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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on Ryoo 류구현 Oct 23. 2023

열린 사회의 적은 누구인가?

#역사 #칼포퍼 #토머스S쿤 #상식commonsense

열린 사회의 적은 누구인가?


열린 사회와 그 적들, 1945년 출간된 이 책을 다시 읽게 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프랑스 혁명 이후, 유럽의 선진사회 시민들은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며 오랫동안 계몽의 횃불을 높이 들며 근대정신 문명을 가꾸었다. 그러던 그들이 1-2차 세계대전 전후로 어떻게 파시즘과 나치즘 나아가 공산 체제를 신봉하는 전체주의를 받아들였던 것일까?

20세기 전반 과학 철학계의 스타였던 칼 포퍼 Sir Karl Raimund Popper(1902~1994)는 그 이유를 일찍이 인간 내면의 이중성에서 찾았다.

“인간은 자유를 원한다. 그러나 자유의 행사에는 필연적으로 책임에 따른다는 사실에 무거운 부담을 느낀다.”라고 보았다.

칼 포퍼는 인간은 책임지는 것이 싫어서 그 무게가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대신 자기보다 더 큰 존재인 지도자나 신 神이나 국가에 선택과 책임이라는 자기의 권한을 위임해 버리고는 그들에게 복종하며 그들과 자신을 동일시 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누구에게나 자기의 책임을 익숙한 ‘빅맨 Big man’에게 홀가분하게 맡기고 싶은 마음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다. 책임을 맡기는 대신 자신의 ‘자유와 권리’는 헌납해야 한다.

사실 이러한 '거래'는 이미 오래된 것이다. 역사 이래 오랫동안 이 일은 지도자나 신이나 국가라는 빅맨의 ‘노림수’였다. 세상사에 노회한 그들은 '남는 장사'를 하는 데도 능숙하다. 사실은 이것이 그들의 현실적 목적이었으니까.

칼 포퍼의 이해는 정확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세상에 대한 인간의 태생적 두려움은 스스로의 삶을 이들

'빅맨'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진/ 칼 포퍼 Karl Popper, 그의 깊은 통찰은 개인의 경험에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생각 된다. 그러나 과학은 또 다른 차원의 혁신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2차 세계대전에서는 무려 2천4백만 명의 군인이 사망하고, 민간인의 사망은 그 숫자의 두 배를 넘기는 것으로 추산할 정도이다.

대체 이런 전쟁의 광기는 어디서 온 것일까? 알다시피 2차 대전은 히틀러의 과대망상에서 시작된 것으로 이해한다. 순직하고 성실했던 독일 국민이 그들의 '빅맨'이던 히틀러에게 자신의 책임과 권한을 판단 없이 맡긴 결과였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이러한 사례는 그냥 일반적인 현상일 뿐이다. 오늘날까지도 영웅으로 칭송해 마지않는 진시황이나 한무제, 알렉산드로스나 카이사르는 모두 백성들의 책임과 권한을 위임 받아 수많은 정복 전쟁을 치른 '빅맨'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오늘날 남겨 놓은 것은 어떤 '영광'이었던가? 전쟁 속에 희생된 수많은 사람은 그 '영광'을 얼마나 나누어 가지고 있는가? 그런데 그 아수라의 비극을 아직도 영광으로 칭송하는 허깨비 같은 '이데올로기'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칼 포퍼에 따르면 자유를 위임한 사람들은 그런 상태를 안전이자 질서라고 여긴다. 따라서 통제받아 무기력해져 문제점을 비판하고 개선할 힘을 상실하게 되어 마침내 그 대가를 철저하게 치르게 되는 데, 이것이 닫힌사회의 모습이라고 말한다.

반면 열린 사회는 비판과 토론을 거친 합의로 문제를 풀어 간다. 그러기 위해선 사회적 담론 형성에 참여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고, 그 담론이 정책의 수정과 결정에 실제로 반영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이런 특징을 잘 보장해 주는 체제가 바로 자유민주주의 체제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무결점의 유토피아가 아니라 점진적인 사회적 성숙이 구현되는 합리적 사회이다. 큰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지만, 결국은 가장 효율적이고 빠른 성숙을 이루는 사회가 된다.


열린 사회의 적은 누구인가?

그런데 문제가 있을 때 그것을 단번에 해결하는 것이 조금씩 개선 하는 것보다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그러나 포퍼의 생각은 다르다. 지상에서 천국을 만들어 내는 시도는 늘 지옥을 만들어 냈다는 이유이다.

