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특별한 구정 연휴
우리 가족은 신정을 쉰다. 해외에서 살고 있는 아들이 연말 휴가 때나 한국에 올 수 있고, 할아버지 할머니께 세배를 드릴 수 있는 시간이 신정이라 자연스럽게 우리 가족의 설명절이 구정에서 신정으로 옮겨간 측면도 있지만, 2월 중 어느 날이 갑자기 새해라고 불리는 것이 어느덧 내 무의식에서 자연스럽지 않게 된 면 역시 신정을 쉬게 된 먼 이유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래서 매년 구정 연휴에 우리 부부는 한가하다. 모두가 움직이고 떠나는 구정에 굳이 우리 부부까지 도로나 공항의 복잡함을 보탤 이유가 없어서 근 몇 년을 연휴 동안 비슷한 형태로 걸어 다녔다.
어느 해엔 옛 조선시대 한양의 북문, 서문, 남문, 동문을 아우리는 한양순성길을 걸었고, 다른 해엔 인터넷 지도에 나오는 단풍나뭇잎 같이 생긴 서울의 모양을 따라 둘레길을 걸었다. 우리 부부는 스페인 산티아고 길을 걸었다는 자만심이 있어서 인지 걷는 것에 별다른 거부감이 없었다.
이번 구정 연휴 때는 어떤 길을 걸을까 고민하다가 게을음이 발동했다.
"여보! 진짜 안 갈 거야?"
"에이! 그냥 남산이나 가자"
"오케이.. 그럼 아무것도 준비할 게 없네.. 좋아.."
구정 당일. 모처럼 미세먼지 없이 하늘은 파란색을 그대로 드러내고, 햇살을 노랗게 환하다. 이런 날에 걷는 것은 엔도르핀을 마구 뿜어낸다.
걷기로 마음을 먹으면 웬만하면 차를 타지 않는다. 오늘도 집을 나서서 남산에 최근에 생긴 하늘 숲길까지 걸어서 가기로 했다. 동선은 동빙고동, 이태원, 해방촌, 남산 초입, 하늘숲길이다.
차를 타고 수백 번을 지났을 동네 모습은 항상 똑같았았다. 천천히 걸으면서 보기로 마음을 먹으면 변하지 않은 것은 거의 없었다. 한창 건축 중인 새 아파트는 어느새 키가 훌쩍 커 버렸고, 이태원동 좁은 골목 안에 처음 보는 가게, 식당들이 많이 생겼다.
경리단 방향으로 차도를 건너려고 하니, 내가 있는 쪽엔 지하철 입구가 없다는 걸 그제야 알게 되었다.
걸으면 보인다.
오늘은 경리단길 대신 해방촌을 통한 남산길을 택했다. 해방촌 초입에서 천천히 뭐가 바뀌었는지 확인한다. 초입부터 백남준 브라운관 작품처럼, 알록달록 분홍색 구형 TV들이 무리를 지어 진열되어 있다. 우리 부부의 모습이 브라운관에 비친다. 가방 가게다.
"이걸 요새 아이들은 갬성이라 부르겠지" 라며 연신 카메라를 누른다.
평범하기 이를 때 없는 길가 화장실 문짝을 노랗게 페인트칠하고 그 위에 어지럽게 낙서를 해 놓으니 마치 소호 감성이 난다.
구정 당일 오전 시간, 한적한 해방촌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은 갈 곳 잃은 우리 부부와 개를 산책시키는 외국인들 뿐이다. 어느 조그마한 카페테라스에 깜댕이라고 불릴 것 같은 까만 털 강아지를 앉고 커피를 맛있게 마시고 있는 솔로 외국 남성이 눈에 들어온다. TV에 나오는 한가로운 일요일 아침 뉴욕 어느 브런치 카페 느낌?
흐름 한 조그만 입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재즈 라이브 쇼. 설특집이란다. 지하 몇 평 안 되는 공간에 학생 수준의 인디들이 하는 공연일 게다. 우리 부부는 이런 저렴한 쇼를 보면서 감성이 있는 채 하는 걸 좋아한다. 공연 시각이 밤 9시다.
"그래! 오늘 걷고 집에서 좀 쉬다가 저녁에 라면 끓여 먹고 여기 오자!"
좀 더 걸어 가자, 예의 45도 경사의 마의 해방촌 깔딱 고개로 접어든다. 숨이 가빠지며 겨드랑이에 땀이 배인다. 고개 정상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남산 순환도로가 나오는데, 아내가 갑자기 가수 이정 씨의 옛 루프탑 카페가 있는 골목인 후암동으로 빠지잔다. 그 동네 끝에 있는 내 옛 선배의 빌라가 보고 싶다며.
