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 길을 걷다가, 눈에 띄는 옷을 입은 사람이 지나갔다. 화려한 색감의 옷이 마치 작은 무대의 주인공처럼 그를 감쌌다. 친구는 그 사람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말했다.
"나는 저런 사람은 관종 같아서 싫어."
가볍게 던진 한 마디였지만, 나는 그 속에 담긴 무언가가 궁금해졌다.
“왜?” 나는 물었다. 친구는 주저 없이 말했다. “관심을 주고 싶지 않으니까.” 친구의 대답은 단순해 보였지만, 그 안에는 무언가 설명되지 않은 감정이 숨어 있는 듯했다. 나는 한 번 더 물었다. “그럼, 만약 관심을 주고 싶은 사람이 저런 식으로 행동하면?” 친구는 잠시 멈칫하더니, “그건 상관없지,”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깨달았다. 그가 싫어하는 것은 사람 자체가 아니라, 내가 원하지 않는 대상에게 눈길을 강요받는 상황이라는 것을.
우리가 관종을 싫어한다는 말의 진짜 의미는 무엇일까? 단지 그들의 과장된 행동 때문일까? 아니면, 그 행동을 바라보게 되는 내 안의 무력감 때문일까? 우리는 사회 속에서 서로의 시선과 주목을 통해 자신을 확인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내가 선택하지 않은 대상에게 강제로 시선을 쏟아야 할 때, 우리의 내면은 미세하게 균열이 생긴다. 그것은 마치 잔잔한 호수에 던져진 작은 돌멩이처럼, 고요한 수면을 흔들어 놓는다.
한국 사회는 특히나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사회적 시선의 네트워크로 형성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군가의 시선과 평판은 우리를 무의식적으로 이끌고, 우리는 그것에 순응한다. 그러나 관종으로 불리는 사람들의 존재는 그 시선을 부자연스럽게 끌어당기고, 그로 인해 우리는 주체성을 상실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이는 단순한 짜증이나 피로감을 넘어, 자유를 잃었다는 무력감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관종을 향한 반감이 결국 우리 자신의 내면을 직시하는 거울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을 향한 반감 속에는 우리가 마주하고 싶지 않은, 그래서 숨겨놓은 자신의 빈자리가 존재한다. 우리가 그들의 행동에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그 행동이 우리에게 묻고 있는 어떤 질문들 때문이 아닐까? 나는 왜 그들에게 신경을 써야만 하는가? 내가 선택하지 않은 이 시선 속에서, 왜 나는 그토록 무력한가?
이 순간, 관종이라 불리는 존재들은 우리가 억눌러 놓은 감정과 결핍을 끌어올린다. 우리는 그들을 미워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그 미움의 대상이 그들 자체가 아니라, 그들을 보며 느끼게 되는 나 자신의 결핍과 상실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그날 이후로 사람들의 시선이 어디에 머무는지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지하철에서, 거리에서, 카페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작은 공간 안에서 끊임없이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했다. 그들은 타인의 눈길을 의식하면서도, 동시에 그 시선에서 벗어나고자 애쓰고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사람들은 관종이라고 여겨지는 행동을 보면서도, 무언가에 홀린 듯 시선을 떼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관심을 줄 필요가 없는 사람에게도 의식적으로 시선을 두는 모습 속에서 나는 깨달았다.
나 자신도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
‘관종’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그들을 저 멀리 타인의 영역으로 밀어내고 싶어 하지만, 그들 안에서 발견되는 것은 타인이 아니라, 우리 안의 상처이다. 그 상처는 때로는 무력감으로, 때로는 피로감으로, 혹은 불편함으로 표출된다. 관종을 비난하면서, 우리는 어쩌면 그들을 통해 드러나는 자신의 연약함을 부정하고 싶어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나는 문득 한 가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우리는 관종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보며 우리가 마주해야 하는 우리 자신의 상처를 싫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관종이라는 말 속에 담긴 사회적 의미는, 단지 타인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타인의 시선을 통해 자신을 규정하는 일종의 반영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관종을 이야기할 때마다, 타인과 나 사이의 관계를 묻는 질문 앞에 서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