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둘기도 멍 때린다.

사브작 사브작

by 달빛모아

​상급 학교에 입학하고 딱 4주 차가 지난 주말 아침이다.
이른 아침, 반쯤 감긴 눈으로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던 아이.
졸음 섞인 목소리로 대뜸 "좋은 생각이 났어"라더니, 긴 산책 말고 집 앞 벤치에 앉아 "멍 때리자"라고 제안한다.
​새로운 환경에서 켜켜이 쌓였을 아이의 긴장감과 압박감을 잘 알기에, 그 제안이 오히려 반갑고 안심이 되었다.


​우리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어느새 매화꽃의 홀잎이 잔뜩 떨어진 길을 지나, 노랗게 만개한 개나리 담장길로 들어섰다.
조용히 걷던 아이는 활짝 핀 진달래를 보더니 반가워한다.
마치 매년 화전을 부쳐 먹기라도 한 듯 그럴싸하게 조리법을 설명해 준다. 그 앙증맞은 수다를 들으며 걷다 보니 아침 햇살을 받아 번지르르하게 빛나는 철쭉 꼬투리가 보인다.
누군가 끈적한 꿀을 발라놓은 듯 반짝이는 그 모습이 참 야무지고 예뻐 보였다.


​우리의 짧은 여정은 지하철 입구 근처 공원 벤치에서 멈췄다.
그곳에는 길 중앙에 홀로 배를 깔고 앉아 있는 비둘기 한 마리가 있었다.
도심의 비둘기라 사람에 익숙한 건지, 1m도 채 안 되는 거리까지 다가가도 녀석은 살짝 움쩍거리기만 할 뿐 제 자리를 지켰다.


​사람들이 지나가든 말든 녀석은 앉은 채로 눈만 깜박인다. 지나가던 여자아이 둘은 인도 중앙에 떡하니 자리한 녀석이 신기한 듯 저희들끼리 웃으며 사진을 찍는다.
녀석은 그렇게 한동안 앉아 있다가 간간이 일어나 꽁지깃을 부채처럼 활짝 펴며 몸단장을 한다.


​딸아이와 나는 그 비둘기를 보며 조근조근 이야기를 나누고 웃음을 터뜨렸다.
​비둘기는 우리를 무심하게 보는 듯했고, 우리는 대놓고 녀석의 일상을 관찰했다.


한참을 배 깔고 앉아 무념무상으로 시간을 보내던 녀석이 툭, 하고 일어선다.
벤치 끝 경계석으로 톡톡 걸어가더니 부리로 무언가 부지런히 건드리기 시작했다.
딸아이는 깜짝 놀라 녀석이 아주 작은 노란 꽃들을 먹어치웠다며, 녀석이 훑고 지나간 자리를 가리킨다.


​'이 녀석, 천하태평하게 앉아만 있는 줄 알았더니 주변에 맛난 것들이 어디 있는지 부지런히 살피고 있었구나.'
그 모습을 보니 '요 녀석 봐라' 싶다.

비둘기가 쪼아 먹은 그 작은 노란 꽃잎이, 한참 뒤에도 자꾸 생각난다.






글벗님들, 오늘도 함께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롯이 나를 챙길 수 있는 틈을 만드시길,
평온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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