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를 읽고
모처럼 책 한 권을 완독 했다. 많은 책들이 읽다가 어느 지점에서 멈춰져 있는 반면.
마쓰이에 마사시 작가의 소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무라이 슌스케 건축 사무소는 매년 도쿄 여름 무더위를 피해서 일에 집중하기 위해 사무실을 통째로 여름 별장으로 옮기는데, 소설은 가루이자와의 산골 마을 아오쿠리에 있는 여름 별장에서의 이야기다.
소설 첫 페이지에서부터 묘사된 아사마산 표고 1000미터 높이에 위치한 아오쿠리 마을과 여름별장 주위 풍경에 마음을 뺏겼다.
여름 새벽, 슌스케 선생이 새벽 산책을 나선다. 여름 별장 현관 안쪽에 걸어둔 버팀목을 떼서 벽에 세우는 소리. 커다란 미닫이문을 왼쪽에 있는 두껍닫이에 집어넣은 뒤, 그 앞에 있는 문이 벽에 닿을 때까지 백팔십도 열어젖히고 놋쇠 문고리에 마로 된 고리질을 걸어둔다. 그렇게 하면 바람이 불어도 문이 닫히지 않는다. 표고 1000미터가 넘는 고요한 숲. 여름별장 가운뎃마당에 우뚝 서 있는 계수나무. 오색딱따구리 소리. 해뜨기 얼마 전부터 하늘은 신비한 푸른빛을 띠고. 이 모든 것을 품고 있는 몽블랑같이 덩치 큰 아사마산.
소설을 더 읽기 전에 구글 지도부터 찾았다. 이 마을이 진짜 있는지가 궁금했다.
도쿄에서 서북쪽으로 자동차로 2시간 반쯤 거리에 있는 곳. 군마현 아사마산. 해발 2500미터 높이의 중부의 후지산이라고 불리는 아사마산은 활화산이다. 근처에 유명 온천인 구사쓰 온천이 있다. 기타 가루이자와 역에서 차로 아사마산으로 계속 올라가면 소설 속의 아오쿠리 마을이 나올 것이다.
남한이 4개나 들어갈 수 있는 일본은 생각보다 크고, 몇 번 가보진 않았지만 일본의 자연은 상상보다 웅장해서 어떤 시골 마을은 큰 키의 빼곡한 나무들로 햇빛마저 제대로 들지 않아 마을이 검은 숲에 둘러 싸여 있다고 느낀 적이 있었다. 지도로 확인한 아사마산의 웅장한 분위기를 보면, 긴 터널을 지나면 하얗게 나타나는 소설 설국의 마을처럼, 아사마산을 굽이굽이 올라가다 보면 갑자기 나타날 아오쿠리 마을은 소설이 표현한 대로, 내가 상상하는 모양의 시골 마을일 것이다.
소설 속의 여름별장을 묘사하는 목조건물이 내는 삐걱거리는 소리, 현관 버팀목, 미닫이문과 놋쇠고리는 70년대 일본풍이 많이 남아 있었던 부산에서의 내 어릴 적 기억의 한켠에 남아 있는 추억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소설 속 주인공인 화자는 무라이 사무소의 신입사원이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첫여름. 무라이 선생을 따라 여름별장에 간다. 이번 여름별장에서 매우 특별한 프로젝트를 준비한다. 바로 국립현대도서관 설계 공모전이었다. 화려하고 기교적인 부분에 탁월한 라이벌 설계사 후나야마에 맞서, 건축은 인간의 삶과 정신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므로 사용자의 실제적 편익을 아주 세세히 고려해야 한다는 실용주의 철학을 가지고 있는 무라이 선생의 지도하에 사무소 직원들이 각자 맡은 분야 완성을 위해 여름 내내 별장에서 분투한다.
주인공은 여름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무라이 선생의 조카 마리코와 첫사랑에 빠진다. 사무소 선배인 유키코 역시 무심한 듯이 보이지만 화자에게 잘해준다.
