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모른다
최근 일적으로 고위공무원을 만났다. 나와 동갑인 데다 고위공무원의 이미지와 달리 소탈하고, 유쾌하며,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능력이 대단하여 나 역시 그분과 단 한 번을 만났음에도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온 사이처럼 편안했다. 그분이 얼마 전 공직에서 은퇴하셨고, 조그마한 사무실을 운영하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 전 또 만났다.
자그마한 체구지만 나이에 맞지 않게 탄탄한 근육질 몸매에, 하얀 치아를 환하게 드러내며 목젖이 보일 만큼 유쾌하고 호방하게 웃는 특유의 밝음은 여전했다. 낯선 사람들의 경계와 서먹함을 순식간에 녹여버리는 그분의 웃음의 위력은 대단하다.
충청도 어느 시골에서 태어나 고시가 아닌 일반공무원으로 시작하여 고위공무원이 되었지만, 여전히 소위 서울의 핫플레이스가 아닌, 근교에 집이 있는 걸 봐서, 공무원으로서 원칙을 지키면서 살아왔을 것 같고,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탄탄한 몸매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파트 계단을 오르고, 매일 아침 푸시업 100개를 해내는 그의 성실함의 결과이며,, 호방하고 유쾌한 웃음이 나타내는 그의 친화력이 더하여 지극히 평범할 수 있었던 그를 고위공직자까지 올려놓았을 것이다.
몇 순배의 술이 돌고, 이것저것 개인사를 번갈아 가며 이야기하던 중, 그분이 본인의 결혼 스토리가 재밌다며 말을 꺼냈다. 과연 재미났고 신기하기까지 했다.
드라마나 소설에 나오는 좌충우돌 결혼이야기는 모든 청춘들이 꿈꾸는 로망이자 로맨스일 텐데, 나의 경우는 선을 봤고, 3개월 만에 결혼을 해 버려 영화 같은 로맨스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의 결혼이야기가 더 흥미로워졌는지도 모르겠다.
바야흐로 30여 년 전, 충청도 어느 마을
첫 공직을 시작한 시골청년은 우연히 마을에 하나뿐인 서점을 들렀는데, 서점 주인이 젊고 예뻤다. 무엇보다 본인의 키가 작았던 터라, 결혼 상대는 반드시 자기 보다 키가 더 큰 여성을 선호했던 시골청년에게 훤칠한 키의 서점 주인은 더할 나위 없는 이상형이었다.
데이트 경험이 전무한 시골 총각이 아무런 연결 고리도 없었던 예쁜 서점 주인에게 어떻게 자기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었으랴...벙어리 냉가슴 앓으며 서점을 자주 들러, 애꿎은 책들만 쓸데없이 사들였을 뿐이었다. 그렇게 몇 달의 시간을 보내고, 더 이상 않되갰다 싶어 마음을 단단히 먹고 서점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런데, 서점 주인은 보이지 않고, 낯선 다른 여성이 서점 카운터에 앉아 있었다.
시골청년은 순간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또 서점 책장 사이를 돌아다니다가,
"죄송하지만, 오늘 사장님은 오시지 않으셨나요?"
"예? 언니요?... 언니는 유치원에 조카 데리러 갔어요... 왜요?"
"예?..... 언니가 결혼하셨나요?"
"그럼요... 왜요?"
"어 어 어... 아무것도 아닙니다."
시골청년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황급히 서점을 빠져나왔다.. 황당함을 넘어 뭔가 배신을 당한 느낌... 서점 주인은 배신을 하진 않았지만... 결혼한 사람이, 결혼하지 않았을 것 같은 모습으로 있었던 것이 배신이라면 배신일지도...
그렇게 낙담을 하며 며칠을 가슴앓이를 하고 있던 중, 불현듯, 그날 카운터를 보고 있었던 서점 주인 동생이 생각났다. 동생 역시, 예뻤고, 키가 컸던 기억이 났던 것이다.
