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밭과 자전거
휴대폰 사진을 뒤지다 사진 하나가 눈길을 잡았다.
포도밭 사진
25년 봄, 새로 옮긴 직장으로 출근하기 전 가족들과 여행했던 이태리 토스카나 지역의 어느 포도밭 사진이었다.
아내와 아들은 자전거를 타고 포도밭을 지나고 있고, 내 휴대폰 카메라는 그들의 등을 쫓고 있었다.
불현듯 아주 오래된 비슷한 장면이 떠 올랐다.
"어~어~ 아들 천천히 가. 위험해.."
"알았어.."
"어 ~~ 어~~ 앗!!!"
'우당탕탕... 퍽'
나는 바닥으로 곧두박질 쳤고, 눈에 번쩍 별이 빛났다는 걸 찰나로 느끼면서 바닥에 대자로 누웠다. 어디가 부러졌는지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여 본다. 부러지진 않은 것 같았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켰는데, 주르륵... 피가 흘러내린다. 다시 누었다. '이걸 어떡하지'
아주 오래전 나의 영국 주재원 시절.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아들과 아내와 프랑스 부르고뉴 와이너리 여행을 갔다. 당시 와인 애호가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넘어 마치 와인 입문 바이블과도 같았던 일본 작가의 신의 물방울 만화책을 탐독하던 시절이었다. 남자 여자 두 주인공들이 자전거를 타고 부르고뉴 지방의 유명 와이너리를 탐방하는 장면이 무척 로맨틱했다.
우리도 자전거를 빌려서 다니면서 나 같은 일반인은 범접하기 힘든 로마네꽁띠, 알렉스 꼬르통 같은 이름만 들어 봤던 유명 와이너리를 만화책의 그림과 풍경을 대조하면서 확인하는 재미가 있었다. 만화책처럼, 비탈진 언덕을 가득 채운 포도나무 이파리들이 농염한 햇살을 반사하며 언덕을 온통 황금색으로 물들인다 하여 붙여진 황금언덕의 계절, 가을은 아니었지만 들판을 가득 채운 싱그러운 5월의 눈부신 초록빛 역시 장관이었다.
세 식구가 자전거를 타면서 내 휴대폰 사진기가 향한 곳은 정작 포도밭이 아닌 초등학교 6학년 아들이 자전거를 타고 가는 모습이었다. 아이가 맨 앞에서 가고 내가 다음, 아내가 맨 뒤에서 줄지어 가고 있었다. 아내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른손 앤 휴대폰, 왼손에 핸들과 브레이크를 동시에 잡으면서 연신 아들이 자전거 타고 있는 뒷모습을 찍고 있었다.. 아이가 지나가는 곳이 정갈히 줄지어 서 있는 싱그러운 초록 포도밭, 파란 하늘, 하얀 구름. 색감, 구도가 완벽히 조화되는 장면을 기디라면서 연신 카메라 셧터를 눌러 댔다.
마침 포도밭을 벗어나 시멘트 포장의 시골 농로를 접어드는 순간
아들 자전거 앞으로 조그만 트럭이 다가왔다. 트럭을 뒤늦게 발견하고 아들에게 차 조심하라며 나 역시 본등적으로 왼쪽 브레이크를 꽉 잡았다. 왼쪽 브레이크는 앞바퀴용이었다. 갑자기 멈춘 앞바퀴에 자전거가 달리는 관성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앞으로 쏠리면서 내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여보~~~~~옷!!"
"이걸 어째... 이걸 어째.... 큰일 났네.. 피가 많이나... 그러게 자전거 타면서 사진을 찍지 말라고 했지!"
아내가 고꾸라져 바닥에 대자로 누워 있는 나에게 달려오면서도 잔소리를 한다.
아내가 자기가 메고 있던 스카프로 피가 흐르고 있는 내 이마를 막으면서 어떡하지 어떡하지 연발이었다. 아이는 그제야 사태를 파악하고 우리 있는 곳으로 돌아오면서 무슨 말을 할지 모르는 눈치다.
차도 없고, 응급차를 어떻게 부를지 몰라 난감하던 차, 마침 우리 앞으로 시골 농부가 모는 트럭 비슷한 것이 다가오고 있었다. 몸을 힘겹게 일으켜 농부에게 내 모습을 보여 주며
'Emergency!! Hospital please!!"
라며 간청했다. 농부는 흔쾌히 차를 타라고 했다
그 와중에도 자전거를 반납해야 해서 아내와 아들이 자전거 세대를 끌면서 뒤 따라오고 나만 농부의 차에 탔다.
태어 나서 처음 온 한적하고 밋밋한 프랑스 시골 병원. 의사가 내 머리를 이리저리 살피고 내 얼굴을 보더니, 이마가 약간 찢어진 거라며 꿰매 주셨다. 내 문자를 받고 병원을 찾아온 아내를 보며 큰 문제는 없다고 하니, 아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 쉰다. 동시에 딱히 보험도 없는데 치료비를 걱정하며 간호사에게 치료비를 묻자, 그냥 가라고 한다.
그 유명한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프랑스 복지정책의 혜택을 본 것이다.
그렇게 프랑스 포도밭 자전거 여행은 내 마빡의 상처로 끝났다.
그러나, 가족이 자전거로 포도밭을 돌아다녔던 시간은 마치 어릴 때 불렀던 동요 '동구밖 과수원길, 아카시아 나무 꽃이 활짝 폈네 햐얀꽃 이파리 눈꽃처럼 날리네'처럼 아스라하고 몽글몽글한 추억으로 가족의 뇌리에 진하게 남았다.
