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비

by 루아 조인순 작가

오늘 그를 만났다. 청춘의 한 자락 저편에 뽀송뽀송한 솜털을 벗고 사회에 첫발을 디디던 날 미팅이라는 것을 처음 했다. 적당한 키에 얼굴이 유난히 하얗던 그가 맘에 들었다. 그도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우리들은 서로의 소지품을 꺼내놓고 마음에 드는 상대가 자신의 물건을 가져가길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자신들의 물건을 집어 든 상대와 명동거리를 쏘다니며 즐거운 한 때를 보냈다. 점심으로 중국집에서 자장면과 군만두를 시켜먹을 때 그가 나에게 말했다.


“저, 자장면 좋아하세요?”

“?”

“좋아하면 날마다 사주려고요?”

“아, 네!”


내가 맘에 든다는 이야기를 그는 날마다 자장면을 사주겠다는 말로 대신했다. 우리들은 진정한 사랑의 의미도 모른 채 서로에게 빠져들며 친구들끼리 온종일 깔깔대며 여행도 가고 운동도 하며 떠들고 다녔다. 한 계절이 바뀌어 갈 때 그는 군 입대를 앞두고 상기된 얼굴로 나를 찾아 왔다. 군 복무를 마칠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우리는 그렇게 핑크빛 미래를 꿈꾸며 언약을 했다.


그런데 그는 군대에 가지 못했다. 징병검사를 받으러 간 그가 폐결핵 판정을 받아 군대를 면제받았다. 건강하다고 믿었던 그가 지병이 있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것도 병세가 꽤 깊다고 하니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 뒤로 그는 상실감이 너무 커 친구들 모임에도 나오지 않고, 나도 만나주지 않았다. 친구들은 그가 나를 피하는 것이 오히려 잘 된 일이라고 했다. 내 곁을 떠나간 그 후로 어느 누구와도 만나지 않고 은둔생활을 하며 지병 치료차 요양을 위해 시골로 내려갔다는 소식만 전해 들었다.


세월은 빠르게 흘러갔고, 친구들은 하나둘 결혼했다. 나도 다른 사람을 만나 결혼했다. 가끔은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니면 결혼은 했는지, 아직도 결핵을 앓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러던 어느 날 20년이 지나서 우연히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좀 볼 수 있느냐고...


그러겠다고 하고 그와 약속을 잡았다. 나도 내심 그가 궁금했다. 카페에 도착하니 한 중년의 남자가 커피숍 문을 열고 들어왔다. 두리번거리며 걸어오는 모습을 보는 순간 ‘아,’ 하는 비명과 함께 온몸에 전율을 느끼며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고 싶었다. 세월을 잊은 망각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괜히 나왔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가 다가왔다.


“오랜만이지?”

“으음, 그래, 오랜만이다.”


나는 그렇게 20년 만에 그를 보고 기대보다는 실망이 더 컸다. 커피숍 의자에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끝도 없이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젊은 날의 추억은 꼭 아름다운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한 시간 가까이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다만 20년이란 세월의 거리는 너무나 멀었다.


몸도 좋아졌고, 사업도 성공해 누릴 것은 모두 누리고 살고 있는 것 같았다. 근사한 외제차를 타고 와 기사는 두고 왔다고 말하는 그가 왠지 거북해 보였다. 저녁이나 같이하고 가자는 그의 청을 거절하고 돌아오며 많은 생각을 했다. 예전과는 달리 세월이라는 무게와 중년 아저씨 특유의 얍삽함과 비대한 몸을 보니 유쾌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삶의 무게에 짓눌려 힘겹고 고달픔을 느낄 때 아련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찾아 헤맨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친구들도 가끔씩 보면서 서로 늙어가는 모습을 보고 살아야 정이 들지 20~30년이 지나 만나게 되면 대화도 겉돌고 서로 변한 모습에 낯설다.


첫사랑을 찾아 헤맬 때까지는 작은 설렘과 흥분으로 전율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대상과 마주하게 되면 희열보다는 씁쓸함이 앞서 후회하게 된다.


파랑새를 찾으려 나간 것은 아니지만, 그 아름다운 추억을 덮어두지 못한 자신을 질책했다. 과거는 끊임없이 현재의 삶에 감미료처럼 활력소가 되기도 하지만, 막상 그 대상과 직면하게 되면 희비가 엇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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