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구슬처럼 맑은 가을 어느 날, 꿀꿀한 기분을 누르고 몸을 혹사시킬 요량으로 안양천 길을 따라 무작정 걸었다. 요 며칠째 반갑지 않은 손님인 불면증이 밤마다 찾아와 밤새 놀자고 해서 잠을 제대로 못 잤기 때문이다.
밤에 잠을 자는 방법은 첫째는 몸을 혹사시키는 것이고, 둘째는 아침 일찍 일어나 해가 뜨는 것을 보고 해와 눈 맞춤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 해와 눈을 맞추면 몸의 시계가 변해 밤에 잠을 잘 잔다. 난 몸을 혹사시키기로 결정했다. 그 방법이 효과가 더 빠르기 때문이다.
예전의 안양천은 꿀꿀하고 역겨운 냄새를 풍기며 비만 오면 천이 넘쳐 주변이 온통 물바다로 변했는데 요즘은 아니다. 안양천 주변 환경이 몰라보게 깨끗하게 변했고, 보행과 자전거 도로와 간이 화장실, 그리고 걷다가 쉬어갈 수 있도록 벤치까지 조성되어 있다.
환골탈태를 한 안양천은 이젠 맑은 물이 흐르고 야생동물들의 안식처가 되었다. 모두가 자연을 사랑하는 시민들의 수고 덕분이다. 지나가며 보니 오리며 왜가리, 백로까지 보였다. 천에는 커다란 물고기도 많았다. 먹이가 풍부하니 철새들이 찾아오는 것이다.
가을이 여기저기를 만지고 다녀서 길가에 나무들은 거의 낙엽들이 떨어졌다. 가을이 벌써 자신의 일을 끝내고 떠나려고 짐을 챙기는 중이다. 계절의 시계는 이처럼 어김없이 흘러 또 한 번의 가을을 갈무리하고 있었다.
보행의 묘미는 낮은 자세로 겸손을 배우는 것이다. 걷는 동안 지나가는 장소에 대해 모든 것을 조사하고 기록한다. 몸의 오감을 자극해 앞서간 사람들이 남기고 간 이야기에 집중한다. 길은 끝도 없이 넓고 큰 도서관이기 때문에 수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
한 시간 가량 걸으니 두물머리처럼 안양천과 학의천이 만나는 곳이 나왔다. 아마도 두 물줄기는 여기서 만나 한강을 향해 흘러가는 것 같다. 긴 여정의 길에 친구가 있어 외롭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프리카 속담에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했는데 두 물줄기는 여기서 만나 서로 어우러져 길동무 되어 먼 바다를 향해 조잘조잘 이야기를 나누며 흘러갈 것이다.
백운호수를 가기 위해 학의천 길로 접어들었다. 학의천 길은 비포장 길과 포장길로 나누어졌는데, 비포장 길이 인적이 뜸해 그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길은 안양천길보다 운치가 있다. 스쳐가는 사물들이 말을 걸어온다. 나뭇가지가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이내 멀어져 간다. 길가에 억새와 갈대꽃이 서걱거리며 바람과 열애 중이다. 시들어버린 붓꽃 줄기 밑에도 작은 물고기들이 옹기종기 모여 가을 햇볕을 쬐고 있다.
길을 따라 걷는데 표지판에 “뱀 조심”이란 팻말이 여기저기 보인다. 얼마나 뱀이 많으면 이런 팻말을 세워놨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수풀 가까이 가서 물을 들여다봤다. 그런데 갑자기 스르륵 거리는 소리가 들려 뱀인가 해서 깜짝 놀았다. 가을 뱀은 독이 올라 더욱 조심해야 한다. 기어 다니는 것들은 왜 그렇게 모두가 징그러운지 어지간하면 가까이하고 싶지 않다.
차량을 운전하며 다닐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이번 기회에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의 민낯을 구석구석 돌아볼 생각이다. 학의천 길은 생각보다 멀었다. 비포장도로를 한참을 걸으니 발바닥이 물집이 생겨 아팠다. 다리 밑을 지나갈 때는 환한 대낮인데도 조금 서늘했다. 으슥해서 여자가 밤에 혼자 걸으면 무섭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들이 비포장도로를 다니지 않는 이유가 이런 이유인 것 같다.
조금 더 걸으니 백운호수 팻말이 보였다. 백운호수에서 잠시 쉬었다가 물을 마시고 다시 백운호수 둘레길을 걸으려니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안양천과 학의천을 돌아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기가 아쉬웠다. 당기고 아픈 다리를 살살 달래서 백운호수를 돌아 곳곳에 발자국을 남기고 모락터널을 지나왔다.
빠른 걸음으로 5시간을 걸었더니 몸이 장난이 아니다. 산보다 평지를 걷는 것이 더 힘든 것 같다. 종아리가 빳빳하게 굳어 걸을 때마다 통증이 느껴졌다. 덕분에 오늘 밤은 정신없이 나가떨어져 누가 엎어가도 모르고 꿀잠을 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