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친구 J는 돌덩이 같은 가방을 나란히 끌어 앉고 덜컹거리는 기차에 몸을 맡겼다. 전날 벼락치기로 떠날 준비를 하느라 세 시간 남짓 자고 나온 나와, 여행 간다는 기대감에 잠을 설쳤다는 J는 둘 다 피곤에 절어 때꼰한 눈만 깜빡거렸다.
우리가 여행지를 경주로 정한 건, 원래 가려고 했던 울릉도 뱃값이 생각보다 훨씬 비쌌기 때문이요, 다른 곳을 찾아보다 경주의 한 바닷가 사진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린 물놀이를 하러 간 거였는데, 막상 출발부터 눈치 없는 빗방울이 창가를 신나게 두드렸다.
경주역이 폐역 되기 전까지만 해도 한산했던 신경주역은 여행객들로 북적거렸다. 나는 경주가 세 번째였고, J는 처음이었다. 우린 황리단길 근처 정류장에 내려 짐을 숙소에 맡겨놓고는 대릉원으로 부지런히 걸어 나왔다. 마침 비는 그쳤고 하늘만 흐려 걷기 알맞은 날씨였다.
우린 잔디가 곱게 깔린 무덤들 사이를 지났다. 나는 처음 경주에 왔을 적 생각이 났다. 도심 한복판에 어딜 가나 흔하게 보이는 무덤들이 주는 낯설고 신비로운 느낌.
"우리도 여기서 같이 사진 찍자."
부끄럼 많은 J가 서슴없이 외국인 관광객에게 사진을 부탁했다. 대릉원에서 줄 서서 찍는 포토존이 마침 한가했을 때였다. 그렇게 소심한 브이자를 내보이며 사진을 찍으니 관광명소라는 게 참 아이러니 하게 느껴진다. 남의 무덤가 앞에서 사진이라니. 그러다 시간이 좀 더 지나니 무덤은 그저 하나의 동산이 되고 더 나아가 저기서 썰매를 타면 어떨까 하는 불순한 상상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그럴 때쯤 표지판에 2천만 원 벌금이라는 글이 눈에 들어온다.
비가 다시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배도 슬슬 고파진다. 우린 먹을 것을 찾아 바로 옆에 있는 황리단길에 갔다. 워낙 먹거리가 많은 곳이라 금방 배를 채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맨 주전부리들 뿐이었다. 그리고 괜히 감성 넘치는 소품샵에들러 구경한다고 낭만만 한가득 채우고는 커진 허기짐에 밥집을 찾아 골목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냥 내가 갔던 식당 갈래?"
내가 J에게 물었다. 아무리 돌아다녀 봐도 긴 웨이팅과 겉 멋만 잔뜩 들어간 식당들에 왠지 모를 신물이 나서였다. J는 좋다고 했고, 길을 틀었다.
'숟가락 젓가락'이란 한식집은 전에 묵었던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이 알려준 곳이었다. 삼 년 만에 찾아가는 곳이라 혹시 코로나의 풍파로 사라지진 않았을까 걱정도 했으나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고향집 같은 정겨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순두부찌개를 시키자 정갈한 반찬들이 한 상가득 들어찼다. 거기에 그때와 같이 가격은 팔 천 원. J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걸 보니 괜히 뿌듯함이 든다. 굼주렸던 우린 젓가락을 쉴 새 없이 움직였고 그럴수록 얼굴엔 미소가 번졌다.
배도 두둑이 채웠겠다. 참고 있던 피곤이 밀려왔다. 비에 젖은 눅눅한 빨래들처럼 카페 구석에 축 쳐져서는 시간을 보내는데도 체크인까지 두 시간 가까이 남았다. 그래도 여행을 왔는데 움직여야지. 근처 쪽샘유적지발굴관이나 둘러보기로 한다.
"어서 오세요. 잘 오셨어요."
비가 와서 관람객들이 없어서였을까. 입구에서부터 해설자분의 환대에 조금 놀랐다. 눈빛에 생기가 감도는 해설자 분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실제 발굴 현장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시신이 안치되었던 곳부터 돌을 쌓기 위에 세워두었던 기둥터, 제사를 지냈다던 길목. 언뜻 보면 그저 돌들을 모아 놓은 곳 같이 보이던 내 시야는 해설자 분의 설명이 더해질수록 더 넓고 풍성해져 갔다. 이러한 설명은 마중물이 되어 어느 순간부터 우린 갖가지 질문들을 쏟아냈다. 직접 무덤을 파해치진 않았으나 마치 보물을 발견하듯 새로운 이야기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역사에 대해 평소에 더 관심을 가졌더라면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을 가지고 발굴관을 나왔다. 빗방울은 더 굵어졌고 우린 숙소로 걸음을 재촉했다. 어느새 경주에 대한 애정이 깊어진 J와 난 경주는 한 번만 올 곳이 아니라는 걸 이날 깊이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