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끼에서 꽝응아이 시내까지 이틀에 걸쳐 도착했다. 그사이 나는 자전거를 팔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본래 내 자전거 여행은 베트남의 등줄기를 따라 바닷가를 달리는 것이었는데, 정작 바닷가는커녕 큰 덤프트럭들이 거침없이 질주하고 매연이 가득한 혼돈의 길이 이어졌다. 그리고 거기에 또 한 가지 이유. 베트남의 최대 명절이라는
뗏(Tet)이 며칠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다음도시까지 어떻게 가야 할지 머리를 굴렸다. 60km가 족히 넘는 거리 중간에는 지도상으로 마땅히 먹을 곳도 잘 곳도 없었다. 이전에 길바닥에서 한 번 퍼진 경험이 있었던 터라 더더욱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꽝응아이에서 묵고 있던 호스텔 사장님, 민 아저씨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었다.
"자전거 팔 데가 있을까요?"
휘적휘적 마른 몸에 졸린 눈을 한 민아저씨는 내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곤 돌아와서 자신이 도와줄 테니 걱정 말라고 했다.
그러나 이틀 삼일이 지나도 아저씨에게 소식이 없었다. 가만 보면 아저씨는 투숙객을 맞이하고 커피를 내리고 밥을 차려먹는 거 이외에는 소파에서 빈둥거렸다. 방학을 맞이한 초등학생 아저씨의 아들도 그랬다. 그 아이는 하루종일 노트북으로 유튜브 영상만 보다가 숙제 잠깐, 그러다 아저씨가 소파에서 일어나 체스를 두자고 하면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언뜻 평화로운 분위기인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불편했다.
어느 날 아침엔 아저씨와 커피를 마시며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저씨는 바쁜 현대인의 삶과 부를 추구하는, 이를 테면 일론머스크 같은 인물들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도 한 때 돈을 좇고 쉴 새 없이 일만 하며 살았다고 했다. 그러다 회의감이 들어 절에 들어갔고, 거기서 불교를 깊이 탐구했는지 아저씨는 지금까지 채식과 맨발생활 실천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게 사람은 느리고 천천히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앉아봐.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쉬고. 늘 명상하는 거야. 걷는 것조차도."
나는 아저씨의 말대로 가부좌 자세를 하며 생각했다. 모두 일리가 있는 말들이었다. 그러나 아저씨는 좀 많이 풀어진 게 아닐까. 아저씨의 흐리멍덩하고 반쯤 감긴 눈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대부분이 남자 투숙객들인 데다 모기는 어찌나 많은지 다리에는 이미 물린 자국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공용 화장실에서 풍기던 지린내. 지금 돌이켜 보아도 여행 중 끔찍했던 순간 중 하나이다.
어느 날은 내가 묵는 도미토리에 정말 남자들 밖에 없어서 개인실로 바꾸려고 했는데 아저씨는 이미 다 팔렸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혹시라도 무슨 일 있으면 내가 바로 옆 방이니까 소리 질러."
내 걱정을 조금 덜어 주려는 듯 아저씨는 농담 삼아 말했다. 나는 별로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여행 후반엔 비교적 아무 데서나 잘 자는 나였지만 그때는 초반이라 더 겁이 났던 것 같다. 그날밤 나는 호신용 스프레이를 꼭 쥐고 잠을 잤다. 그러나 모기 때문에 두 시간이 채 되지 못해 일어나야 했다.
뗏기간이 시작되기 하루 전날 아침. 나는 더 이상 자전거를 산다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었다. 아저씨도 초반엔 주변 지인들에게 내 자전거를 사지 않겠냐고 권해도 보고 자신이 살 수 도 있겠다고 희망고문을 하더니 지금은 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는 그날도 아저씨에게 소식을 물었다. 아저씨는 내게 휴대폰을 가져오라고 하더니 시내에 자전거를 팔 수 있을 만한 거리를 알려줬다. 그래서 나는 직접 자전거를 팔러 시내로 나갔다.
막상 가보니 아저씨가 알려준 거리는 새 자전거를 파는 가게들이었다. 그런 곳에서 누가 중고 자전거를 사겠느냐만,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무 가게나 들어갔다. 그리고 번역기로 중고 자전거도 사냐고 물었으나 족족 주인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다 어느 자전거집 청년이 영어를 유창하게 하며 내게 도움을 주려는 듯했다. 원래는 호찌민에서 일하는 청년인데 명절이라 고향에 왔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회사 상사도 한국인이라며 나를 반가워했고 이후에 자전거를 파는 걸 도와주거나 도시 투어를 시켜주겠다며 내 연락처를 물었다. 그리고 지금은 자신이 도와줄 수 없으니 깸도(Cam do 전당포)를 가보라고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뗏기간이라 거의 사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말을 덧붙였다.
