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인턴

그 문화다방에서

by 불지않는 면빨

오늘 방송아카데미 글동무들을 만나는 날이다. 회사 송년회 때문에 11월 말의 글쓰기 마지막 수업에 참석하지 못했던 터라 글동무들을 한 달 만에 보는 것이고, 그것도 처음으로 교실 안이 아닌 바깥에서 만나는 거라 색다른 느낌이었다.


일요일 오후 4시. 루틴 하지 않은 일에 몸을 일으키기 싫은 나른한 일요일 오후 시간. 일상 밖의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은 큰 이벤트다.


몸과 마음이 바빴다. 10시 주일 미사보고, 젊은 글동무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흰머리와 눈썹을 미용실 들러 까만 색칠하고, 다음 주면 거의 일 년 만에 집에 올 영국 사는 아들 맞이 집안 대청소를 글동무 약속 시간 전에 해치워야 했다.


오늘의 드레스코드는 연말 분위기를 감안해 그린 or 레드다. 나의 글과 회사 밖 사람들 만남에 관심이 많은 아내가 미리 그린 스웨터와 레드 머플러를 챙겨 놨다.


오늘 약속 장소 상수동거리.

내가 다녔던 학교, 살았던 동네, 다녔던 직장 아니면 하다 못해 젊은이들이 많이 가는 힙한 장소, 어느 하나의 꼭지에도 걸리지 않는 속칭 나의 나와바리에 한 번도 있어 본 적이 없던 곳이다.


햇빛은 쨍했지만 쌀쌀한 기온에 걷기 싫어 차를 가져가려고 하는 나를 아내는 적극적으로 말렸다. 그곳에 아무도 차를 가져오지 않을 거라며...


언제부터인지, 아내 말을 잘 듣는 나는 나이가 들어 현명해지고 있는 것인지, 아님, 요샛말로 '에겐남'으로 내 호르몬이 에스트로겐으로 변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오늘도 아내말을 듣고 지하철을 탔다.


처음 가 보는 상수동 골목 거리. 서울 중심부에 이런 거리가 있었던가 싶을 만큼 시간이 80년대쯤에서 멈취버린 것 같은 거리 풍경이다. 어릴 적에나 봤던 페인트 칠한 영화 간판 같은 것을 걸어 놓은 식당이나, 추운 날 바바리코트 옷 깃을 여미며 걷다가 따뜻한 정종 한잔이 고파 혼자 불쑥 들어가도 좋을 것 같은, 잔으로 파는 사케집, 빨갛게 달아 오른 연탄 불판에서 타다닥 소리를 내며 터진 입 사이로 보글보글 단물을 내는 조개구이집. 거리가 세련되진 않지만, 투박하지도 않은 약간 일본풍 아니면 목포의 적색가옥 거리 같은 느낌이다.


오늘의 모임 분위기와 어째 잘 어울리는 가게 이름 '그 문화다방'을 찾으며 걸었다. 휴대폰 지도에서 내 위치를 나타내는 점이 약속 장소와 겹친다고 느끼는 순간, 저 멀리 거리 끝에 당인리 발전소가 마치 어릴 적 외할머니의 긴 곰방대에서 담배 연기가 뻐끔 뻐끔 나오는 것처럼 굴뚝에서 하얀 연기를 뿜으며 내 시야 정면에 갑자기 나타났다. 당인리 발전소를 이렇게 정면으로 보긴 처음이다.


희멀건한 회색 기둥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발전소를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발전소는 굵은 회색 줄무늬 트렁크 같이 생겼다.


빠른 속도로 옆으로 누워 버리는 겨울 오후의 태양 광선이 발전소 기둥들 사이의 유리창에 반사되어 시간이 멈춘 거리에 긴 그림자를 남긴다. 겨울 햇살이 남긴 부드럽고 아련한 그림자는 요즘 읽고 있는 '여름 오래 그곳에 남아'에 나오는 아오쿠리 산골 마을이나, 내 어릴 적 부산의 어느 동네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 문화다방을 들어 서니, 글동무들이 이미 와 있다. 우리 밖에는 없을 것 같았던 일요일 오후 4시, 여러 테이블에 사람들이 있다. 가게 이름처럼 레트로 감성이 있는 와인바 느낌이 있는 식당이다. 마음씨 좋은 넉넉한 털보 아저씨 같은 주인장이 반갑게 맞아준다.


글동무들은 모두 수줍은 듯 튀지 않고 얌전한 레드나 그린 색깔이 묻어난 복장이다. 한 달 만에 그것도 처음으로 교실이 아닌 식당에서 모인 글동무들이 생각보다 어색하지 않다.


