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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죽계 Jan 07. 2025

묵사발의 어원(묵사발이 되다)

‘묵사발이 되었다’에서 묵사발의 어원     


지금도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많이 쓰는 것 중에, ‘묵사발이 되었다.’, ‘묵사발로 만들다.’, ‘묵사발을 만들어 버린다.’ 등의 표현이 있다. 이 말들은 뭔가 좋지 않은 상태가 되거나 그런 상태로 만든다는 것으로, 좋지 않은 뜻과 어감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의문이 생기는 것은, 하필이면 이런 표현에 묵사발이란 말을 사용했느냐는 것이다. 특히 길게 썬 묵과 여러 재료들을 그릇에 담은 뒤 육수를 부어서 만든 음식을 묵사발이라고 하는 지금의 세태에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묵사발이란 말을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찾아보면, 1, 묵을 담은 사발. 2. 얻어맞거나 하여 얼굴 따위가 형편없이 깨지고 뭉개진 상태를 속되게 이르는 말. 3. 여지없이 패망한 상태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현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글로 옮겨 놓은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쓰고 있는 표현에 대한 이해를 돕는 데에는 아무런 보탬이 되지 못한다. 위의 표현에서 묵사발이 쓰인 이유를 올바르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묵을 중심으로 하면 안 되고, 사발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우선이라고 할 수 있다.     


사발(沙鉢)은 사기로 만든 그릇으로 국이나 밥 등을 담아서 먹는 그릇의 일종이다. 위는 넓고 아래는 좁은데, 그릇의 밑바닥 바깥쪽에는 둥근 모양의 굽이 붙어있는 것이 특징이다. 가늘고 높이가 있도록 만들어진 굽은 열전도율을 낮추어서 뜨거운 그릇을 손으로 들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장치이다. 발(鉢)은 일상생활에서 쓰는 그릇을 가리키는데, 유기로 만든 것은 주발(周鉢)이라 하고 사기로 만든 것은 사발이라고 한다. 사기(沙器)는 고령토, 장석, 석영 따위의 가루를 빚어서 구워 만든 것으로, 희고 매끄러운 그릇이나 그런 재료로 만든 물건을 지칭한다. 지금은 플라스틱을 비롯하여 여러 재질의 그릇이 있지만 옛날에는 일반 서민들이 생활 용기로 쓰는 그릇의 중심을 이루었다. 주발은 값이 너무 비싸서 신분이 높은 사람이나 부유한 사람들이 주로 쓰거나 제사 용기 정도로만 사용되었다.     


사발은 희고 매끄러워서 때가 잘 묻지 않아서 식기로 쓰기에 적당했지만, 외부의 충격에 매우 약해서 잘 깨지는 데다가 금이 가거나 이가 빠지는 일도 자주 생기기 때문에 아주 조심해서 다루어야 하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깨진 그릇은 당연히 버려야 하지만 금이 가거나 이가 빠진 사발에 대한 처리가 매우 어려웠다. 금이 가거나 이가 빠지면 물기가 있는 음식은 담을 수가 없는 데다가 이 빠진 그릇을 금기시하는 우리의 식생활 문화로 인해 밥상에 올라가는 순서에서는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밥상에 올릴 수 없다고 해서 값도 싸지 않은 데다 구하기도 힘든 사발을 마구 버릴 수는 없었으므로 다른 용도로 사용할 방도를 찾아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선조들은 금이 가거나 이가 빠진 사발을 쓸 수 있는 기발한 사용처를 찾아냈는데, 아주 많이 망가져서 사람이 먹는 음식을 담을 수 없을 정도가 된 것은 개밥그릇, 닭 모이 그릇, 수세미나 비누 등을 담아 놓는 그릇 등으로 썼다. 지금 강조되고 있는 쓰고 난 뒤에 다른 용도로 다시 쓰는 재활용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금이 간 정도가 심하지 않아서 물이 잘 새지 않는 상태의 것이거나 이가 빠져서 밥상에 올릴 수 없는 사발은 다른 용도로 썼는데, 고체와 액체의 중간 형태로 되어 있는 음식을 담는 그릇으로 썼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음식의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묵이었는데, 이것을 만들 때 썼던 사발이 바로 묵사발이었다. 묵과 비슷한 것 중 두부가 있는데, 이것은 콩을 사용하여 즉석에서 만들어야 하고, 한꺼번에 대량으로 만들어야 하므로 가루로 만들어서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면 아무 때나 만들어 먹을 수 있는 묵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더구나 묵은 소량으로 만들어서 가볍게 먹을 수 있는 대표적인 음식이었기 때문에 작고 둥근 그릇 같은 것을 이용해서 짧은 시간에 만들어서 반찬이나 물을 넣은 국 같은 것으로도 요리할 수 있기 때문에 사발을 이용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런 묵을 만들 때 쓰는 그릇이 바로 이가 빠졌거나 살짝 금이 간 사발이었다. 녹두 가루, 도토리 가루나 메밀가루 등을 죽처럼 끓인 후 그릇에 담아서 굳힌 것이 바로 묵이므로 이가 빠졌거나 살짝 금이 가서 물이 잘 새지 않는 사발 같은 것은 묵을 담는 그릇으로 쓰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선조들은 이것을 가리켜 묵사발이라고 불렀는데, 거의 모든 가정에 이러한 용도로 쓰이는 묵사발이 존재했으므로 아주 넓게 퍼져 있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모든 가정에 있을 수밖에 없는 묵사발이기는 해도 이것은 사발이라는 원래의 용도에서 밀려난 퇴물이 되었기 때문에 결코 좋은 어감을 가진 말은 아니었다. 이것은 비유를 통해 언어 표현을 풍부하게 할 수 있는 충분한 자양분이 되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      


묵사발은 깨지거나 금이 가거나 해서 망가진 상태가 되어서 사발의 원래 용도인 밥상에는 올라가지 못할 정도의 것이 되어 버린 그릇을 의미하는 말이 되었다. 무엇인가를 담을 수는 있으니 사발이라고 불리기는 하겠지만 이름만 남아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깨지고 망가진 상태의 사발이 바로 묵사발이란 말로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다른 사람에게 얻어맞아서 얼굴이 뭉개지거나 깨진 상태, 이름만 남아 있고 여지없이 패망한 상태 등을 가리킬 때 묵사발이 되었다. 묵사발로 만든다 등의 표현을 만들어서 썼던 것으로 보인다.  

    

아주 기발하면서도 재미있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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