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문화사(7)-동두천(東豆川)

by 죽계

땅이름문화사(7)-동두천(東豆川)


경기도 북부에 자리하고 있는 동두천시는 남에서 북으로 시내를 관통해서 흐르는 강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지명의 역사는 매우 짧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확한 기록이 없거나 증빙 자료를 제대로 찾지 못해서 그런지 막연하게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민족혼 말살 정책을 펼치면서 아무렇게나 지었다는 주장과 1960년대에 지어졌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내용이다. 이것은 믿을만한 자료나 정확한 기록에 의하지 않는 일부 사람들의 주관적 견해일 뿐이어서 신뢰성이 전혀 없다. 이런 이유로 인해 동두천이란 지명의 어원과 유래 등에 대해서는 역사적, 문화사적 자료에 대한 정치한 분석과 세밀한 고찰이 필요하다.


동두천은 고구려 지명으로 내을매(內乙買) 또는 내이미(內爾米)라고 불렸던 곳이다. 그러다가 신라 경덕왕 때인 757년에 사천(沙川)으로 바뀌어서 양주(楊州)에 속하는 지역으로 되었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는 이담면(伊淡面)으로 바뀌었다. 20세기에 들어와 사람들의 유입이 많아져 이담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다시 이름이 바뀌어 동두천으로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고구려시대부터 고유의 땅이름이 붙여졌다는 점으로 보아 이 지역은 전략상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20세기에는 미군 부대가 주둔하기도 했다.


내을매(內乙買)와 내이미(內爾米)는 모두 이두(吏讀)인데, 마지막의 ‘買(살 매)’와 ‘米(쌀 미)’는 모두 마을, 고을(川)의 뜻이다. ‘內’는 뜻을 빌려온 것(訓借)인데, ‘물가(水濱)’라는 의미다. ‘內’가 땅이름으로 쓰일 때는 ‘汭(물굽이 예, 물가 예)’의 뜻으로 되는데, 고구려 이두 지명에서는 바로 이것을 활용했다. 중간의 ‘乙’과 ‘爾’는 모두 글자와 글자 사이에 오는 중간 받침의 기능으로 쓰였다. 이것은 소리를 가져온 뒤에 ‘ㄹ’ 정도 사이 받침 정도로 활용되었다. 현대의 사이시옷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내을매’, ‘내이미’는 ‘물기슭 ㅅ(ㄹ) 마을(고을)’이라는 뜻이 된다.


‘내을매’는 신라 경덕왕 시대인 757년에 ‘사천(沙川)으로 바뀌는데, 고구려 이두 지명의 뜻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한자로 표기하고 있어서 놀라움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沙’의 뜻은 ‘모래’ 정도지만 이 글자가 강 이름이나 지명 등으로 쓰일 때는 그 의미가 많이 달라진다. ‘沙’의 고대 글자 모양을 보면 물(수)이 흐르는 옆에 여러 개의 점이 흩어져 있는 형태여서 이것을 모래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는 크지 않은 돌(자갈돌) 같은 것을 나타낸 것으로 ‘물 근처에 있는 작은 돌’이라는 뜻을 기본으로 한다. 그래서 ‘沙’는 ‘자갈돌이나 모래 같은 것들이 있는 ‘물가의 땅(水旁地)’이라는 뜻이 된다.


‘川’은 물과 물 사이에 있는 높고 평평한 땅으로 사람들이 모여 살 수 있는 공간을 지칭하니 고을이라는 뜻을 가진 ‘州(고을 주)’와 같은 용도로 쓰인다. 결국 신라 시대의 동두천 땅이름인 ‘사천’은 ‘물가 고을’이라는 것으로 되어 고구려 이두 지명과 같은 뜻이 된다.


