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와 what의 역사
프롤로그
why와 what의 역사
인간의 문명은 대 전환기를 맞고 있다. 근대 이후 계속된 산업사회는 컴퓨터 네트워크와 데이터 기반의 온라인 플랫폼을 바탕으로 질적인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그중에 빠르게 생활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은 인공지능과 로봇이다.
이것은 인간의 반복되는 기계적 노동을 효율적으로 대신하며 인간을 돕는다. 나아가 많은 영역에서 인간의 일 job을 대체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에 따라 의도하든 아니든 간에, 인간은 역사 이래 오랫동안 계속되었던 ‘노동의 질곡’으로부터 해방을 맞고 있다. 이것은 인간 문명의 질적이고 구조적인 변화를 예고한다. 우리가 맞는 4차 산업혁명은 '인간의 노동'에 의지했던 전통 산업 사회의 마지막이자 새로운 사회의 시작일 수가 있다.
얼마 전 스마트폰을 앞세운 정보통신 혁명에 이어 인공지능의 등장은 인간 사회에 당혹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학자들이 이미 예견했던 바이다.
인공지능과 로봇이 대체하는 일은 주로 기계적 알고리즘을 가진 반복적인 일이다. 로봇은 물론, 고도한 지적 설계와 운영의 노하우를 필요로 하는 인공지능의 원리와 사용법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역사 이래 기계적 노동에 얽매여 왔던 인간의 삶의 본질을 보여준다. 기계적 노동이 얼마나 인간을 자기의 삶에서 소외시켜 왔는 지를 말하고 있다. 인간은 자기를 모방해 AI를 만들었지만, AI를 통해 자기를 알게 된 것이다.
아마도 인간은 오랫동안 노동의 굴레로부터 해방을 꿈꾸어 왔는지 모른다. 역사는 이 노동 해방의 길을 달려왔을 수도 있다. 한편으로 '자본' 내지 '권력'은 인간 보다 더 값싼 노동력을 얻기 위해 기술혁신을 이루어 온 것도 사실이다. 이것은 인간과 자본이 가졌던 본능적 열망이자 속성이다. 역사 속에 내재한 이 두 흐름은 마침내 오늘에 이르러 운명적 만남을 이루게 된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의 기술들은 이 모두를 용이하게 만든다. 아마도 네 차례에 걸친 산업혁명의 흐름은 이것을 위한 준비 과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많은 부분에서 명분에 머무르고 있을지라도, 엄연히 정치적 주권자이다. 동시에 생산에 대하여도 소비자로서 주권자이다. 생산이 없는 소비자도 존립할 수가 없지만, 소비자가 없는 생산도 존재할 수가 없다. 마침내 역사는 소비자와 생산자에게 이 양면적 딜레마에 대한 본질적 해법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것 또한 역사에서 이미 예견되고 경험된 일이다.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노동의 해방'을 맞게 되는 인간은 이제 무엇을 희망할 것인가? 또한 잉여 노동자로 변모한 인간은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변화는 위험이자 기회다. 이것은 어떤 기회인가?
우리 인간에게는 두 가지 세계가 있다. 내 안의 세계와 내 밖의 세계다. 우리는 이 두 세계에서 '기회'를 얻고 '위험'을 극복하며 삶을 이룬다. 물질문명에 익숙한 우리는 대부분의 ‘기회’를 내 밖에서 얻고 있다고 느낀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는 물질을 얻기 위한 외부 세계의 개척 과정이었다. 우리 노력의 대부분은 자연을 개척해 거기서 생계와 부를 얻는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의 '꿈'은 모두 밖을 바라보는 일이었다. 그 결과가 오늘의 모습이다. 우리의 교육 과정도 대부분 내 밖의 세계에 대해서만 가르쳤다. 왜 그랬을까?
역사 이래 '권력'은 국가를 세우고 산업사회를 이룬 뒤에 사회 구성원을 생산 자원으로 교육해 사용하기 위한 일관된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권력은 전통적으로 사회구성원 개인이 고유한 자기의 세계를 가지고 삶의 주체로 서는 '독립'을 기꺼워하지 않았다. 소수인 권력은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고 대항할 힘을 가질 다수를 늘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개방된 세계에서 개인이나 국가 모두 자기 주도적인 자율적 경쟁력을 가질 필요가 있게 되었다. 세금을 많이 낼 수 있는 똑똑한 개인이 필요한 세상이 된 것이다. 이를 위해서 국가는 출산과 육아와 교육을 위한 장기적인 양질의 투자가 필요한 것이다. 여기엔 단순히 '돈 money' 만이 아닌 인간과 역사와 국가 경영을 아우르는 책임 있는 정치 철학이 요구된다. 우리의 정치는 이것을 감당할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경제학 교과서에서 생산함수는 여전히 y=f(L, K)이다. L은 노동이고 K는 자본이다. 인간은 물질인 자본과 동류의 생산 자원으로 이해되어 왔던 것이다. 인간은 노동자원 L을 가진 생산의 수단으로 간주되어 온 것이다. 이것은 보이지 않게 우리의 상식과 문화를 이루며, 인간 스스로를 생산의 수단이자 도구로 또 시장적 상품으로 격하시켜 온 것이다.
인공지능과 로봇의 등장은 이러한 역사의 본질을 되돌아보게 한다. 이젠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르면서도 똑똑하고 값싼 인공지능과 로봇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당장 더 빨리 더 많은 세금을 낼 수가 있을지 모른다. 인간은 더 이상 '가장 효율적인 노동자원 L'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역사는 마침내 인간에게 오랜 '노동의 질곡'으로부터 해방을 주게 되었지만, 권력과 자본에게는 해방된 인간을 부양해야 할 책무와 굴레를 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가 인간과 권력과 자본, 결국은 인간 사회가 맞이한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 있다. 인간 사회는 '인간'이라는 근본 토대를 공유한 생태적 운명 공동체다. 이제 인간과 인간사회는 어디로부터 무엇을 시작해야 할 것인가?
노동의 굴레 벗은 인간이 해야 할 일은 오래도록 소외시켰던 자기를 찾아 자신이 되는 일이다. 밖에서만 가치를 찾지 말고 이제 안에서 가치를 찾고, 밖을 개척해 구하려 말고 내 안을 계발해 내가 되는 역사와 비즈니스를 펼치는 일이다. 이것은 인간이 지녔던 오랜 꿈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