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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죽계 Nov 02. 2023

‘개판이다’, 혹은 ‘개판오분전(開板五分前)’의 유래,

개판, 오분전, 전쟁


‘개판이다’, 혹은 ‘개판오분전(開板五分前)’의 유래, 어원     


개판에 대한 국어대사전의 풀이를 보면, ‘상태, 행동 따위가 사리에 어긋나 온당치 못하거나 무질서하고 난잡한 것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면서, ‘개판이 되었다.’ ‘술 마시고 개판을 쳤다.’ 등의 예문을 들어 놓고 있다. 여기에는 이 말의 원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개판오분전’에 대한 설명은 아예 없다. 또한 국어대사전에는 ‘개-판’이라고 하여 ‘개’를 길게 발음하도록 표시했으나 이것은 완전히 틀린 것이다. 이유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설명하도록 한다.

이 말은 일반적으로 개(犬)와 관련을 가지는 것으로 이해되어 개가 많이 있는 모양을 지칭하는 것처럼 쓰이고 있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그러나 이 말은 멍멍하고 짖는 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표현이라는 점에서 원래의 뜻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개판은 한자어인 ‘開板(뚜껑을 열다)’으로 밥솥의 뚜껑을 연다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밥솥 뚜껑을 여는 것과 무질서하고, 난잡한 상태가 어떤 관련이 있기에 이런 표현이 등장하여 지금까지 널리 쓰이고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70년 전에 있었던 한국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가 볼 필요가 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북쪽이 우위를 점하면서 낙동강 전선까지 하염없이 밀려 내려갔다. 대구 부근의 다부동 전투에서는 쌍방의 병사들이 수없이 죽어 나가면서 전선을 정체되어 움직이지를 않았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피난민이 대구와 부산 등으로 몰려들면서 아수라장을 이루었는데, 여기에서 가장 큰 문제가 밥을 먹는 일이었다.

모든 면에서 물자가 부족했던 시절이었던 데다가 전쟁까지 터졌으니 끊임없이 밀려드는 피난민들은 끼니를 해결하는 일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되자 군부대나 배급단체 등에서 점심을 제공하기에 이르렀는데, 12시를 점심시간으로 하여 밥을 짓고 배식을 하게 되었다.     

점심시간이 되기 오래전부터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여기저기 흩어져서 이제나저제나 하고 기다리고 있는 상태가 매일 매일 계속되었다. 이때만 해도 큰 밥솥이 많지 않았는데, 일본인들이 쓰던 무쇠 밥솥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일본식 무쇠 밥솥의 특징은 솥뚜껑이 무쇠가 아니라 나무로 된 것이라는 점이었다.     


밥이 다 되면 나무판 뚜껑을 열어야 하는데, 이것을 개판(開板)이라고 했다. 밥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완성되는 시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뚜껑을 열기 오 분 전이 되면 피난민들에게 밥먹을 시간을 알리는 의식을 거행했다. 밥뚜껑을 열기 오 분 전이 되면, 한 사람이 높은 곳에 올라 꽹과리를 크게 치면서 말하기를, “개판 오 분전이오”라고 외친다.          

이 소리를 신호로 하여 사방에서 엄청난 사람들이 줄을 서기 위해 몰려드는데, 서로 앞에 서려고 밀치기도 하고, 새치기하는 사람을 잡아내다가 싸우기도 하면서 난장판으로 되는 상태가 매일매일 계속되었다.     

이런 일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 달, 혹은 몇 년에 걸쳐 계속되다 보니 ‘개판 오분 전이오’라는 말은 일상적인 것이 되었고, 점차 널리 퍼지면서 굳어진 표현으로 되었으며, 그것이 군대로 유입되어 유행어처럼 쓰이다가 다시 일반인들에게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는 과정에서 ‘개판이다’, 혹은 ‘개판’ 등의 표현으로 축약되면서 여러 곳에 쓰이게 되었는데, 문제는 원래 표현이 줄어들다 보니 원래 의미를 유추하기 어렵게 되면서 ‘개’가 ‘犬’으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지금은 이 단어를 검색하면 거의 모두 개(犬)와 관련을 가지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게 인식되고, 쓰이는 것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 말의 유래에 가슴 아픈 사연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아두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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