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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on Ryoo 류구현 Feb 27. 2023

why와 what의 역사 4. 언어, 문명의 그릇


#역사

why와 what의 역사

4. 언어, 문명의 그릇


인간이 만드는 도구는 먼저 언어로 디자인된다. 도구는 그 특징을 대표할만한 이름을 얻은 뒤에 비로소 탄생한다. 사물은 언어로 잉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어는 문명을 담는 그릇이라 할 수가 있다.

인간이 진화하고 문명이 자라나는 모습을 오늘날도 확인할 수 있다면 그게 가능할까? 가령, 어린아이가 첫 돌 때쯤 스스로 일어나 걸음마를 배우고, 두 돌 때쯤 되어 그에게 가장 친숙한 것부터 그 이름을 하나씩 붙여가며 말하는 모습에서, 옛 인류의 진화 과정의 일단을 볼 수가 있지 않을까?


언어는 이처럼 맨 처음 발견한 낯선 것, 예컨대 대상, 생각, 마음들에 대하여 하나씩 이름을 붙이면서 생겨났을 것이다.

세상을 처음 만난 어린아이에게 언어란 무엇일까? 호기심 많은 그에겐 세계에 대한 설명이다. 세상에 무엇이 있으며 그것은 자기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 지에 대한 안내이다. 또 그것은 다른 것과 어떻게 구분되는 지를 알려주는 이름표이다.

우리가 가진 언어는 그에게 이것을 충분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일까? 그에게 세상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고 있는 것일까?



언어는 사실을 담기엔 성긴 그릇이다. 어린아이의 왕성한 호기심을 충족하기엔 너무 작은 크기일 수도 있다. 어린아이의 호기심이란 알 수 없는 대상이 나에게 우호적인지 아닌지, 기회인지 위험인지를 알고 싶은 마음이다.

우리는 대개 대상을 알지 못하면 두려워진다. 그것이 언제 위험으로 변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생존이 달린 위험과 기회에 우리는 민감하다. 어린아이는 언어가 그것을 알려주리라 기대한다. 그러나 우리의 언어는 이를 충분히 말하지 않는다. 자주 감추고 속이기까지 한다.

언어는 본래 진리를 담고자 했다. '언어 language'의 어원인 '로고스 logos'는 이 사실을 말해 준다. 그러나 언어는 너무 성긴 그릇이라 진리를 온전히 담지 못한다. 진리는 너무 크고 언어는 너무 작다. 많은 부분 제한되고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주 오염된다.
더구나 이것은 실체가 아니라 표상이며 관념일 뿐인, 그림자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그림자에 늘 붙잡혀 산다.

언어가 활력을 잃을 때는 고정관념이 된다. 권력은 영리하게도 언어의 장점과 약점을 잘 이용한다. 자기들의 이익에 맞게 진리를 감추고 자유로운 영혼을 그들이 만든 틀 속에 가두는 도구로 쓰려 한다. 언어는 양날의 검처럼 진리를 구현하는 도구이면서도, 거짓을 옹호하고 확장하는 수단이 된다.
우리의 삶은 언어가 만든 시공간을 자주 부유한다. 언어는 자유이면서 속박이 된다. 끊임없이 관념의 틀에다 우리를 묶으려 한다. 그래서 아차 하는 순간 낚인다. 이 불완전한 도구에 (어이없게도) 우리는 쉽게 상처받는다.


삶은 먼저 자기와의 대화다. 세상을 처음 만난 어린아이가 그랬듯이 삶은 언어로 시작한다. 언어를 통해 자기를 알고, 자기를 앎으로써 세상을 알게 된다. 언어의 주인이 삶의 주인이 된다. 그러다 마침내 언어가 주인이 돼버린다. 주객이 전도되는 순간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성기고 불완전한 언어로 자기와 세계를 이해하고, 이것을 토대로 이웃과 대화를 해야 한다. 가장 손쉬운 소통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종의 운명이다.
삶이 가지는 부조화의 첫째는 내가 아닌 언어가 주인 행세를 하는 일이다. 언어에 이끌려 스스로를 속박하는 '자승자박'이다. 그다음은 언어가 지닌 불완전성에 대한 불충분한 이해이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길 것인가? 확실한 방법은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다. 진실과 직면하는 일이다. 우리가 가지는 문제는 문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보지 못하거나 회피하는 데 있다. 문제는 '직면'하면 그 속에 이미 답이 보인다. 문제를 직면할 때 우리는 얼마든 대안을 만들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문명의 역사였다.

모두가 문제를 공유하면 이미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연처럼 주어진 조건이며, 그것을 극복할 지혜를 얻게 된다. 문제가 문제가 되는 것은 감춰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언어를 대하는 방식과 언어의 불완전함을 모두가 안다면, 오해와 다툼의 절반 이상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나머지 절반은 관용하며 보충하는 공간에서 대부분 해결될 일이다.
 무지를 자각하고 겸손하면 우리는 스스로 밝아지게 된다. 이처럼 스스로 밝아지는 것을 예부터 '명明'이라고 했다. 소크라테스는 이것이 우리가 지닌 유일하지만 큰 지혜라고 말한다.
언어는 몸의 요구 needs를 표현하는 신호 signal이며 그림자일 뿐이다. 몸은 순수하고 소박하므로 언어 또한 소박하고 순순한 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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