또 며칠을 고민하다가, 결심하고 서점 문을 들어섰다. 동생이 앉아 있다. 짧은 눈인사를 나눴지만 서점 주인 동생의 인상을 빠르게 다시 확인했다. 키는 오히려 언니보다 더 큰 것 같고, 따뜻한 미소에 언니와는 다른 차분한 매력이 넘치는 여성이었다. 한참을 서점 책장을 뒤지다가, 카운터로 다가갔다.
"오늘도 사장님이 안 계시네요"
"네.. 볼일 보러 잠깐 나갔어요"
"혹시 동생 분은 결혼하셨나요"
"아.. 아.. 아니요."
남자는 용기를 내고 말했다.
"저는 옆 마을 사람인데, 공직생활을 여기서 시작한 공무원입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니 너무 두려워 마시고, 혹시 시간 되시면 식사 한번 같이하실까요?"
동생은 갑작스러운 데이트 요청에 당황하며 잠시 머뭇거렸다. 이윽고,
"저녁 식사 초대는 감사한데, 언니와 상의해서 알려 드릴게요"
"네 네.. 감사합니다.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꼭 좋은 소식 주십시오"
사무실 전화번호를 건네주고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서점을 황급히 나왔다.
1주일을 기다려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낙담을 했지만,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서, 서점에 갔다. 이번에는 언니가 앉아 있었다.
"저.. 사장님 안녕하세요... 저 아시죠.. 책을 자주 사러 왔는데.."
"네... 그럼요... 저희 책방을 자주 이용해 주셨는데요..."
"사장님, 제가 지난주에 동생분에게 저녁 식사를 오퍼 했습니다. 동생분을 만나고 싶은데 도와주십시오"
언니 사장이 처음으로 진지하게 남자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네, 동생에게 이야기 들었어요.. 이 마을에서 공무원 생활하신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착하고 성실한 총각입니다. 동생 만나게 해 주십시오"
"동생에게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네.. 넵 감사합니다."
시골 총각은 머리를 꾸벅 숙이고는 빨개진 볼의 뜨거움을 느끼며 서점을 나섰다.
그로부터 또 몇 주의 시간이 아무런 연락 없이 지나갔다. 시골총각은 인연이 안 되나 보다 낙담을 했다. 그래도 가만히 있기에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아, 몇 주만에 서점 문을 들어섰다. 오늘은 동생이 앉아 있다. 동생도 시골총각이 들어오는 것을 보며 눈이 동그래졌다.
"xxx 씨... 잘 지내셨나요? 연락을 많이 기다렸습니다"
"아 네... 언니에게 이야기 들었어요... 좋은 분 같다며..."
"근데 왜 연락을 주시지 않으셨나요"
"그래도 제가 직접 연락하기가 쑥스러워서요.. 그래서 언니에게 말씀하신 다음날부터 쭉 가게를 보고 있었습니다. 혹시 오실까 봐"
그때부터 시작된 연애가 곧이어 시골총각이 서울로 발령이 나서 꼬박 2년 동안 서울과 시골을 왕래하며 어어졌고, 결혼으로 골인했다.
동생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언니에게 많은 의지를 했고, 얌전한 동생과 달리, 활달한 언니 역시, 시골총각의 결혼 스토리가 자기로부터 시작된 것을 알기에 이제 매제가 된 시골 총각을 특별히 친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언니부부와 동생 부부 네 사람이 술친구로 많이 어울려 다니며 친하게 지냈다.
결혼 스토리 말미에 그분이 갑자기 쓸쓸한 목소리로..
"그 처형이 15년 전에 혈액암으로 돌아가셨어요"
"네 ~에~ 어찌 그런 일이..."
"참 좋은 분이었는데... 나도 그때 많이 힘들었어요.."
시골총각 결혼스토리가 유쾌한 로맨스 코미디로 마무리되는 것을 예상했던 나에게 예상하지 못했던 급작스러운 반전에 나도 충격을 받았다.
그러곤 쓸데없는 상상을 하게 된다.
만약 언니가 시골총각이 서점에 걌었을 때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면..
동생이 아닌 언니가 시골총각의 배우자가 되었다면..
인생이란 정말이지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