후암동 골목으로 접어 드니, 이태원 클라쓰의 단밤 가게가 나온다. 그 루프탑에서 내 발아래 펼쳐진 서울 시내 모습은 바로 앞의 사람 사는 냄새를 물씬 풍기며 남산 언덕을 빼곡히 메운 가정집들과 저 멀리 병풍처럼 줄지어 있는 시내 마천루 빌딩과 부조화스러운 조화의 극치다 이는 아주 오래전 일본 롯폰기 힐즈의 모리타워 40층에서 내려다봤던 동경이 온통 숲으로 뒤덮여 있었던 충격과 묘하게 대비되는 것이었다.
후암 초등학교 근처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수직으로 남산 도로에 올랐다. 일 년 열두 달 수십 번을 퇴근하면서 차 안에서 봤을 남산도서관 표지판을 누군가 떼내서 내 눈앞에 들이민 것처럼 갑자기 눈에 확 들어온다.
그림이 그려졌다. 내가 타고난 성정에 비추어 한 가지 일을 매우 성실하게 하는 타입이라,
매일 같은 시각에 남산도서관으로 출근한다.
키피를 느긋하게 마시고, 쓰고 싶은 글을 글적인다.
혼자 점심을 먹거나 날씨 좋은 날이면 갬성을 쫓아 와인이나 맥주나 혹은 탁주를 기울일 것이다.
가끔은 친구들과 오래된 동네 맛집의 즐거움을 같이 즐길 것이다.
이른 저녁에 퇴근해서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만들어서 아내와 같이 먹을 것이다.
남산 도서관 옆에서 출발하는 하늘 숲길 데크에 들어서며 아내에게 말했다.
"은퇴하면 다른 건 모르겠지만, 주방이 조금 큰 데로 이사 가자"
"왜? 당연 나는 좋지... 우리 집 주방이 좁아서 내가 불평하고 있는 것 알잖아"
"맞아.. 나 같은 요리 초보가 음식을 만들기엔 지금 집 주방이 너무 좁아.. 그래서 주방은 좀 큰 데로 이사는 가야겠어."
하늘숲길은 데크로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고 지그재그로 남산 타워까지 이어지니 계단을 오르며 남산 정상까지 가기 힘든 분들에게 알맞게 생겨난 길이다. 걸음을 뗄 때마다, 서울 시내가 한 뼘 씩 낮아진다. 매월 정기적으로 만나는 친구 부부들과 꽃피는 봄이 오는 3월에 이 길을 같이 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니, 벌써 남산 정상이다. 당초 욕심은 남산 둘레길을 한 바퀴 완주하는 것이었지만 배가 고팠고 특히 막걸리가 고팠다.
비록 구정 명절 한가운데지만 뭔가 내가 찾는 먹을 것이 있을 것 같은 남대문 시장 쪽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어느 산이든 내리막길은 금방이다. 어느 듯 남대문 시장에 접어들었다. 집을 나와서부터 2시간째 내리 걸었던 터라, 첫 번째 눈에 들어온 깔끔한 분위기의 프랜차이즈 순댓국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냥 순댓국에 막걸리면 충분해서 주문하려고 하는데, 아내가 영 탐탁해하지 않았다.
아내는 눈빛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여보! 여긴 당신이 가고 싶어 하는 곳이 아니잖아'
'왜?'
'손님 없는 새로 생긴 가게. 프랜차이즈... 이곳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남대문 시장의 가게가 아냐'
주문하지 않고 가게를 그냥 나왔다.
주린 배와 타는 목말음을 참고 더 내려갔다. 남대문 시장 샛 골목은 식당들이 대부분 철시해서 어둡고 컴컴했다. 그냥 지나치려고 하는 찰나, 뭔가 움직임이 보였다. 컴컴한 골목을 들어선다. 그제야 사람들이 어느 갈치조림 집 앞에서 긴 줄을 서 있다. 어떻게 알고 왔는지 대부분 젊은이들이다.
희한하게도 선진국 문화에 길들여져 있는 젊은 친구들이 깔끔하지도, 전혀 위생적일 것 같지 않은 이 좁고 비루한 골목을 왜 찾아왔을까?
아내가 드디어 맛집을 찾았다며 식당의 좁은 간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 다락방에 앉았다.
아내가 나와 노는 fit 이 맞아서 참 다행이다.
시뻘건 갈치조림과 탁주 한 병을 시켰다. 새끼 갈치구이를 덤으로 주셨다. 탁주 한 사발을 그냥 벌컥벌컥 들이켰다. 10년 묵은 갈증이 해소되는 청량함을 느낀다. 새끼 갈치구이는 빼 채로 씹는다. 고소하고 맛있다.
예의, 반듯반듯하고 깔끔하며 딱 떨어지게 고급스러운 강남의 즐거움도 있겠지만,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나는 구 도심의 동네 마실이 주는 즐거움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배가 된다. 이것은 마약 같은 중독성이다.
순식간에 비워 버린 탁주 한통으로 불콰해져서 집으로 돌아와 샤워 후 누웠다.
예상했다시피, 9시 인디 재즈 쇼에 우리 부부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