옷을 걸고, 자리에 앉으니 재기 발랄하고 낮은 톤의 윤기 있는 성우 목소리를 가진 글쓰기 반의 유일한 남자 글동무가 갑자기 본인 명함을 내민다. 잠깐 머뭇거림 끝에 내 명함도 교환한다. 그러자 다른 글동무들도 자연스럽게 사회인으로서 각자하고 있는 일을 드러낸다. 동무들이 나를 이름이 아닌 직위로 부르면 내가 그들과 확연히 다른 세대에 있다는 걸 스스로 찔려한다.


두 달 동안 몹시 궁금했던 우리 반 글동무들의 나이 직업등 신상에 대한 의문이 해결되는 시원함을 느끼면서 동시에 미지의 그래서 조금은 신비로웠던 글동무들이 현실세계의 사회인으로 변신해 버린 것 같은 아쉬움도 드는 것 왜일까? 얼굴, 이름, 목소리, 글소리 외엔 아무것도 몰랐던 글동무들. 글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났으니, 말이 아닌 글로서 동무들의 생각, 고민, 배경 등을 어렴풋이 알아 가는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다양한 주제를 넘나들며, 한참을 떠들다가, 글모임 성격에 맞게 각자 읽은 책이나 영화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아들 또래쯤으로 생각했는데 의외로 훨씬 선배 격의 동안(童顔)의 한 글동무가 본인의 아빠 이야기를 꺼냈다. 성공한 직장인의 생활을 마감하고 은퇴하셨는데, 은퇴 후 집에만 계시면서 아빠의 총명하면서 맑은 안광이 점점 사라지는 것을 딸로서 옆에서 지켜보면서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요즘 지인의 회사를 도우며 활력을 찾으셨고, 아빠의 번뜩이는 안광이 다시 돌아오면서 기뻤다는 이야기였다.


아빠의 안광


평소에 잘 쓰지 않는 안광이란 단어가 내 가슴에 그대로 꽂혔다.


지금 회사를 다니기 전, 두 달을 집에서 놀았다. 그때 하루의 시간이 참 길었다. 진짜 은퇴 후 이렇게 집에서 무료하게 보내면 어떡하지 하는 조바심을 그때 제대로 느꼈다. 글동무가 이야기한 '아빠의 안광이 사라지다'가 그때 무력해지고 있었던 나의 시간을 직선으로 일깨웠다. 두 달을 빈둥거리며 놀 때, 글을 써 봐야겠다고 생각했고, 회사 사람, 지인이 아닌, 나의 일상 밖의 사람들과 교류하는 지점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동안 (童顔)의 글동무 이야기가 이어졌다.


'아빠의 안광'을 걱정할 때 봤던 영화가 로버트 드니로와 앤서니 해서웨이 주인공의 '인턴'이었다. 로버트 드니로는 글동무의 아빠처럼 성공한 직장인이었는데 은퇴 후 무료하게 지내면서 자존감을 잃어 가던 중, 스타트업의 젊은 여성 사장의 시니어 인턴으로 채용되면서 삶의 보람을 찾아간다는 이야기였다.


아직까지 직장 생활을 버텨내고 있긴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은퇴 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화두에 골몰하고 있는 나. 글동무가 소개한 '시니어 인턴' 타이틀 자체가 내 관심을 단박에 잡아버렸다. 글동무 모임 후 영화 인턴을 바로 봤다.


과연 로버트 드니로는 늙어서도 멋지다. 영화배우 안성기 씨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웃을 때 드라마틱하게 변하는 그의 얼굴 주름은 보는 사람을 무장해제시킨다. 약간 난처하고 겸연쩍을 때 짓는 웃음은 또 얼마나 묘한 매력인가?


전 회사에서 고위임원이었음에도 지금은 인턴으로서 젊은 CEO의 옷을 세탁소에 갔다 주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 겸손함과 현실인식. 주위 까마득한 후배들에게 아는 체하지 않으며, 남몰래 도움을 주는 장면들은 예전 같으면 그냥 시시한 것으로 넘겼을 텐데, 지금 로버트 드니로에 자꾸 나를 대입시키고 있다. 똑같이 아빠를 대입시키며 이 영화를 봤을 글동무의 마음도 느껴졌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로버트 드니로 같은 사람이 되는 것. 아니 되는 준비를 시작하는 것.


나와 한 세대에 걸쳐 있는 젊고 재능 많은 글동무들과 잘 교류하는 것 역시 로버트 드니로 같은 은퇴 삶을 사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