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은 아직도 '시간'에 대해 본질적이고 존재론적인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의외의 상황이다. 물리학에서 시간은 절대 변수다. 이것에 대해 아직도 명백한 정의를 내리지 못하는 사정은 여러 가지다. 그러나 과학이 시간에 대한 관계론적 분석만을 고수하고 있는 것은 무책임하면서도 비겁하다.
물리학이 진정한 존재론적 과학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시간 분석에 몰두하는 관계론적 틀을 벗어나야 가능하다.
1. 양자론적 세계관은 존재는 질량에너지로 정의한다. 시간은 질량도 없고 에너지도 없는 계산값이다. 쉽게 말해 질량체 운동의 그림자이다. 시간은 언제나 현재로 있다. 과거 시간과 미래 시간은 있지 않다.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예측에 시간은 인간이 필요할 때만 가져다 사용하는 도구로 충분하다. 즉 과거와 미래는 자연의 본질 속에는 없다. 흐르는 시간이란 인간이 만든 가상일 뿐이다.
2. 과학에는 속도가 거리와 시간의 관계에서만 측정된다는 확립된 믿음이 있다. 즉 v=s/t, 속도는 공간/시간이다. 이것이 시간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라고 믿는다. 이것은 진실인가? 그러나 속도는 인간의 요구에 따른 측정 방법일 뿐, 속도 자체는 자연 고유의 속성은 아니다. 속도의 증감은 질량체의 필요에 따른 운동일 뿐이다.
3. 엔트로피 법칙이나 생명의 연속성을 들어 시간의 실재성으로 주장하지만, 이것은 물질과 생명의 속성이지 시간의 속성은 아니다.
4. 에너지를 고유 속성으로 가지는 우주 자연은 '에너지 보존 법칙'에 따라 가장 효율적으로 에너지를 사용한다. 과거에 에너지를 발산하거나 오지 않는 미래에 들떠 에너지를 낭비할 이유를 갖지 않는다. 우주 자연은 늘 현재에 있음으로써 늘 충만하다.
5. 물리학이 주된 기준으로 삼고 있는 '시간'에 대한 엄밀하고 과학적 정의를 아직도 주저한다면 비겁한 일이 된다. 이것은 과학이 아직도 관계론에 매몰되어 있는 현실을 드러낸다. 시간에 관한 실체적 인식의 부족을 인정하는 일이다. 과학의 소임으로서 본질의 추구를 외면하는 일이다.
6. 인간의 의식이 시간에 얽매이기 쉬운 것은 시간이 주는 계산의 편리성도 있지만, 현재를 직면하지 못하는 두려움으로 과거에 대한 향수와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에 의존하고 싶은 욕구도 한몫한다.
7. 인간 개인과 사회와 역사가 가지는 착오와 비능률은 사회 문화 종교의 다양성에서 설명되고도 있지만, 그 논의의 귀결점에는 공통적으로 물리적 시간 개념의 부정확성이 존재한다. 즉 현재를 직면하지 못하고 현재에 살지 못하는 여러 가지 개인적 사회적 문화적 속성들이 현재의 진실을 오도하거나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현재에 속해 있는 시간은 인간 개인이 가지고 있는 사실상 유일한 소유다. 이것을 과거나 미래로 끌고 가 이용하려는 자발적 또는 타율적 욕망이 인간에게는 있다. 이를 통해 누구인가 이익을 볼 수가 있는 구조가 인간 세계에는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분명 음모론적이지만 진실임을 직관할 수가 있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궁극적 지혜의 하나는 이를 분명히 이해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