동두천 지역은 조선시대에 이담(伊淡)으로도 불리기도 했다. ‘伊’는 천하를 다스리는 존재라는 뜻을 기본으로 하는 글자인데, 세상의 벼리(綱)가 되는 사람을 지칭한다. 벼리는 그물코를 꿰는 줄로 이것에 의해 그물의 모든 것이 결정된다. 이것이 사람에게 적용되면 세상의 많은 것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가 된다. 사물의 뼈대와 비슷한 뜻이라고 할 수 있다. 뼈대가 없으면 모든 것이 무너질 수밖에 없으므로 이 글자는 ‘핵심’, ‘근간’ ‘뛰어난’, ‘아름다운’, ‘그대’, ‘기본’, ‘근본’, ‘길쭉한’, ‘권력자’, ‘지팡이를 잡은 사람’ 등의 뜻을 가진다.


‘淡(맑을 담, 물 질펀히 흐를 염)’은 음식 같은 것에서 염도(鹽度)가 낮아 맛이 좋지 못하다는 것으로 ‘싱겁다’가 기본적인 뜻이다. 후대에 와서는 점차 뜻이 확장되어 ‘창백한 얼굴색’, ‘얽매이지 않는다’, ‘냉담하다’, ‘단아하다’, ‘물이 많은 모양’ 등 다양한 용도로 쓰였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담’은 ‘많은 물이 길쭉한 모양으로 내(川)가 되어 흐르는 지역’이란 뜻으로 볼 수 있다. 이 지역은 가정자(柯亭子)로 불린 적도 있는데, 가정(柯亭)이 길쭉한 모양으로 된 피리를 의미하므로 역시 비슷한 뜻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동두천 지역을 지칭하는 지명이었던 이담면은 조선시대에 2,500여 명 정도가 거주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이 정도 인구면 매우 큰 고을인데, 그래서 그런지 오일장이 서기도 했다. 양주의 오일장은 일곱 군데 정도가 선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주로 동두천과 그 부근에 집중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이 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 중반에 편찬된 �여도비지輿圖備志)�에는 북도천장(北道川場), 동도천장(東道川場) 등이 이 동두천 지역에 열렸던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북도천장은 북쪽으로 흐르는 내 옆에 있었던 오일장으로 지금 동두천시 봉양동 부근으로 보고, 동도천장은 동쪽에서 흘러오는 내(川) 옆에 있었던 장터로 지금의 보산동 부근이라고 동두천시사(東豆川市史)에서는 밝히고 있다. 그러나 북도천은 북으로 흐르는 물이고, 동도천은 동에서 오는 물이라고 한 것은 무엇인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동도천장은 그곳이 아니라 서쪽에서 동쪽으로 물길이 흘러오는 상패천(上牌川) 옆 동두천 경찰서 부근이다.


19세기의 문헌 기록에 동도천장, 북도천장 등이 있었다는 것으로 볼 때 지금의 동두천은 양주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음이 분명하다. 조선시대에 제작된 지방 지도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1872년에 국책사업으로 제작한 지방지도 양주목에 동두천장(東豆川場)이 이담(伊淡)에 있다고 나온다. 이담과 가정자 등도 모두 동두천시에서 주장하는 소요산 바로 아래인 보산동보다 훨씬 남쪽에 있었다는 사실도 이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 지도로 왕조 말기에 만들어진 것이니 현재로서는 가장 신뢰성이 높은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동두천(東豆川)이라는 땅이름이 동두천시에서 말하는 것처럼 20세기에 들어와서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나라에 오일장이 형성된 시기는 16세기 정도로 알려져 있는데, 동두천장이 19세기 말의 지도에 등장한 것을 보면 훨씬 이전부터 동두천이라는 지명이 있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두천이라는 지명은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만들어진 땅이름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 동두천(東豆川)이라는 지명에 대해 정밀한 분석을 함으로써 그 의미를 알아보고자 한자.


