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와 치유
며칠 후 나의 성향, 성격, 리더십에서의 시사점을 담은 외부 전문 기관의 평가서를 받았다. 사실 본 과정이 전략과 리더십이 중점이다 보니 이 과정에 지원하는 사람들이 자신이 어떠한 성향의 사람이며 어떤 형태의 리더십을 가진 사람인지를 아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본 과정 합격 후 학교에서 보낸 노트 한 권 분량의 설문지에 답을 해서 보냈는데 답하는데 거의 1시간이 소요됐다.
오늘 첫 수업에서 설문지를 바탕으로 분석한 내 성향과 리더십 스타일이 공개됐다. 그것도 스터디 그룹 멤버들과 비교해서.
자신의 사진이나 음성을 접할 때처럼, 외부에 비친 나를 마주하는 것은 언제나 불편하다.
내가 알고 있는 나 자신을 표현하는 몇 가지의 단순하지만 강렬한 단어들을 보는 순간 마치 나쁜 짓을 하다가, 누군가에게 들킨 것처럼 당황스럽고, 혼란스럽고, 종국에는 그 사실 자체를 부인하고 싶은 심정이다.
리포트의 핵심은 내 스터디 그룹 4 멤버들의 성격 및 성향 지표 35 개 항목을 비교한 것인데, 물론 동양인과 서양인의 질문에 대한 답변 태도의 차이 (동양인들은 1에서 5단계 중 대체적으로 중간 점수 주는 경향)을 감안하더라도 내 성격 지표의 많은 항목들이 그룹 멤버들과 비교해서 전반적으로 하단에 분포되어 있어서 내 그래프 모양이 특이했다.
35단계 항목을 긍정적 성향과 부정적 성향을 구분해서 찬찬히 뜯어보니, 나의 성향은 내 그룹 친구들과 뚜렷이 대비되는 그야말로 부정적인 것들로 가득 차있다.
화합 (Agreeableness) 최하단
따뜻함 (Warmth) 최하단
긍정적 감정 (Positive emotions) 최하단
지적호기심 (Intellectual curiosity) 최하단
타인에 대한 신뢰 (Trust in others) 최하단
겸손 (Modesity) 최하단
좌절 (Frustration) 최상단
자기주장 (Assertiveness) 최상단
리포트는 내 성향을 네 단어로 결론 냈다.
Self-centric, Aggressive, Headstrong, Arrogant
자기중심적이고, 공격적이며, 반항하고, 오만하다
20 페이지 분량의 평가서의 많은 항목과 설명 중 네 단어를 이렇게 모아보니, 영화에 나오는 악역의 완벽한 캐릭터다. 부끄럽고, 당혹스럽지만, 리포트가 표현하는 나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타고난 자존감은 매우 높았으나, 실력은 걸맞게 높지 않았고, 기대고 의지할 배경도 없었다. 대리급 신입 사원으로 출발한 늦깎이 사회생활.
시골의 작은 우물에서 살던 개구리가 처음으로 큰 연못에서 놀고 있는 젊고 힘센 개구리를 만났다. 젊고 힘센 개구리들은 혼자 있는 게 아니었다. 더 힘센 개구리 무리들이 서로 어깨동무하며 그들을 촘촘히 보호하고 있었다.
큰 연못에 홀로 떨어진 작고 촌스러운 개구리
촌 개구리는 저 훌륭한 개구리들 무리에 낄 수 없었다. 외로웠고, 좌절했다. 열등감을 들키지 않으려고 오만했다. 그리고 고개를 쳐들고 반항했다. 촌 개구리는 다른 개구리를 믿지 않았다. 다른 개구리를 믿기에 세상이 만만찮다는 걸 올챙이 때 이미 알았버렸다. 연못에서 살아남으려고 홀로 쓸리고 부딪히면서 주변 작은 개구리에게 상처를 줬다. 자기도 다쳤다.
아이가 기숙학교에서 3 주를 보내고 주말을 보내기 위해, 오늘 처음으로 내가 혼자 살고 있는 곳에 왔다. 방 하나 거실 하나인 좁은 아파트의 문을 열고 아이가 들어온다. 아이도 나도 처음 맞는 둘 만의 공간이 낯설고 어색했다.
‘점심은 먹었어?
응, 학교에서 출발하면서 샌드위치 먹었어
오늘 저녁 뭐 해 먹을까?
아무거나...
삼겹살 구워 먹을까?
응 좋아 ~‘
음식을 아직 제대로 해 본 것이 없기 때문에 학교에서 버스로 15분가량 거리에 있는 한인마트에서 산, 귀한 삼겹살 한 덩이를 프라이팬에서 그냥 굽는다. 계란찜도 하고 한국에서 가져온 밑반찬을 덜어 내고 아이와 나의 아무렇게나 생긴 와인 잔에 와인을 채워 놓고 보니 그럭저럭 먹을 만한 저녁상이 준비되었다.
잔을 들고 Boy 들끼리 올 한 해 잘 지내보자며 건배한다. 고등학생이 의외로 와인을 제법 홀짝 거린다. 내가 구운 삼겹살을 맛나게 먹는 아이를 본다.
'아들의 밥 먹는 모습을 제대로 보는 것은 처음이구나
이 녀석도 자기 보다 머리 하나만큼 더 큰 덩치의 영국 친구들과 부딪히며 낯선 세계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많이 힘들었겠다'
시골 연못의 더 작은 개구리
다음 날 오랜만에 화창한 겨울 날씨. 영국 도착 후 처음으로 아이와 같이 미사를 보러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아이와 나란히 창가 쪽 자리에 앉았는데 차창 밖으로 화사한 겨울 햇살이 동네 공원의 나뭇잎들 위에서 부서진다. 불현듯 며칠 전 수업에서 하셨던 교수님 말씀이 떠 올랐다.
Mid-career와 Mid-life에 있는 여러분들!
20년 전에 배웠던 지식은 다 낡아 무뎌졌고,
20년 대의 불 같은 열정과 패기는 식었으며,
20대 꾸었던 꿈이 이제 더 이상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 걸 인정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믿고 싶은 사람들!
여러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변화"
그것도, 현재 타이어에 공기 넣고 왁스 칠하는 정도의 "Refresh"가 아닌,
닳아버린 헌 타이어를 새로운 타이어로 갈아야 하는 "Retread"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아 ~ 그래서 나를 여기로 부르신 거구나!
한국 돌아가기 전에 드린 수많은 기도에도 그분이 보시기에 나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거였구나!
아이가 겪었을 외로움, 수고, 인내, 방황에 대해서 한 번도 생각을 해 본 일이 없다는 걸 그분이 아셨던 거구나!'
어떻게 변할 것인가, 얼마나 변할 것인가
아이가 아빠 집으로 오는 것이 즐거운 일이 되는 것
그렇게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