 남편을 안고 눈물 짓는 아내의 표정과, 드디어 과업을 완수했다는 안도감과 광기가 섞인 남편의 표정은 같은 공간에서 전혀 다른 지옥을 경험하는 부부의 단면을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3) 우리가 과연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가?


영화는 우리에게 불편한 숙제를 던집니다. 맹목적으로 그를 비난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사회적 시스템의 피해자로 동정해야 할까요? 만약 우리가 그들을 모두 용서한다면, 영화 말미 뿐 아니라 앞으로도 속출할 '또 다른 만수들'이 저지를 범죄와 그로 인한 사회적 혼란은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요? 개인의 도덕성과 사회적 구조 사이의 이 아이러니는 관객의 마음을 끊임없이 괴롭힙니다.


4) 가장 근원적인 질문: 정말 '어쩔 수가 없었나?'


"정말 다른 선택지는 없었는가?"


만수(이병헌)은 분재 가꾸기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고,

범모(이성민)은 레코드판을 활용한 음악 카페라는 대안이 있었습니다.

주인공 만수는 범모에게는 "음악 카페를 할 수도 있지 않았냐"고 쉽게 말하지만,

정작 자신에게는 그 유연함을 적용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영화의 제목은 마침표(.)가 아닌 물음표(?)로 읽혀야 합니다.


"어쩔 수가 없나? (No Other Choice?)"





'나'를 정의하는 것은 직업이 아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 영화는 '나의 직업 = 나 자신'이라는 공식이 얼마나 위험한지 경고합니다.

인생에서 '나'에게 정말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인지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변화하는 세상에 맞춰

끊임없이 자신을 변모시키려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한탄만 하며 과거의 정체성에 매몰되는 순간,

우리는 '어쩔 수 없다'는 비겁한 변명 뒤에 숨게 됩니다.

개인으로서도, 사회로서도 우리가 과연 어떤 '액션'을 취하며 살아갈 것인지

진지한 숙고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당신의 오늘에는 어떤 마침표와 물음표가 찍혀 있나요?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당신이 놓지 말아야 할 마지막 선택지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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