‘東’(동녘 동)은 나무(木)와 해(日)가 합쳐진 글자로 태양이 나무 아래나 가운데에 있는 것을 나타낸 것으로 해가 완전히 떠오르기 전의 상태를 지칭한다. 해는 동쪽에서 떠오르기 때문에 이 글자는 동쪽, 봄, 움직임, 생명의 탄생 등의 뜻을 기본으로 한다. 또한 오행(五行)에서는 나무와 푸른색을 나타내기도 한다. 봄이 오면 만물이 다시 살아나므로 움직인다는 뜻으로도 되며, 손님을 맞이하는 주인이라는 뜻도 가진다. 참으로 다양한 쓰임이 있는 글자라고 할 수 있다.


‘豆(콩 두)’는 사물의 모양을 본떠서 만든 상형자(象形字)에 속하는데, 원래는 높은 발이 달린 접시와 같은 것으로 먹을 것을 담는 데에 쓰였던 그릇을 지칭했다. 또한 도자기, 청동, 나무 등으로 만든 그릇으로 제사를 지낼 때 쓰는 음식을 담는 제기(祭器)라는 뜻으로도 쓰였다. 그리고 이 글자는 무게의 단위, 음식 등의 뜻으로도 쓰이기도 했다. 옛날에는 菽(콩 숙)과 豆(그릇 두)의 발음이 비슷했는데, 진(秦)나라 이후에는 ‘豆’를 가차(假借)하여 콩을 나타내는 글자로 쓰게 되었다.


‘川’이 지명으로 쓰일 때는 물가에 있는 높고 평평한 땅으로 사람이 모여 살 수 있는 곳이 되어 ‘고을’, ‘큰 도시’ 등을 지칭하는 ‘州(고을 주)’와 같은 용도로 사용된다. 다만, ‘川’은 ‘州’보다 규모가 작은 도시를 지칭한다는 차이가 있다. 우리나라 지명에 이 글자를 쓰는 곳이 여러 군데 있는데, 모두 이런 뜻이다.

‘동두(東豆)’는 중국의 동쪽 나라에서 나는 콩이라는 뜻인데, 바로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서 나오는 것을 지칭했다.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에 의하면, 동두의 원산지는 동방인데, 중국 사람들은 낙랑두(樂浪豆)라 불렀고, 양쯔강 이남에서 나는 콩은 도두(刀豆)로 부른다고 했다. 동두는 콩꼬투리가 길쭉하면서 칼을 찬 모양, 혹은 작두칼 모양으로 되어 있어서 협검두(挾劍豆)로 부르기도 하고, 우리말로는 ‘작두콩’이라고 한다.

‘작두(斫刀)’는 짚이나 가축의 사료를 썰거나, 한약방에서 약재를 자를 때 사용하는 칼로 볼이 넓적하고 날 쪽이 불룩하면서 길쭉한 모양인데, 잡을 수 있는 자루가 달려 있다. 작두콩은 마치 작두처럼 길쭉한 모양으로 콩 꼬투리가 열리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데, 꼬투리 하나에 대략 10개가량의 콩알이 들어 있다. 작두콩은 꼬투리도 식용하는데, 푸르고 물기가 촉촉하면서 완전히 익기 전에 따서 콩과 함께 쪄서 먹으면 무맛이 난다고 하면서 꼬투리를 함께 먹을 수 있는 점이 이 콩의 특징이라고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는 설명하고 있다.