포도밭의 추억은 12년의 세월도 견뎌, 이번에는 세 식구를 이태리 토스카 지방 포도밭으로 불러들였다. 12년의 세월은 아들을 초등학생에서 건실한 직장인으로 변신시켰다.
당연히 자전거를 빌렸다. 12년 전 보다 한층 세밀해진 휴대폰 지도를 보고, 잘 닦여진 아스팔트 도로 보다 포도 농장 안으로 들어가 울퉁불퉁 산길도 있는 길을 택했다. 길 모양에 맞게 이번에는 바퀴가 다소 굵은 산악용 (?) 자전거를 빌렸다.
아직은 덥지 않은 5월의 토스카 이름 모를 마을의 아침 햇살은 밝고 따스했다. 오늘의 여정은 숙소 근처 포도밭에서 10 km 정도 거리의 니포짜노 와이너리까지다.
온몸에 헬멧, 팔꿈치, 무릎 보호대와 장갑으로 무장하고 숙소를 출발. 이번에는 내가 앞장서고, 아내가 뒤따르고, 아들이 맨 마지막으로 따라온다.. 12년 전과 달라진 점은 자전거 타면서 휴대폰에 손을 대지 않는 것과 아들이 이젠 우리 부부를 에스코트하는 것이다
숙소를 벗어나자 바로 이어지는 아스팔트 도로. 마침 일요일 아침이라 시골 동네 차도엔 차가 없다. 세 식구가 줄지어 도로 한편에 붙어 내리막을 내려온다. 시원한 바람에 내 마음 한켠이 자유로워진다. 오른쪽으로 꺾으니 좁은 오솔길로 이어진다. 울퉁불통 돌부리들을 피해서 천천히 지나가니 제법 급한 경사가 나타난다. 내려서 걸아갈까 잠시 망설였지만 자전거의 두툼한 바퀴를 믿고 천천히 내려간다. 애교 많고 부드러운 아내는 의외로 이런 종류의 모험을 마다 하지 않는다. 뒤따라 오던 아내 역시 자전거를 타고 내려오더니 안 되겠는지 내려서 자전거를 끌고 내려온다. 그 뒤엔 아들이 엄마가 지나가길 기다리고 있다.
내리막이 끝났으니 이젠 오르막이다. 세 사람 모두 자전거를 끌고 낑낑거리며 걸어서 오르막을 올랐다. 동굴을 통과하면 전혀 딴 세상이 갑자기 펼쳐지는 SF 영화의 한 장면처럼 오솔길 끝에는 도로에선 보이지 않았던 광활한 포도밭이 장엄하게 펼쳐진다. 프랑스 포도밭과는 달리 이태리의 포도밭은 산에 있다. 산 전체가 포도밭이다. 왜 이탈리아가 프랑스를 넘어 세계 최대 와인 생산 국가인지 실감이 난다.
언덕의 경사진 비탈에 줄지어 정결하게 서 있는 작은 키의 포도나무들이 뿜어내는 시원하고 청량한 색감과 공기가 이마에 송글하게 맺힌 땀을 식혀 준다. 자전거를 멈추고 연신 휴대폰 사진을 누른다. 잠시 후 이번에는 아들과 아내를 먼저 출발시킨다.
포도밭 한가운데 나있는 오솔길이 완만한 산능선 위에 걸려 있는 커다란 뭉게구름 속으로 이어져 길 위의 아내와 아들마저 구름 속으로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안타까움과 조바심이 일어난다. 연신 휴대폰으로 그들을 쫒는다.
니포짜노 와이너리에 도착했다. 유명한 와이너리인 만큼 그곳 식당에서 근사한 점심을 기대했지만, 마침 일요일이라서 식당을 열지 않는다고 한다. 약간의 실망을 뒤로 한채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포도밭 한가운데 식당이 있다. 허기진 배를 잡고 자전거 열쇠를 채우고 식당을 들어선다.. 이 동네 일요일에 여는 유일한 식당인지 현지인들로 북적였다.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식당 밖을 나왔다. 이 마을이 마치 대관령의 마을처럼 워낙 고지대에 있어서 인지 주위 사방으로 포도밭이 내려다 보인다. 우리는 포도밭 산 정상에 있다. 자전거 운전 때문에 와인을 마시지 않았지만 포도밭 향기에 취해 느긋한 점심을 먹고 숙소로 돌아오니 해가 기웃기웃 저문다.
숙소 역시 고지대에 있어 숙소 아래로 펼쳐진 포도밭은 땅꺼미로 더 이상 보이지 않고, 그 대신 산능선을 따라 마치 산불이라도 난 것처럼 온통 붉은 띠가 하늘과 산의 경계를 구분한다.
이름 모를 이 동네는 영화 '토스카나'에 나오는 동네였다. 덴마크 일급 요리사인 남자 주인공은 아버지를 미워했고, 아버지가 자기에게 남긴 이 마을 포도밭이 쓸모없는 거라며 처분하기 위해 이 마을에 왔다. 그러나 포도밭과 아버지가 남긴 레스토랑에 진심인 마을 숙녀와 사랑에 빠지고 남자 주인공이 고뇌하면서 와인을 병째로 마시며 여자 주인공에게 자기 진심을 고백하는 곳이 내가 보고 있는 지금 풍경과 비슷하다.
영화 토스카나 풍경에 빠져 택한 영화의 장소는 거짓말같이 영화보다 더 아름다웠다.
이번에는 자빠지지 않고 무사히 귀가한 기념으로 이 동네 와인을 따서 세 식구의 잔을 채웠다.
와인, 가족, 사랑, 평화, 안식, 모험, 자유, 해방, 우정
포도밭의 추억은 포도주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농염하고 진한 향기를 피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