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터디 그룹 4
2018년 1월 8일.
드디어 오늘 첫 오리엔테이션이 있는 날.
처음으로 나의 과정 친구들을 만나는 날이다. 이 학교에는 수많은 석사 학위 과정이 있지만, 크게 보면 세 가지 프로그램이 있다.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MBA 과정 (대학 졸업 후 3~4년 된 가장 젊고 똑똑한 친구들이 공부하는 프로그램)
Executive MBA (회사의 중간 간부급 인력이 공부하는 과정, 30대에서 40대 초반)
마지막으로 Sloan 과정 (대기업의 중역급으로 40대에서 50대로 구성)으로 내가 조인한 프로그램이다.
정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다양한 나라, 다양한 피부색, 다양한 언어를 쓰는 친구들이 모였다. 겉으로 반갑게 악수하고 인사를 나누고 있지만 모두 다소 어색한 표정과 몸짓. 그 속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아는 척하려고 애쓰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제일 시니어 프로그램이긴 하지만, 과정 멤버들이 30대 초반부터 50대 중반까지 광범위한 연령대에 포진해 있고 전체 60여 명을 내 나름의 기준으로 나눠 보면 아주 재밌는 특징들이 보인다.
1 그룹은 영국친구들 약 15명 정도를 포함한 서양 친구들로서, 미국, 독일, 프랑스, 스위스, 스웨덴,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심지어 아프리카 흑인 등 출신이 다양하다. 특이한 것은 여성들이 많고 가장 많은 직업은 변호사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많은 친구들이 이혼했다.
이 그룹의 이미지는 똑 부러지는 서양 여성 변호사
2 그룹은 남미 출신 친구들인데, 특히 브라질 친구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대부분 40대 후반으로 자기 나라의 회사에서 CEO 등 최고위직에 있었고 여하한 이유로 현재는 직업이 없으며 자기 나라 시스템에 대해서 진절머리를 치며 과정이 끝나면 어떻게 해서라도 영국에 남고 싶어 하는 그룹이다.
키워드는 직업을 상실한 고위직 출신 남성
3 그룹은 아시아인 그룹으로 극동의 영원한 삼각관계인 중국계가 2명, 일본인 3명, 나를 포함한 한국인 2명이 있고, 마이너 그룹으로, 싱가포르, 말레시아 친구들도 보인다. 아시아 친구들은 나를 제외하곤 하나 같이 많아야 30대 중반으로 아주 젊고, 특히 일본 친구들은 모두 일본 대형 은행 출신으로 회사에서 뽑혀서 학비와 생활비 전액을 지원받아서 온 똑똑한 친구들이다. 물론 나를 포함한 내 연령과 비슷한 인도인 의사, 인도인 경영자 친구들 같이 2 그룹에 더 맞는 사람들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이 그룹의 대표 선수들은 젊고 스마트하지만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엘리트
세 그룹은 너무도 다른 특성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들 키워드에 내재되어 있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첫째, 이들은 나름의 직업적인 성취와 직위를 가진 사람들로서, 거기까지 오기에 필요(?) 했을 평범하지 않은 성격과 고집을 가졌다. 둘째, 더 중요한 특징으로서 직업적 성취를 뒤로하고 중년의 나이에 본 과정에 들어온 것은 단순히 학위를 하나 더 따겠다는 이유 외에 그들만의 개인적인 상처와 사유가 있다는 것이다.
즉, 이 프로그램은 자존심 높지만 인생 중반에 실직, 이혼, 경력 중단 등 여하한 이유로 상처받은 영혼들의 변화를 끌어내는 갱생 프로그램이다.
중년의 위기에 처한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진 상처받은 영혼들
그리고 곧 발표된 나의 스터디 그룹 (그룹 4) 멤버들
엔지니어 출신의 턱수염을 가진 전형적인 영국남자 필,
핸썸한 브라질 투자은행 대표 마르코스,
차가운 바람이 쌩쌩 부는 독일 여자 변호사 안드레아,
인도 남부 지방 출신으로 어디로 튈지 모를 것 같은 젊고 자유분방한 바누,
그리고 최연장자이자 한국인 꼰대, KS
전혀 어울리지 않고 아무런 공통분모도 없는 이 친구들과 일 년 내내 스터디 그룹으로 잘 지낼 수 있을까? 한 번 정해진 스터디 그룹은 바꿀 수도 없어 일 년 내내 마주쳐야 하나, 그룹 숙제를 바탕으로 성적이 결정되기 때문에 스터디 그룹 멤버가 너무 중요했다.
