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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게으름의 미학

여유롭게 살자 여유롭게

by 별나

내가 사는 볼리비아의 꼬로이꼬 지역은 꽤 느리게 굴러간다.

성격 급한 한국인인 나는 아직도 적응이 안 된다.

그들을 이해해보려고 하지만, 답답하다.

매번 약속 시간을 쉽게 어기는가 하면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갑자기 장난을 친다.

그들은 일을 하다가도 갑자기 다른 사람들과 신나게 떠든다.

같이 일하는 현지인들이 정신없이 바쁘게 일하는 모습을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물론 도시에 있는 사무실이라면 느낌이 꽤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는 시골, 꼬로이꼬다.

늘 한가한 공기가 풍긴다.

KakaoTalk_20230509_003709339.jpg 사무실에서 바라본 창 밖 풍경




그들을 보며 배운 점도 분명히 있다.

정신건강에 있어서는 이들이 한국인 보다 훨씬 건강할 것 같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하루 24시간을 쪼개 살고 바쁜 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나는 그랬다.

하루를 알차게 쓰는 것이 미덕이라고, 내게 주어진 시간은 돈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며 알차게 쓰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가끔 게을러질 때면 우울함이 몰려왔다.

주위 사람들 전부 바쁘게만 사는데 나는 퍼질러 누워서 쉬고만 있는 게 한심하게 느껴졌다.

한국에서의 나는 주로 바쁘고 할 일이 많을 때 더 행복했다.

바쁘게 살다가 가는 여행이나 쉼은 좋았지만, 마냥 게을러터져 며칠간 누워 있는 나는 싫었다.

쉬는 시간이 주어지면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내리 잠을 자거나, 드라마를 몰아봤고 생산적이지 못한 시간을 보낸 것을 자책했다.

열심히 노력하는 삶을 살지 않는 나는 본인에게 사랑받지 못했다.


얼마 전, 환경이 크게 바뀌니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깨닫게 되었다.

내가 게으름을 즐기게 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꼬로이꼬에 적응 완료해 버린 나는 어느새 세상 게을러져 있었다.

하지만 한국과는 다르게 괴롭지 않았다.

위기감을 느끼다가도 '그냥 이런 시기도 있는 거지'라는 생각으로 다시 게으름을 피우는 내게 놀랬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

나는 게으름을 피우는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를 몰아붙이고 곤두세우는 것 만이 잘 사는 것일까?

주변을 돌아보고 일도 여유 있게 하며 남들에게 잘 웃어주는 것이 더 큰 행복이 아닐까?

나와 같이 일하는 이들은 내가 느끼기에 게으르다.

약속 시간을 잘 지키지 않는 것은 기본이고, 연락을 해도 가끔은 잘 받지 않아 약속장소에서 사무실까지 오락가락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들은 예민함과는 거리가 멀다.

언제나 내게 똑같이 장난을 치고, 웬만한 일은 웃어넘긴다.

얼굴은 당연히 웃상이다.

그리고 항상 친절하다.

나는 그들의 이 모든 게 여유에서 나오는 친절이라고 생각한다.

본인이 심적으로 여유로우니 남들에게 들이댈 예민한 칼날이 없는 것이다.

내가 느낀 볼리비아의 사람들은 대체로 한국인들보다 순수하고 착했다.


나를 갉아 발전시키고 나를 성공시키면 그때는 행복할까?

어쩌면 이들처럼 주어진 세상에 만족한 채 여유롭게 사는 게 인생을 더 잘 사는 것이 아닐까?

생각의 크나큰 지각변동이었다.


하지만 곧 원래의 나로 돌아왔다.

나는 아직 한국인이었고 나의 이런 게으름은 더는 용납이 안 됐다.

온 집안을 청소하는 것을 시작으로 밀렸던 글을 썼고 공부를 했다.

지금도 생산적으로 살려고 하지만 한국에서의 생활보다 훨씬 여유로운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그들에게 여유에서 나오는 친절이란 무엇인지 몸소 배웠다.


그들은 한국인들보다 훨씬 스트레스가 적고 진정으로 웃을 줄 안다.

경쟁에 끝에 치닫으며 밤낮으로 힘들게 본인을 혹사시키지 않는다.

주어진 곳에서 부족하더라도 잘 살아내는 법을 안다.

한 편으로는 부럽지만, 나는 어쩔 수 없는 한국인기에 그들처럼 살기는 한계가 있을 것 같다.


이곳에와 얻은 가장 큰 수확이라고 한다면 경험일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 수확은 진정한 여유로움을 배웠다는 것이다.

정신적으로 여유로운 삶에 대해서 배웠다.

정신없이 바쁜 것이 좋은 것이라는 나의 믿음은 파괴되었다.

때로는 여유가, 게으름이 더 좋을 때도 있다.


내가 없을 이후에도 이들은 여유롭게 일할 것이고, 직급에 관계없이 친구 같은 분위기를 풍길 것이다.

그런 사무실의 분위기는 한국에 수출하고 싶을 만큼 부럽다.

어쩌면 비생산적일 수도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더 생산적이지 않을까?

이것이 내가 배운 게으름의 미학이다.

KakaoTalk_20230509_003650239.jpg 내가 일하는 사무실
KakaoTalk_20230509_003702519.jpg 가끔 들개도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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