동두천(東豆川)은 이 지역의 땅 생김새(地形)가 바로 작두콩 모양으로 된 공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라고 할 수 있는데, 동두천시에서 설명하고 있는 내용은 너무 달라서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동두천(東豆川)과 동두천(東頭川)은 그 의미가 같다. 모두가 동쪽에서 흘러오는 하천의 의미로 동두내가 서류(西流)하여 시내를 관통하여 북류(北流)하는 신천(莘川)에 합류하는 지점을 의미한다. 이 두 지명의 의미는 같으나 가운데 ‘두’의 한자 표기가 다른데, 동두천(東頭川)과 달리 동두천(東豆川)은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 ‘두(豆)’는 ‘콩’이라는 의미로 이 경우에는 ‘동두천(東豆川)’의 해석은 불가능해진다. 단, ‘두(豆)’를 ‘두(頭)’의 약자(略字)로 이해하여야만 이를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동두천(東豆川)은 동두천(東頭川)을 간략히 약자로 표기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런 식의 약자 표기는 일본인들의 문자 습관이므로 글자를 간략히 쓴다는 의미 외에는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표기라고 할 수밖에 없다(동두천시사 편찬위원회 편, �동두천시 30년사�, 1권, 2012년 7월, 53페이지).” 그러나 이것은 동두(東豆)라는 말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글자의 뜻으로만 해석했기 때문에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동두천이라는 이름이 19세기 말이나 20세기에 들어와서 만들어졌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전부터 이 지명이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자료가 있다. 1872년에 국책사업으로 전국 지방 지도를 만들었는데, 양주목(楊州牧) 부분에 이담(伊淡)과 동두천장(東豆川場)이라는 이름이 뚜렷하게 표시되어 있다. 이것은 이담면 안에 동두천이라는 오일장이 있었고, 그것이 그 지역의 가장 중심되는 장터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지금도 전통문화의 하나로 살아 있는 오일장(五日場)은 16세기 무렵부터 만들어져서 17, 8세기 이후에는 크게 활성화되기 시작했는데, 국가에서 만든 공식적인 지도에 동두천 지역의 대표 장터 이름으로 동두천이라는 명칭이 수록되었다는 사실은 이 땅이름이 훨씬 전부터 이미 널리 쓰이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반증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국가에서 지정한 법정 이름은 이담(伊淡)이었지만 민간에서는 동두천이라는 땅이름을 오래전부터 썼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동두천 지역은 남쪽의 불곡산에서 발원하여 내려온 물이 북쪽으로 흘러 연천에서 내려오는 한탄강(大灘)으로 들어가는 신천(莘川)의 중간 지점에 있는 도시다. 물이 북쪽으로 흐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북서쪽에서 남쪽에 이르는 지역은 마차산(磨嵯山), 감악산(紺岳山), 도락산(都壓山), 불곡산(佛谷山)이 있고, 북동쪽에서 남쪽에 이르는 곳은 소요산(逍遙山), 어등산(於等山), 팔봉산(八峯山), 천보산(天寶山) 등이 막고 있어서 북쪽만 뚫려 있는 지형이기 때문이다.


북쪽으로만 물길이 열려 있기 때문에 신천, 청담천, 상패천, 동두천천 등이 동, 서, 남에서 와 합류하면서 동두천 시내를 관통하여 북으로 흘러 한탄강과 합류한다. 이곳은 애초에 고구려 땅이었는데, 남쪽으로 진격하거나 남에서 오는 적을 방어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래서 그런지 고구려 사람들이 동두천 남쪽 옥정동 평야 지대에 있는 독바위(瓮巖) 꼭대기에 보루를 설치해서 남쪽을 경계했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동두천은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내(川)인 신천(莘川)의 동쪽에 도시가 형성되어 있는데, 이것을 위성 사진으로 보면 그 모양이 바로 작두콩의 모양과 흡사하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콩꼬투리의 아래쪽 약간 불룩한 곳이 작두(斫刀)의 날과 비슷한데, 시내를 관통하여 흐르는 신천이 이에 해당한다. 콩꼬투리의 중간과 윗부분에 해당하는 공간은 소요산 기슭의 땅으로 현재 시내가 형성되어 있는 곳이다. 작두콩, 혹은 작두나 긴 칼의 모양을 그대로 닮은 지형이 바로 동두천 지역인 것이다. 과거에는 위성 사진도 없었을 텐데 이런 형태의 지형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고 그에 걸맞은 땅이름을 붙였는지 신기할 정도다. 풍수지리(風水地理)라는 것이 첨단 기계를 통해 자연을 파악하는 것보다 더 정확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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