그러나, 내 스터디 그룹이 전체 13개 그룹 가운데 ‘요주의 그룹’ 임을 아는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날개 부러진 영혼들의 에고가 강렬히 부딪혀 파국으로 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오리엔테이션 다음날, 스터디 그룹 멤버들 간의 서먹함을 없앨 겸 협동정신을 높이기 위해 본 과정 학사팀이 게임을 하나 준비했다. 런던 템즈강 남쪽 변의 런던아이에서 출발해서 타워브리지까지 약 6 km 강변거리에 있는 건물들에 숨겨 놓은 시크릿과 건축물들의 역사적 의미를 함축한 키워드를 찾는 것이다. 아침 9시부터 12시 정오까지 3시간 동안 찾은 시크릿수와 키워드 수를 합해서 그룹 간 순위가 결정되었다.
게임은 단순하여 학사팀이 시크릿을 숨겨 놓을 만한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건물을 빨리 맵핑하고,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시크릿을 찾고 구글링을 통한 해당 건물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여 키워드를 찾는 것인데, 팀 멤버 간의 분업과 동시에 협업 및 구글링의 속도가 승패의 키였다.
영국, 브라질, 독일, 인도, 한국인으로 구성된 나의 그룹 4 멤버들... 영국과 독일은 앙숙이고, 브라질과 인도는 도저히 공통점이 없으며 그들 눈에 제일 에지가 없어 보이는 한국 꼰대가 같이 하는 게임이 과연 잘 진행될까 라는 나의 의구심이 게임 시작하자마자 바로 현실이 되었다. 그나마, 독일 변호사 안드레아는 감기 몸살 때문에 게임에 나오지도 않아서 우리 그룹은 4명으로 출발했다.
템즈 강변의 역사적 건물은 빤하니, 바로 각자 흩어져서 '독고다이'로 찾자고 브라질 마르코스가 제안했다 (마르코스 이 녀석은 1년 내내 진정 '독고다이' 였다). 제일 어린 인도 친구 바누는 우선 구글링 해서 역사적 건물 후보를 먼저 추려 놓고 출발하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바누 이 녀석은 1년 내내 진정 '자유 영혼'이었다).
한 치의 양보 없이 두 친구의 언쟁은 30 분 이상 이어졌다. 급기야 마르코스 입에서 'F' 자가 튀어나왔고 둘은 각자도생으로 출발해 버렸다. 상황이 악화된 또 다른 이유는 각 그룹에 한 명씩 영국인들이 배정되었는데 우리 그룹에서도 자연스럽게 리더 역할을 해야 할 영국인 필이 상황을 중재하고 팀의 방향을 전혀 제시하지 못하고 방관한 점이다.
우리 그룹의 리더 격인 필은 자기주장을 어필하지 않는 고민만 하는 '햄릿'형이었다.
No 에지 형인 한국 중년 아저씨 말은 통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남은 노땅들인 나와 필이 건물마다, 나는 시크릿을 찾고, 필은 구글링 하여 키워드를 찾기로 했다.
성적과는 무관한 게임이지만 입학 후 첫 그룹 과제이니 만큼 잘 해내고 싶어서 나름 열심히 시크릿을 찾았다. 그러나, 런던아이, 셰익스피어 가든 같은 유명 관광 장소는 알지만, 강변 산책로 이면에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역사적 건물이 그렇게 많이 있는 줄 나는 알 수 없었다.
12시에 학사팀이 마련한 식당에 멤버들이 모였다. 싸우고 튀어 나간 마르코스와 바누는 서로 눈길도 주지 않는다. 우리 그룹이 찾은 시크릿과 키워드 개수는 각각 20개 총 40개로 의외로 많이 찾았다고 생각했다. 점심 후 전체 13개 그룹이 모였다. 삼삼 오오 다른 그룹 친구들과 이야기하며 서로 몇 개 찾았는지 물어본다. 불과 몇 개 그룹에게만 물어봤는데, 그들의 개수는 우리와 단위부터가 다르다. 80개, 90개...
아니나 다를까, 1등은 스타업 CEO인 영국인 폴과 싱가포르 관광청 여성 공무원이자 국비 유학생인 수민이가 있는 그룹 7로 총 120개를 찾았다. 우리 그룹이 찾은 개수의 3배인 셈이다.
불안한 예감은 항상 적중한다...
그룹 4가 13개 그룹 중 꼴찌다
동시에 다른 그룹애들이 우리 그룹 멤버들의 면면을 훑어보는 눈길이 느껴진다.
'앞으로 조심해야 할 상대라고 생각하겠지? 나를 포함해서... 젠장...'
인생 중반의 위기를 맞아 찾은 갱생학교..
나의 그룹이 내 인생 중반의 최대 위기였다.
'이 녀석들과 어떻게 1년을 보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