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들 작가님을 뵐 때나 문자를 주고받을 때는 주의하는 편이다. 꼭 필요한 말 이외는 말을 삼가고 문자는 효율적으로 남기려 한다. 몹시 좋아하고 존경하지만 개인사를 공유하거나 깊은 관계를 맺고 싶은 욕심은 없다. 귀중한 시간을 빼앗고 싶지 않고, 작업에 방해되지 않기를 바라서다. 그래야 마음이 편안하고 흡족하다.
2020년 8월에 작가님 작업실에 들렀다. 판화 한 점과 사진 한 점을 구매하고 잠시 안부인사도 드릴 겸 해서였다. 간단한 인사말을 주고받으며 준비해 주신 차를 재빨리 마셨다. 일어나려 하는데 한 잔 더 마시라고 다시 잔을 채워 주셨다. 그 잔마저 금세 마셔버리고는 작가님과 함께 일어섰다. 들어온 통로를 따라 돌아 나오면서도 화실에 놓인 그림들을 구태여 보려 하지 않았다. 방해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얼른 작업실을 나올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멍하니 멈춰 서버렸다. 100호 크기의 그림이 놓인 이젤 앞이었다.
< 화천대유(황금해바라기태양), 이카루스의 성공 > S100호
황금빛 해바라기 태양에 시선이 사로잡혔다. SNS에 올라온 영상을 통해서 이미 봤던 그림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마주한 작품은 전혀 다른 그림이었다. 색감, 질감, 크기, 기운, 모든 게 달랐다. 처음 알았다. 그림에 압도당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쇳덩이 같은 무게감으로 태양의 황금빛이 짓누르는 듯 압도했다. 말을 잊고 멍하니 멈춰 서 있었다. 심지어 아직 완성되지 않은 미완의 작품이었다. “지금보다 더 좋아질 거예요.” 곁에 선 작가님의 말씀에 정신을 차리고 판화와 사진을 챙겨서 서둘러 화실을 나왔다.
작품 앞에서 멈칫했던 그 짧은 순간에 작가님은 내 표정에서 뭔가 읽어낸 모양이었다. 며칠쯤 지났을까, 팬들과 주로 소통하는 SNS에 그 그림의 주인이 나라고 말씀하셨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 강렬한 태양을 소장할 수 있는 행운이 내게 오다니!
100호는 너무 큰 그림이어서 얹혀살고 있는 부모님 집에 가져올 수가 없었다. 나중에 찾아가겠다고 작가님께 양해를 구하고 보관을 부탁했다. 얼마 뒤 이 작품은 6호 크기쯤 되는 작은 아트상품으로 제작되었다. 감사하게도 작가님께서는 이 아트상품을 선물로 보내주셨고, 드디어 내 방에 걸어 둘 수 있게 되었다.
이 작품의 제목은 ‘이카루스의 성공(화천대유)’이다. 이카루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새의 깃털을 밀랍으로 이어 붙여 날개를 만들고, 새처럼 날아올라 갇혔던 미궁에서 탈출한다. 자신의 능력에 자만한 이카루스는 ‘태양 가까이에서 날면 안 된다’는 아버지의 경고를 잊고 높이 날아오른다. 결국 밀랍은 녹고, 날개는 흩어지고, 이카루스는 추락하여 죽고 만다. 추락하여 죽은 이카루스를 작품의 제목으로 차용했는데, 왜 ‘이카루스의 실패’가 아니고 ‘이카루스의 성공’인가?
작가님은 당부한다. “이카루스는 태양에 가까이 다가가는 데 실패했죠. 이 그림을 소장한 사람은 성공할 수 있습니다. 불가능할 것만 같은 꿈을 꾸고, 그림에 가까이 다가가 자신만의 태양을 만지세요. 손이 태양에 닿을 때 작품 ‘이카루스의 성공’은 비로소 완성됩니다. 여러분의 성공을 응원합니다.”
출근하기 전에도,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도, 그림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다가가 손을 뻗고 눈을 감는다. 붓질 하나에 담긴 작가님의 삶, 철학, 이상, 순수, 열정을 손으로 더듬어 본다. 손끝에서 몸 안쪽까지 태양의 강렬한 기운이 전해질 때 ‘나의 성공’을 예감한다. 작품 ‘이카루스의 성공(화천대유)’을 감상하는 방법은 ‘그림을 만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