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당신에게 주는 선물이에요

사기결혼

by 불지않는 면빨

내 아내는 강남 출신이다.


큰 부자는 아니지만, 어느 하나 빠질 것 없는 중산층의 가정에서 꾸밈없이 세상 험한지 모르고 자랐다.

결혼 적령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아내는 28세에 적극적으로 선을 봤고, 나 역시 그 선에 나온 수많은 총각들 중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인연이 되려고 했던 것인지 우리는 첫눈에 나쁘지 않았고 나는 세 번째 만남에 청혼했다. 내 인생 처음으로 여권을 만들고 아내가 선택한 호주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날, 처가에서 마련해 준 신혼집에서 본격적인 두 사람만의 행복한 신혼 생활을 꿈꾸며 와인을 따르고 촛불을 켰다. 첫 만남부터 채 100일도 되지 않은 날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숨길 수없다


와인 한 모금의 달콤한 맛을 채 느낄 새 없이, 아내가 곧 알게 될 내 카드 빚을 공개해야만 했다. 나를 공부시키기 위해 부모님이 진 빚의 규모를 공개했고, 빚을 갚느라 취직 후 내 월급이 고스란히 부모에게 가고 있다는 사실도 털어놓아야 했다. 아내에게 더 절망적이었던 것은 이제 결혼과 더불어, 부모의 빚을 온전히 내가 가져와야 한다는 사실과 더 이상 생활 능력이 없는 부모의 생활비 역시 내가 감당해야 한다는 현실이었다. 아내에겐 미안했지만 그 외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아내는 선 봤던 그 수많은 총각들 중에서 최악을 뽑은 셈이다. 역시 세상사가 많이 한다고 꼭 잘하는 것은 아니다.


아내는 아무 말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내의 인생에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단어... 거액의 빚과 카드 돌려 막기. 요즘 시대 같으면 이 결혼은,


사기결혼이었다


그 후 한동안 아내는 우울증에 빠졌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 결혼하자마자 큰 빚이 생겼다는 걸, 아내는 그녀의 부모님에게 말할 수 없었다. 월급을 받아도 이리저리 돈이 흩어지니 생전 처음으로 콩나물 가격을 깎았고, 백화점을 좋아했던 아내는 시장통 옷을 사 입었다.


그렇게 신혼이 흘러갔다. 아기도 태어났다. 나는 미친 듯이 일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나는 조금 슬픈 드라마나 발라드 노래만 들어도 눈물을 훔친다. 나이가 드니 증상이 더 심해진다. 그러나, 결혼생활 25년 동안 아내가 어떤 슬픈 드라마나 구슬픈 노래에 우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내는 내 젊었을 적 이야기를 하면 눈물을 훔친다.


그것은 나에 대한 사랑일까, 아니면 연민일까..


당연히 두 개 다겠지만, 나는 안다.. 그 눈물에는 사기 결혼을 당한 자기의 연민도 투영되어 있다는 것을...




아내 역시 동의한 나의 퇴직 의사를 회사에 밝힌 후, 나는 조심스럽게 아내에게 이야기했다.


"나, 대학원 가고 싶어.. 그것도 영국으로"

"응? 무슨 돈으로? 왜 가고 싶어?

"당신 알잖아... 내 콤플렉스... 이번이 내 인생의 마지막 기회일 거 같아... 마지막..."


결혼 생활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동그랗게 떤 눈으로 아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것은 51세의 남편이 당장 취직할 생각이 없다는 의미였고, 노년 준비에도 부족한 금쪽같은 퇴직금을 가성비가 제로인 일에 날려 버린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래? 그럼 해봐.."


넉 달을 꼬박 준비하고, 런던에 있는 대학원에서 오퍼를 받았다.


그러나, 막상 오퍼를 받으니 결정할 수가 없었다. 퇴직금은 차치하더라도 영국을 떠나면서 두고 온 아들의 학비 걱정, 내 영국 생활비 걱정, 한국 생활비 걱정.. 무엇보다도 대학원을 졸업하면 53세가 되는데 과연 그때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감이 나를 짓 눌렀다. 결정적으로 대학원 제출용 추천서 부탁을 위해 만났던, 전 직장 동료의 한마디가 벼랑 끝에 간당 간당 매달려 있던 내 자존감과 자신감을 구만리 나락으로 여지없이 떨어뜨렸다


"KS (내 영어이름) 미친 거 아냐? 그 나이에 무슨 대학원이야? 그것도 퇴직금으로"


그렇게 번민을 거듭하던 어느 날 아침, 식탁 위에 작은 쪽지 메모와 편지 봉투 하나를 발견했다.


"여보! 당신이 읽었던 '있는 자리 흩트리기' 나도 읽었어요
당신의 젊었을 적의 당신과의 대화를 결혼 내내 지켜봤습니다
불쌍한 젊은 영혼... 더 이상 후회하지 말고,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세요
스무 살의 당신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식탁 위의 편지 봉투에는 천만 원이 들어 있었다.

7월 초, 아내가 보석 가게를 개업한 이래 넉 달 동안의 수입금 전부였다.




11월 26일


나와 아내는 생일이 같다.

나의 51세 생일, 만으로 50세의 생일.

영국에서는 환갑보다 더 챙기는 만 50세의 생일.

그날 아내와 방학에 맞춰 한국에 온 아들이 푼돈 모아 내 생일 선물을 샀고 50세 모양의 촛불을 켰다.

그리고, 내 인생의 가장 무모한 도전을 축하해 줬다.


내가 아들이 있는 영국으로 학업을 위해 떠나면, 아내는 혼자 한국에 남아 열심히 보석가게를 꾸리기로 했다.

기러기 아빠가 아니라 기러기 엄마가 되는 것이다.

아내는 살림 씀씀이를 줄이기 위해 친정집에 들어가기로 했다.


이로서, 나의 퇴직을 맞아 온 가족이 '비상 모드'로 변했다.


2018년 1월 1일


곧 있을 대학원 개강에 맞춰 나의 출국을 배웅하기 위해 아내와 아들이 인천공항으로 길을 나섰다

영종도 갯벌 위로 새해의 붉은 태양이 떠 오른다.

공항 근처 어딘가에 잠시 멈춰 세 식구가 부둥켜안고 일출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서로 부둥켜안은 팔에 유난히 힘이 느껴진다

무심한 체하지만, 가장의 계획하지도, 예측하지도 않았던 급 정거와 급 회전에 가족 모두 울렁증을 느끼고 있는 것이리라.


우리들의 긴장과 걱정은 아랑곳없이 2018년을 밝히는 햇살은 세상을 점점 희망으로 환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희망이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