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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세이 천사 Oct 20. 2023

사막을 걷는 낙타처럼

가슴속에 숨겨진 오아시스

멈춘 듯하다.

그러나, 쉼 없이 움직이는 중이다.

느릿느릿해서

걷지 않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사막 같은 세상에서

완주하는 비결은 쉬는 듯이 가는 것이다.

낙타는 졸리는 눈초리로

 비틀거리지 않고 앞으로 나간다.

등짐 같은 혹을 달고 긴 속눈썹으로

모래바람을 가리면서.

생존을 위해

사는 모습을 바꾼 것인지.

사막의 이정표로 선택된

조물주의 배려인지.

낙타가 사막을 횡단하는 그림만 봐도

마음이 터벅거린다.


나의 삶도

지팡이가 될만한 버팀목은 없다.

사는 데도 살아야 하는

갈증을 풀어 줄 만한 우물도 없다.

남편도, 자식도 동행자일 뿐이다.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도움을 청할만한 존재는 자신뿐이다.

더구나

스스로 터득한 지혜로

살아가야 한다.

다른 사람이 사는 방식을

흉내 낸다고 그 사람처럼 살게 되진 않는다.

내가 경험하고 알게 된 만큼

살아가야 할 뿐이다.

그럴 때마다  사막을

걷는 낙타의 걸음을 생각하게 된다.

로는 쉬는 듯이

천천히 살아보는 것이다.

낙타의 무릎으로 꿇어앉아

기도 하듯이 자신의 삶을

지켜보기도 해야 한다.

그런 순간이면

무엇 때문인지 모를

슬픔이 혹이 되어 솟아나곤 한다.

살아가기 위해 지고 가는

짐도 자신이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이다.

한 때는

약하게 보일까 봐 감춘 눈물도

흘려도 괜찮다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울지 마라, 울지 마라며

솟구치는 눈물을 삼키며

생각과 감정이

연소되기까지 기다려도 소용없다.

슬픔은 삼킬수록

가슴속을 흐르는 눈물이 되는 것이다.

그 눈물이 우물이 되어 있는 지금을

걷는 동안 철렁거리는

두레박소리가 들릴 때도 있다.

귀를 기울이면  목숨을 정화시키는

눈물에 담긴 말씀 같은 것이다.



오직 살아야 한다는 의지로

버티는 사이 명상을 시작했다.

출발점으로 되돌아가고 싶었을까.

어디까지 걸어왔는지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나는 무엇 때문인지? 누구 때문인지

어느 날, 태어났고,  결혼을 했다.

자식을 키우는 동안 짧았던 행복들.

남편과 살면서 경험한

여러 가지 사건 속에는 순간이지만

웃음도 있었다.

인생이라는 드라마는 원치 않아도

우여곡절이 필요했을까.

기대의 탑이 무너지는 소리.

실망과 배신 그리고 좌절이

희망을 뭉개곤 했다.

이렇게, 그렇게 살았구나.

고요 속에 펼쳐보면

살아온 것이 사막을 걸어온 길이다.

그러기에 낙타의 걸음을

지켜보게 된 것이다.

나는 나로부터 분리되어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연습을 하는 중이다.

삶에 대한 명상이 길어질수록

힘들어서 죽을 일은

생의 일기장에서 삭제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붓다가 왕궁을 떠나듯이

보이는 삶의 터전에서 떠나

나를 지켜보는 것은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기 위한 것이다.

살다 보면 좋은 날이 온다는 말은

신기루인지도 모른다.

사막을 횡단하는 동안

낙타가 신기루의 정체를 알아버린 것처럼.

희망이라는 신기루는

찾아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살면서 깨닫는 진리다.


사막 밑에는

지표면을 흐르는 물보다

많은 물이 흐르고 있다.

그 물을 볼 수 있는 눈은

목마른 길을 걸어 본 사람만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동안 껍데기 같은 것에

홀려 사는지도 모르고 살았다.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밑 빠진 구멍이나 다름없는

 육신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그래서 삶이 지치고 힘든지도 모른다.

마음이 행복해야 한다고 아무리

변명해도 보이는 것의 마력은

쉽게 나를 놓아주지 않았던 탓이다.


사는 것이 숙제 같지만

깨달음을 주는 스승이다.

살기 힘들다고 자살하는 것은

자신을 배신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살아내는 동안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하는 것은 행운이다.

숨결로 새어나가는 물방울조차

자신의 몸속으로 끌어들여

목마름을 이기는 낙타처럼.

살면서 삼켜버린 그 무엇이든

자신의 삶을 소생시키는

오아시스로 환원시킬 수만 있다면

그 생은 승리한 셈이다.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다.

오직 자신을 위해서다.

생의 갈증을 풀어주는 유일한

 오아시스는 사람의 가슴속에 있다.

삶에서 떠나 삶을 바라보듯이

자신에게서 벗어나

자신을 바라보는 동안

사막을 꽃길처럼 걸어가는

낙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삶과 죽음을 바라본

깨달음의 시선으로 살아 본다고

손해 볼 일도 없다.

그러는 동안, 끌려다닌 삶에서 해방되어

생을 향한 미소를 머금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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