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니 보러 가는 길 #5

60년 지기의 두 달만의 상봉

by 불지않는 면빨

2025년 12월 31일. 한 해를 마감하는 날.

부산에 계시는 부친이 가족들과 새해를 보낼 겸, 요양원에 간 지 이제 두 달이 된 엄니를 드디어 만나기 위해서 서울로 오셨다.


‘드디어'라는 부사는, 매일 같이 펜팔 내지 SNS로만 오랫동안 대화를 나눈 결혼하지 않은 젊은 남녀가 날 잡아서 오프라인으로 얼굴 보기로 한 날에 붙이기에 적합한 것인데, 나의 부친과 엄니의 오프라인 만남에 붙여도 하등에 어색함이 없을 만큼 두 양반 역시 두 달 내내 하루에 서 너 덧통의 전화를 주고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비행기표를 끊어 드렸고, 부친을 도와주시는 요양사께서 고맙게도 직접 부산 공항까지 모셔다 드렸지만, 내일이면 87세가 되는 나의 부친 역시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럽고, 정신이 맑지 않아서, 김포공항에서 부친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내내 마음을 놓지 못했다.


부친의 비행기 도착 알림이 전광판에 떴고, 많은 승객들이 출구를 빠져나왔는데 부친이 보이지 않아서 더 초조해 짐을 느끼고 있을 때, 한산해진 출구로 한 사람이 느릿느릿 걸어 나온다.

중절모를 쓰고, 긴 코트를 입은 아버지.


'내 아버지가 저렇게 작고 동글했나'


세월은 모든 생물들을 동글동글하게 만든다. 어깨를 오므라뜨리고, 허리를 구부러뜨리며, 배를 볼록하게 만들어 모든 것들의 길이를 줄이고 동글하게 만들어 버렸다.


아버지가 공항에 마중 나온 영국 손자를 반갑게 껴안았다.




김포공항에서 머지않은 엄니의 요양원에 도착했다. 아버지를 발견한 원장님은 마치 오래전부터 아버지를 알았던 사람처럼, 아버지의 팔과 손을 쓰다듬으며 반갑게 맞아 주신다. 드디어 2층 생활동에서 엄니의 휠체어가 1층 접견실로 들어선다. 아버지를 발견한 엄니는 하얀 틀니 치아를 드러내며 온몸으로 반가움을 드러낸다.


"손 한번 잡아 봅시더"

"얼굴이 생각보다 나빠 보이지 않네.."

"난, 잘 지내요.. 당신은 나 없이 잘 지내는교? "

"그냥 있는 거지.. 마누라 여기 보내 놓고 내가 어떻게 잘 지내겠나"

"그래도 당신 몸 스스로 잘 건사하이소..당신은 여기 오기 아직 멀었으니.."


그제야 엄니는 나와 손주를 보며 제대로 말을 걸었다.


"여기 간호사님과 요양보호사님들이 나를 보며 자꾸 놀려.. 아버지 오늘 오니까 어젯밤부터 마음이 설레냐, 잠은 잘 오냐 하면서 자꾸 놀려"

"하루에도 몇 통씩 전화를 하니까 그렇죠.. 그 연세 노인분들이 누가 그래요"


마침 2층 요양 보호사님이 1층에 내려와서 우리를 발견하곤, 엄니를 껴안으며, 할아버지가 그렇게 좋냐며 또 장난을 친다. 엄니는 또 겸연쩍어하신다.


그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엄니가 요양원 사람들과 잘 지내는 것 같아서 한편으로 맘이 놓였다. 엄니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아버지를 보면서 이번에는 부산 집에서 말 붙일 사람 하나 없이 홀로 TV 만 보고 있을 것 같은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졌다.




다음날 1월 1일..

언젠가부터 우리 집 설날은 영국에 사는 아들이 오는 연말을 겸하여 양력 1월 1일에 지내게 되었다. 엄니가 서울에 있으니, 아버지가 서울로 오게 되었고, 이로서 내 집에서 동생네 가족까지 모두 모이는 완벽한 설날이 되었다. 둘째 동생이 엄니를 요양원에서 집으로 공수하는 일을 맡았다.


엄니가 서울에 있으니, 평소 만나기 힘들었던 서울 사는 둘째 고모와 장남 부부마저 우리 집으로 인사 오겠단다.

이 모든 게, 엄니의 서울 이동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엄니가 우리 집에 도착하자마자, 화장실부터 찾는다. 부산 어른집 화장실엔 전혀 문제없었던 휠체어가 장님 집 화장실에 들어가기 애를 먹었다. 아버지와 엄니가 화장실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엄니가 화장실을 나오면서 말한다.


"만나자마자, 너 아버지 또 고생시키네.."


곧이어, 허리 수술을 받고 걸음걸이가 불편해진 엄니 보다 한 살 적은 고모가 아들의 부축을 받으며 현관문을 들어섰다. 엄니와 고모 두 여성들이 서로의 모습을 보며 눈물과 함께 서로를 쓰다듬었다.


실로 오랜만에 다 같이 모여서, 아들, 손주의 세배를 받고 떡국도 나눠 먹었다. 요양원 저녁때를 맞춰 엄니가 다시 돌아가야 할 시간. 엄니는 다시 아버지의 손을 잡으며, 아버지를 걱정한다.


도대체 내 엄니는 어떤 사람인가?

본인의 모습과 처지를 가지고 남편을 원망하려면 한 없이 할 수 있을 텐데. 그런 남편을 원망은커녕 저렇게 환하게 웃으며 대하고, 저렇게 노심초사 걱정하고 있으니 말이다.


60년의 부부 관계는 비록 내 부모 일지라도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