마르크스가 체제 자체를 단번에 바꾸려고 하다가 폭력과 전쟁과 자유의 억압 같은 엄청난 대가를 치러냈다는 것이다. 포퍼가 플라톤이나 헤겔과 마르크스를 열린 사회의 적으로 삼은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그들이 유토피아를 꿈꾸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피상적이고 편파적인 이해일 수가 있다. 하지만 그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가치는 손상되지 않는다. 이 책은 전체주의 한복판에서 이미 그것들의 몰락을 예견했고 그 예견은 적중했다.

그의 ‘비판적 합리성’이나 ‘점진적 사회 공학’ 같은 개념과 아이디어들은 이미 현대인에겐 상식처럼 되어 있다. 그 무엇보다, 책임지기 싫어 자유를 포기하면 언제든 전체주의 습격할 것이라는 그의 경고와, 열린 사회를 만드는 힘은 바로 우리 주권자 시민에게 있다는 그의 강조 자체만으로도 이 책은 현대의 고전, 나아가 미래의 고전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의 방법론은 이미 알려진 진실의 '연역'에 의존한 점진적 개선이었다. 이것은 곧이어 토머스 S 쿤 Thomas Samuel Kuhn(1922~1996)의 '과학 혁명의 구조'에서 정면으로 반격받는다. 즉 근본과 본질을 구하는 '귀납'에 의한 '패러다임 전환 paradigm shift'이 혁명적 변화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토머스 S 쿤은 패러다임 전환의 역사적 실재성을 입증하며 그 혁명적 파괴력을 강조했다. 이것은 뉴턴 고전역학의 세계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함께 양자역학의 세계로 '패러다임 전환'을 가져와, 현대의 전자 컴퓨터 공학 및 인공 지능과 핵물리학을 낳는 인류사적 과학 혁명으로 발전한 사실이다.

사진/ 토머스 쿤

이론 물리학자로 시작한 그는 더 큰 세계인 과학사와 과학 철학에 집중하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세기적 저작인 '과학혁명의 구조 Structure of the Scientific Revolution, 1962 '를 발표한다.


과학철학의 이 두 거장은 각기 연역과 귀납의 과학적 방법론의 유효성을 입증한 것이다. 개인과 사회와 역사가 이루는 '인식 세계'는 이 두 방법으로 개선과 개혁과 혁명의 형태로 자연스럽게 진화한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삶과 생활의 현장임을 알 수가 있다.

'열린 사회의 적'은 방법론이나 특정 개인의 주장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세계에 대해 각 개인의 마음이 세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즉 무지와 편견을 떨치고 얼마나 열려 있는가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을 극복하는 무기는 이미 현대인 각자의 손안에 쥐어져 있다. 온라인 플랫폼에 기반한 지식과 정보의 공유세계다. 각 개인이 공동체적 관심사에 함께 노력을 기울일 때, 사회는 더 크게 열리게 되며 그의 적들은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것이다.


과학 혁명의 구조

성숙한 자유민주주의를 위해서 우리는 어떤 현실적 노력이 필요할까?

1. 현재의 불투명한 정치 관행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2. 이를 바탕으로 정치 과정을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이 두 가지 일은 '시민을 위한 정치교육 과정'이라고 할 수가 있다. 여기에 인간사회의 미래가 있다. 현실 정치의 실상을 이해하고 개선 발전되고 있는 정치 과정을 늘 공유함으로써, 시민들의 정치의식과 판단 역량을 높이는 필수 과정이다.

이것은 현재의 정치가 가지는 불투명성과 예측 불가능성을 줄임으로써 정치를 대하는 유권자들에게 자신감을 높이고 두려움을 낮추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정치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자신감을 불어 넣는 시민들에 대한 정치교육은, 그들이 책임과 권리를 포기하지 않고 자신 있게 그것을 행사하도록 돕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회 정치적 판을 개선하며 다시 짜는 것이다. 이것은 개혁이자 혁명이며 유일한 희망이 될 것이다.


한국의 경제 발전은 민주주의의 발전에 있었음을 우리는 역사로 체험했다. 당면한 과제인 경제의 재도약과 정치 선진화 역시 민주주의의 발전에 있음을 알고 있다. 지금의 국가적 정체 상황은 기본적으로 '민주 정치 역량'의 부족에 기인하는 것으로 볼 수가 있다.

돌이켜 보면 과거 경제 도약기에 시민을 위한 '제도적 민주주의 교육과정'을 정립하지 못한 것은 큰 실책이었다고 본다. 우리의 '장점'인 조기 교육과 선행 학습은 먼저 민주주의 교육에서 시작되어야 했다. 후회할 시간이 없으며 지금이라도 시작하여야 한다. 늦었다고 여길 때가 가장 빠를 때이지 않은가?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에게 그들이 가진 책무와 권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먼저 가르치는 교육이 대학 입시 보다 앞서는 한국의 미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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