소설은 여름별장에서 국립현대도서관 최종 설계도안이 만들어지고 도쿄로 돌아올 때까지 느리게 진행된다. 국립현대도서관 응모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늦가을, 무라이 선생과 화자 단 둘이 다시 여름별장으로 이동하여 응모에 출품할 현대도서관 모형을 완성한다. 도쿄로 돌아가는 길에서 70대 중반의 무라이 선생이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소설은 갑자기 급하게 흐른다.
30년이 지난 어느 여름, 시간과 중력의 법칙을 피할 수 없었던 낡은 여름별장에 한 중년남자와 그의 아내가 서 있다. 바로 30년 전 신입사원이었던 사카니시와 그 선배 유키코다. 뇌졸중 후 얼마지 않아 무라이 선생이 돌아가셨고, 선생의 오랜 파트너 후지사와 씨 역시 돌아가셨다. 곧 무라이 사무실은 해체되고, 주인공을 포함해서 사무실 구성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첫사랑 마리코와 이별하고, 무라이 선생의 평생 동지인 사무장 이구치 씨, 선배 우치노 씨 모두 30년의 세월을 피할 순 없었다.
주인공은 여름 별장 2층 무라이 선생의 사무실에서 30년 세월의 먼지를 켜켜이 덮어쓰고 있는 국립현대도서관의 모형을 다시 들여다본다. 주인공은 무라이 선생과 사무소 사람들의 일생의 역작인 국립현대도서관이 마침내 세상에 모습을 드러 내기 직전, 무라이 선생의 불의의 사고로 세상사람들의 부름을 받지 못했고 끝내 생명력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진한 아쉬음과 깊은 회한에 휩싸인다.
소설은 대단한 줄거리나 드라마틱한 소재를 담고 있진 않지만, 우리네 삶에서 이루고 완성해서 빛나는 것도 있지만, 많은 것들이 묻히고, 잊히고, 빛을 보지 못하는 미완의 역사 역시 우리네 삶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각인시킨다. 그래서 소설은 개운하지 않지만 공감되고 아프다.
30년의 시간의 흐름 속에 주인공의 스승이자 선배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듯이, 30년 뒤 사카니시 군이 인수한 여름별장 주인 역시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바뀔 것이다. 소설은 떠나보내는 것들에 대한 연민, 상실, 허무를 불러일으킨다. 현대 기술은 나의 이 찰나의 마음을 캐치해서 유튜브에 25년 작년 한 해 동안 세상과 이별한 연예인을 보여 준다. 무려 27명이었다. 영면한 스타들의 사진이 하나씩 지날 때마다, 의외, 놀라움, 안타까움을 느끼면서도 시간 앞에서 모든 것이 평등함 역시 느낀다.
이 소설의 매력은 작가의 탁월한 자연, 건축, 음식 등에 대한 묘사이다. 한 여름밤, 표고 1000 미터 높이의 아오쿠리 마을에 있는 반딧불 연못에서 여름별장까지의 2 km 산길을 신입사원 주인공과 유키코가 걸어가는 장면은 이 소설의 백미다. 한 여름밤 숲 속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려 마치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아스라이 반짝이는 반딧불의 색감, 부엉이 소리와 지바퀴 우는 소리, 구름 사이로 비치는 달빛이 만드는 어스름 속 자갈길, 마리코를 마음에 두고 있지만 화자와 유키코 두 사람사이의 아슬아슬하고 안타까운 감정선. 작가는 까만색의 문자들을 조합해서 이 모든 것을 마치 총천연색 영화로 보듯이 만들어 버리는 마술을 부린다.
감각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을 지향하는 작가라는 말이 직관적으로 다가왔다.
일본 유명 대학의 문학을 전공한 작가가 책 말미에서 밝힌 50세 넘어서야 소설을 쓰게 된 과정은 글을 쓴다는 것의 진지함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오랜 시간 모든 것을 걸고 최선을 다해 좋은 회사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지만, 끝내 소망하는 대로 되지 않았던 나의 전 직장의 상황. 그로 인해서 내 선배, 동료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안타까움이 새삼 가슴에 저며 왔다. 나 역시 그 길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다만 끝날 때까지 최선을 다 할 뿐이다.
나의 지인이 언젠가 충고했다.
'이제 욕심을 내려놓고, 가슴 떨리는 일을 찾아야 할 때'라고...
글을 쓰는 일이 가슴 떨리는 일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