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나아와 새새명을 얻은
선배는 힘들게 투병하는 중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재활 중이었다.
뇌경색으로 쓰러져 고생하는 와중에 심장에도 문제가 생겼다. 말이 어눌하고 혼자서는 걷기도 힘들어졌다. 외출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저 병원과 집에 갇혀 치열하게 재활하며 견딜 뿐이었다. 선배는 벼랑 끝에 발끝으로 서게 되었다. 그런 사람이 사람 많이 모이는 송년회장에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적이었다. 나는 그녀를 부둥켜안고 눈물 나게 기뻐했다.
송년회장에서 인사를 나누던 그 짧은 순간에, 그녀는 남의 눈을 피해 작은 선물꾸러미를 내게 슬쩍 건넸다. 얼결에 가방에 쑥 집어넣었다가 집에 와서 풀어보니, 팔찌로도 손색이 없이 예쁜 손목시계였다. 시계는 오리지널 케이스 속에 보증서와 함께 들어 있었다.
사실 나는 연말에 흔히 나누는 쿠키나 사탕 같은 가벼운 선물인 줄 알고 받은 터라 무척 당황했다. 유행이 좀 지나긴 했지만, 시곗줄은 내게 딱 맞았다. 부랴부랴 선배에게 전화를 걸어 이게 웬 시계냐고 물었다.
“오래전에 크루즈여행 갔을 때 배 안에서 산 건데 한 번도 차고 나가지 않았던 새것이야. 이번에 큰맘 먹고 모임에 나가는 김에 자네한테 꼭 전해 주고 싶었어. 오랫동안 장롱 속에 넣어두었던 것이라 제대로 가는지나 모르겠네. 그래도 나중에 내가 보고 싶을 때 한 번씩 차고 다니면 좋겠어.”
선배의 염려는 적중했다. 시계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태엽을 감아보고 이리저리 흔들어 봐도 바늘은 10시 20분에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았다. 몸이 아픈 선배가 큰맘 먹고 준 선물이지만 가지 않는 시계를 차고 다닐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서랍 속에 처박아두는 것은 준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마음이 복잡해졌다. 일단 죽은 시계부터 살려놓고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올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씨라고 일기예보에서 한파 경보를 내렸다. 그래도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시계를 싸 들고 무조건 나왔다. 오래된 전자상가를 찾아 나섰다. 그 전자상가에 가면 수리점이 있을 거라고 예상한 내 추측이 맞았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는데 <시계 수리 전문>이라고 쓴 간판이 보였다. 너무 반가워서 하마터면 소리를 꽥 지를뻔했다.
다행히도 시계는 배터리만 방전된 것이었다. 오래된 것이라 수리점 아저씨에게는 맞는 배터리가 없었다.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겨우 찾아냈다. 쉽게 구하기 힘든 모델이라 그런지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웬만한 패션 시계 하나 살 수 있는 돈이었다. 하지만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이건 내게 그냥 시계가 아니었다. 나중에, 자기 보고 싶을 때 대신 보라는 선배의 말이 목에 걸려 영 넘어가질 않았다.
2주 만에 시계를 찾게 되었다. 대체 무엇으로 닦았는지 전체가 다 백금처럼 반짝거렸다. 기대보다 훨씬 더 좋아졌다.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나에게 수리점 아저씨가 신신당부했다.
“비싼 시계라고 상자에 담아서 깊숙이 넣어 두시면 안 됩니다. 이 배터리는 햇빛을 못 보는 날엔 형광등 불빛이라도 봐야 수명이 오래 가거든요. 매일 차고 다니지는 않더라도 항상 빛을 보게 해주세요”
내겐 그 말이 예사로 들리지 않았다. 어둠 속에 갇혀서 지레 포기하지 않아야만 타고난 수명대로 살 수 있다는 메시지였다. 미리 앞당겨서 절망하지도 말고, 선물로 받은 오늘을 알차게 잘 살라는 부탁으로 들렸다.
부랴부랴 인증 사진을 찍어 카톡으로 보냈다.
’배터리를 바꿔 넣으니까 시간이 딱 맞아요. 정말 예쁘지요?’
’예쁘다. 네게 가니 처음 살 때보다 더 빛난다. 이제야 크루즈 다녀온 보람을 느낀다.’
’새해엔 더욱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기도할게요. 날이 풀리면 제가 맛있는 밥 한번 대접할게요.’
’고마워. 하지만 갈수록 점점 외출이 힘들 거 같아. 낮에는 견딜 만한데 밤이면 더 심해지는 통증이 두려워. 그래도 힘을 내 볼게.‘
계절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휙휙 달려가고 있는데, 우린 아직도 전화로만 안부를 묻고 있다. 죽은 듯 보이던 나무에는 다시 잎이 나고 꽃도 활짝 피었지만, 선배는 여전히 겨울나무에 머무르고 있다. 아직도 그저 날이 확 풀리기만을 바라고 있다.
손목시계는 지금 우리 집 안방 화장실 앞 화장대 한복판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 내 손길과 발길, 눈길이 가장 많이 머무르는 곳이다. 로고가 새겨진 딱딱한 뚜껑을 벗겨버리니 푹신한 거치대에 앉은 네모난 얼굴이 더욱 멋지고 당당하다.
요즘 나는 화장대 위 전등을 일부러 켜 놓고 나올 때가 많다. 하루에도 몇 번씩 시계가 잘 가는지 확인하며 두 손으로 끌어안는다. 선배와 함께 나란히 걸으며, 이 녀석이 내게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꼭 보여드리는 날이 속히 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