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긴 어디? 나는 누구?

이게 정녕 당신이 보여주신 길입니까?

by 불지않는 면빨

2018년 1월 1일 월요일


드디어 런던에 도착했다. 오후 5시.

겨울엔 오후 3시면 해가 떨어지고, 많은 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우산을 안 쓰기엔 애매한 보슬비가 거의 매일 내리는 영국. 공항 밖을 나오자 비 내리는 깜깜한 오후 5시. 여기가 여지없이 영국임을 실감한다.


영국 떠날 땐 주재원 신분이었는데, 불과 7개월 만에 학생을 가장한 백수로 다시 돌아왔다.


런던 시내에서 기차로 역 세 개 정도 떨어진 근교의 One-bed room 아파트에 짐을 부리고, 동네 마실을 나갔다. 어두워서 인지, 비 때문인지, 주위 분위기는 생경하다 못해 음산하다.


이면도로에는 휴지와 쓰레기 파편들이 비에 젖어 여기저기 길바닥에 어지러이 붙어 있고, 상점이나 가게는 온통 알록달록한 촌스러운 아니 아주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데, 가만히 살펴보니 모두 중동인들의 가게다. 여기가 런던 최대의 아랍 커뮤니티인 걸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앞으로 지낼 아파트 바로 앞에 있는 독특한 건물이 이슬람 사원이었다.


아랍 상점에서 오늘 저녁에 쓸 양파와 감자 몇 알을 샀는데, 우리나라 전통 시장에서 오이며 고추를 막 담아 주는 그냥 검은색 비닐봉지에 무심히 넣어 준다. 모두 합해서 2파운드도 채 하지 않는다. 과연 내 형편에 맞는 저렴한 동네다.

심란한 마음을 누르며 런던에서의 첫 끼니를 한국에서 가져간 냄비로 밥 해 먹고 비행기에서 한잠도 청하지 못해 녹초가 된 몸을 침대에 뉘었다. 빗줄기가 점점 세지며 바람을 타고 창문을 타닥타닥 때린다. 비 내리는 인적 없는 밤 길엔 엠블런스만 요란한 경고음을 내며 달린다.


덜컹덜컹, 비바람에 흔들리는 창문처럼, 내 감정도 요동친다.


'이게 정말 잘한 일일까?
학교 생활은 잘할 수 있을까?

내가 가장 나이가 많을 텐데, 어린 친구들과 잘 어울릴 수 있을까?
며칠 뒤면 도착할 아들이 아빠 혼자 있는 집에 오는 것이 좋을까? 아니, 즐거운 일일까?
나는 그 아이와 엄마 없이 잘 지낼 수 있을까?'


한국 떠나기 전, 이런 상황을 무수히 상상했고, 잘할 수 있다고 스스로 최면을 걸었건만, 5년이란 긴 시간을 보낸 영국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낯설고, 쓸쓸하고, 불안했다. 갑자기 근래 한국에서 유행했던 광고 문구가 떠올랐다.


Who am I? Where am I?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자는 둥 마는 둥 밤잠을 설치고 일어나 아침 창 밖을 보니 여전히 비가 내린다. 비... 비... 비...


'젠장 ~ 이 놈의 비라도 그치면, 그나마 기분이라도 좀 나아질 텐데..'


다음 주 수업 시작 전 학교를 한 번 둘러볼 요량으로 가랑비를 맞으며 학교에 갔다. 아직 겨울 방학이라 한적하다 못해 텅 비어 있는 교정을 여기저기 둘러보니, 날씨 탓인지 학교가 을씨년스럽게 보이고 교정이나 시설도 생각보다 크지 않아서 조금 실망했다.

리셉션에서 학교 시스템에 등록하니 이름과 사진이 박힌 학생증이 금방 기계에서 튀어나온다. 직원이 건네준 학생증을 받으니 기분이 이상하다.


20살에 받은 학생증이 마지막 일 줄 알았는데, 30년 만에 다시 학생증을 받았다.

그다음 앞으로 혼자 다니게 될 동네 성당을 찾는 일. 열심히 구글링 하니 집에서 걸어서 약 30분 거리에 런던 주교구 직할 카톨릭 성당이 있다. 런던 도착 후 첫 주일이자 개학 하루 전, 미사를 보기 위해 집을 나섰다. 일주일 내내 주야장천 내리는 보슬비를 맞으며 도착한 성당은 생각보다 근사하다. 성당 동네 역시 깔끔하고 정돈되어 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성당 동네는 내가 사는 동네와 다른 동네였다).


영국 와서 처음 찾은 마음에 드는 곳이다.

미사까지 아직 시간이 좀 남았고 비가 와서 그런지 성당 안에는 사람이 몇 안된다. 조용한 성당의 모퉁이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시는 로컬 할머니의 모습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가장 낮은 자세로, 가장 절실한 모습으로...


나도 조용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다.


정녕 이게 당신이 보여 주신 길입니까?
저를 여기로 부르신 것이 정녕 당신의 뜻입니까?
여기로 부르신, 그 이유도 보여 주십시오
그리고, 이 길 너머, 제가 가야 할 길도 보여 주십시오



런던의 첫 주일은 그렇게 지나간다.


혼밥, 혼술, 혼잠, 혼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