그렇게 나는 깸도 간판을 찾아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역시나 그 청년의 말 대로 아무도 사지 않으려고 했다. 어떤 가게 사장은 '뗏 홀리데이!(지금 명절기간이잖아!)'라며 내게 단호하게 소리쳤고, 또 다른 가게는 왜 자전거를 팔려고 하냐며 돈이 없어서 그렇다고 생각하는지 나를 측은히 바라보았다. 결국 나는 자전거를 팔 수 있는 가능성을 전혀 보지 못한 채 다시 숙소로 돌아와야 했다.
나는 지친 몰골로 집 앞에 나온 민아저씨에게하소연했다. 아저씨는 안타까운 미소를 지으며 밖에 세워둔 내 자전거를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 모습을 한쪽에 앉아 바라보던 남자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러시아 태생에 현재는 남아프리카공화국 국적이라는 그는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부터 머물고 있던 투숙객이었다. 심지어 그는 나와 같은 방이었지만 이제껏 말을 섞어본 적은 없었다. 그간에 그는 내게 별 관심이 없어 보였고 나는 그가 조금 무서웠다.
그는 여기에 오래 눌러살고 있는 사람 같았다. 그의 수납공안에는 여행가방이 아닌 옷걸이에 걸린 옷들이 빽빽했고 그 밑엔 맥주 한 박스가 놓여있었다. 그는 내 눈에 알코올 중독자 같아 보였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물대신 맥주를 따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별로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는데 막상 대면해 보니 그는헤벌쭉 웃고 있었다. 순수한 듯 보이지만 어딘가 사연이 많아 보이는 웃음이었다.
"왜 너는 자꾸 긴장해?"
그는 나를 꿰뚫어 보았다. 그는 야외 테이블에 마주 앉은 나에게 긴장할 필요 없다고 재차 말했다. 그 말이 나를 더 긴장하게 만들었다. 우선 내 영어가 그와 토론을 벌일 만한 실력이 되지 못할뿐더러 이 집안사람들이 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긴장을 안 하겠는가. 그럼에도 나는 더듬더듬 대화를 이어갔다. 한 편으론 여기서 오래 지낸듯한 그의 이야기가 궁금해서였다.
그는 이 동네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친다고 했다. 참으로 의외였다. 과연 학교에 갈 때도 지금처럼 맥주를 아침부터 마실까? 그리고 이곳에 살게 된 건 동거하던 여자친구와 헤어져 다른 집을 알아보느라 그렇다고 했다. 그렇게 서로에 대해서 물어보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내가 저녁에 자전거집 청년과 만날 수도 있다는 말을 꺼내게 됐다.
"흠, 그거 좀 위험한데. 왜 하필 낮에도 아니고 저녁에 만나자고 해? 뭐, 너의 선택이지만 내가 보기엔 안 가는 편이 낫겠어."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순간 몸이 굳어졌다.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그리고 가지 말아야겠다는 쪽으로 마음이 점점 기울었다.
"대신 이따 나랑 바다갈래? 내가 오토바이 테워 줄게. 저 뒤에 한 번도 여자를 태운적이 없어. 정말이야."
그가 옆에 세워진 파란 오토바이를 가리키며 은근히 제안했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나는 속으로 '너는 안 위험하냐!' 소리치고 싶었다. 더 이상 그와의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던 나는 좀 쉬어야겠다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복잡한 상황들을 잠재워 보려 눈을 감았다. 그러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결국 낮잠을 자는 대신 밖으로 나와 강가를 한참 동안 뛰었다.
밤새 나는 자전거를 못 팔아도 좋으니 이 동네를 떴으면 좋겠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다 문득 자전거를 기차에 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래서 다음날 눈을 뜨자마자 근처 기차역으로 향했다. 어김없이 내 얼굴에 모기 물린 자국이 하나 더 늘어있었다.
그날은 뗏 기간이 시작된 첫날이었다. 다행히 기차역까지 가는 길에 상점들이 많이 열려 있었고 오히려 장을 보는 사람들로 활기찬 분위기였다. 나는 충분히 다른 도시로 떠나도 되겠다는 기대감을 품고 역으로 힘껏 페달을 밟았다.
-기차에 자전거를 싣고 나트랑으로 갈 수 있습니까?
"예스!"
