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최초 자유 의지 선택
여보 ~ 생각해 봤어? 뭐 하고 싶은지? 아직 결정 못 했으면, 몇 가지 옵션이라도 얘기해 봐... 내가 결정해 줄게.
아내와 단둘이 장거리 차 안에 있을 때면, 항상 아내에게 듣는 소리다. 언제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이제 퇴직이 진짜 몇 년 남지 않았는데, 지금부터라도 퇴직 후에 무엇을 할지 결정하고 서서히 준비해야 할 것 같은데, 아직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래도, 무작정 골프나 등산으로 내 인생 2 막을 보내고 싶진 않아.
이 말할 때 즈음이면, 응당, 나는 내 장인의 경우를 아내에게 얘기한다. 내 장인은 좋은 인품에, 큰 욕심이 없으시고, 주위에 항상 친구가 많은 분이다. 직장은 근 65세까지 다니셨으니, 한평생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셨다. 그러나 장인의 은퇴 생활은 사위이자 직장인으로서 후배인 나에게 많은 것을 고민하게 했다.
장인은 은퇴 후 20 년 동안, 월, 화, 수, 목, 금요일을 산행하시고, 토, 일요일은 가족과 시간을 보내신다. 두 가지가 대단한데, 첫 번째는 그렇게 오랫동안 매일 산행을 지겹지 않게 하실 수 있는 것, 두 번째, 산행 멤버가 매 요일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그것은 평소 체력을 잘 가꾸셨고, 인맥을 잘 관리해 오셨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래도 은퇴 후 20년, 아니 현실적으로, 30년을 등산만 하면서 보내기엔 짧지 않은 인생 후반이 너무 덧없지 않은가. 인생 1막의 전쟁터처럼, 치열하게 살진 못하더라도, 뭔가 작은 보람이라도 느끼면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뭘 하고 싶은데?
아직 모르겠어
거 봐. 고민을 엄청하고 있는 당신도 뭘 하고 싶은지조차 모르잖아. 대부분의 은퇴자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 아빠처럼 등산을 다니는 거야. 나도 당신이 인생 후반을 등산으로만 채우기를 바라지 않으니, 본격적으로 고민해 보셩
이제는 고민을 넘어, 조바심조차 나기 시작한다. 우리는 아니, 나는 왜 아직도 이 나이 되도록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뭘 잘하는 지조차 모르는가? 학창 시절, 대부분의 아이들처럼, 내 적성, 내 능력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성적에 맞춰서 대학교를 선택했고, 취직이 잘 된다고 하는 학과를 자동반사적으로 선택했다. 학과 애들 따라, 시작한 공인회계사 시험을 내 싱그러운 청춘을 다 쏟아붓고 천신만고 끝에 합격하여 시작한 회계사일이 내 적성에 맞지 않은 것임을 아는데 채 몇 달이 걸리지 않았다. 적성에 맞지 않은 일을 생활인으로 살아남기 위해 죽도록 한 세월이 30년. 생각해 보면, 우리네 인생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내 자유의지와 상관없이 엉뚱하게 흘러가 버린다.
이제 은퇴란 녀석이 마지막 골목을 돌면 나타날, 50대 끄트머리, 10대 아이도 아니고, 살 만큼 살았고, 산전수전 경험을 할 만 큼 한 나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 물음 앞에서 이제는 내 자유의지로 답할 때가 되었다.
친구들과 여행 중에, 우리는 일하는 것 빼고 무엇을 잘하는가라는 주제로 이야기하다가, 삼성전자 고위 임원이었던, 한 친구가 자기 직장 동료 이야기라며
내 동료가 건강을 위해서 매일 조깅을 했는데 그의 아내와 함께 뛰었다. 아내가 처음에는 뛰기 싫어했는데, 남편이 조금 뛰고 숨을 헐떡일 때, 남편과 똑같이 뛰고도 전혀 숨이 차지 않았다. 그때 아내가 처음으로 자기의 달리기 능력을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꾸준히 연습한 결과 보스턴 마라톤까지 나가게 되었다. 결론은 자신을 잘 살펴보지 않으면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잘하는지 알지 못한다.
이 화두가 내 머리에 가득할 때, 우연히 스쳐 지나가면서 보게 된 유튜브에서 한 작가의 말이 내 뇌리를 때렸다. 우리보다 훨씬 앞서서 고령사회를 맞이한 일본의 중산층의 은퇴 후의 생활 패턴을 설명하길,
그들은 가족을 중시하고, 봉사와 강연 및 지역사회 활동을 통해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유지하고 싶어 한다
'그래! 어떤 봉사와 어떻게 강연과 지역사회활동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의 은퇴 후의 삶의 방향에 대한 키워드로 삼으면 좋겠다'
50대 초반에 감행한 영국 유학, 내 삶의 변곡점이었던 시절, 그 여름 방학 때 고등학생 아들과 걸었던 카미노 데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프랑스 길 800km의 매일의 감상을 적어 보기 위해 시작했던 블로그가 8년째 접어들었다. 나의 블로그는 내 세울 것 없는 내 시간의 궤적과 잡다한 상념으로 채워져 있지만, '내 블로그는 아들이 내 나이 즈음 되었을 때 자기 아빠 엄마를 보고 느낄 수 있는 가족 비디오다'라는 마음으로 적어 가고 있는 것이다.
블로그를 적으면서, 글쓰기를 잘하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임을 알게 되었고, 나이 60세엔 적어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제대로 해 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글쓰기를 통해서 나와 비슷한 고민을 했거나 하고 있는 사람들과 교감하고, 영감을 나누고 싶다. 그리고 이것이 봉사, 강연, 지역사회활동으로 이어지는 미약한 통로면 좋겠다. 그 끝 모양은 지금으로선 알 수 없지만, 과정 자체가 즐거운 일일 것이다.
20대에 등 떠밀려 선택한 전공으로 인생 전반부 30년이 결정되었지만, 나이 60 엔, 내 나머지 30년을 보낼 은퇴 전공은 이제야말로 내 자유의지로 선택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