역 한쪽에 마련된 수화물 취급 사무실에서 직원이 나의 번역기를 보고 명쾌하게 대답했다. 나는 속으로 방방 뛰었다. 절차도 꽤 간단했으며 비용도 상하차 금액까지 합쳐 만원이 채 되지 않았다. 다만 수화물을 실을 수 있는 기차는 정해져 있었기에 자전거를 먼저 보내고 내가 뒤따라 가기로 했다. 나는 진즉 왜 이 생각을 못하고 거의 일주일을 이곳에서 고통받았던 것일까 스스로를 책망했다. 그렇게 기분 좋게 서류를 작성하는데 이번엔 그 직원이 번역기를 돌려 내게 내밀었다.
-오늘은 뗏 기간이에요. 그래서 오늘 저녁에 당신을 우리 집에 초대하고 싶어요. 불꽃놀이도 같이 보아요.
직원은 마른 개구리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정말 순수한 호의에서 온 말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미 이전에 내 경험들이 불신을 한 껏 키워놓은 터라 이제는 이런 제안이 슬슬 짜증이 나려고 했다. 나는 억지웃음으로 다른 약속이 있다고 했다.
이미 체크아웃 시간을 훌쩍 넘긴 저녁이었으나 민 아저씨는 내가 기차역에 가기 전까지 숙소에서 편히 쉬라고 배려해 주었다. 그리고 피곤하면 빈 침대를 써도 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빈 이층 침대에 커튼을 치고 누웠다. 그러자 공교롭게도 어제 말을 섞었던 장기툭숙객과 새로운 투숙객이 들어와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엿듣고 싶지 않았지만, 그리고 어차피 다 알아들을 수도 없었지만, 대화는 점점 흥미로운 방향으로 이어져 갔다.
먼저 장기 투숙객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까 같이 있던 여자 네 여자친구야?"
"아니, 우리 방금 여기서 만났는데?"
새 투숙객의 말에 장기 투숙객이 놀라는 듯한 소리를 냈다. 나도 소리 없이 입을 벌렸다. 분명히 아까 새 투숙객과 한 여자가 같은 침대에 앉아 몹시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언어를 가르쳐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어찌 된 영문인지 새 투숙객이 나에 대해서 말하는 듯했다.
"아 그 아시아인 직원?"
"아니, 그 친구는 여기 손님이야."
나는 피식 웃었다. 하루 종일 숙소에 붙어 있어서 인지 다들 나를 이 집 하우스 키퍼라로 생각했던 것 같았다.
그렇게 대화는 서로의 직업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장기투숙객의 직업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다른 말이 나왔다. 모든 서사를 세세히 이해할 순 없었으나 확실한 건 그가 전쟁에 참여했던 군인이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에 놀라 끼고 있던 헤드셋을 벗었다.
새 투숙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건 좀 개인적인 이야긴데... 사람 죽여봤어?"
장기 투숙객은 전쟁에서 죽인 사람 숫자를 꽤나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후로 많은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리다가 이제는 괜찮아졌다고 가벼운 투로 대답했다. 나는 그제야 그의 헤벌쭉한 웃음의 의미를 모두 헤아릴 수 있었다.
그러던 중에 아까 새 투숙객과 함께 있던 여자가 들어오더니 목소를 낮추고 말했다.
"지금 이층에 여자 한 명 있어. 그 아시아인."
갑자기 대화가 끊기고 고요함이 일었다. 사람들이 나가는 기척이 들리고 불이 꺼졌다.
민 아저씨는 나를 오토바이로 꽝응아이 역까지 태워다 주었다. 비록 약간 악몽을 꾼듯한 그곳에서의 시간이었지만, 아저씨의 여러 호의에 대한 감사와 나름의 정이 쌓여 있었다. 나는 얼마의 사례를 하려 했지만 아저씨는 끝내 받지 않았다. 그래서 아쉬운 마음에 갖고 있던 과자를 건네며 아들에게 전해달라고 했다.
"해피 뗏!"
작별인사를 마치고 혼자 역에 남아있는데 밤하늘에 폭죽이 빈약히 터지기 시작했다. 기차가 도착하니 고향에 돌아온 사람들과 그들을 맞이하는 가족들로 북적거렸다. 아마 지금쯤 우리 집도 삼삼오오 모여 있겠지. 나는 대기실 한편에 앉아 그들의 상봉을 지켜보았다.
보슬비가 내리는 늦은 밤에 내 기차가 도착했다. 한산한 객실 중간에 앉아 마구잡이로 쌓인 담요를 끌어다 덮었다. 그리고 이리저리 잠들 자세를 취해보는데 승무원이 내게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자신을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승무원을 따라간 곳은 침대칸이었다. 비록 여기저기 침구가 널브러진 지저분한 곳이었지만 잠을 설치게 하는 사람도 모기도 없었다. 그 덕에 나는 거기서 단잠에 들었다. 그 사이 기차는 나트랑으로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