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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on Ryoo 류구현 Jul 20. 2023

Why와 What의 역사 25. 동아시아 인본주의 문명

동아시아 인본주의 문명의 개화


#인문학 #역사 #정치 #동아시아인본주의


Why와 What의 역사

25. 동아시아 인본주의 문명의 개화


동아시아의 중원中原은 기름진 황하의 중류지역에 자리 잡아 일찍부터 농경이 발달하여 안정되고 풍요한 경제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드넓은 화북평원과 황하는 중원의 문명에겐 천혜의 축복이었다. 이것은 그리스 세계가 척박한 자연환경에서 출발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문명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었다.

 BC1600경, 상商나라는 고대 초기 국가의 일반적인 모습처럼 신정神政 일체의 국가로 건국되었다. 상나라는 과학적 지식이 부족해 불가피하게 점술에 의지하여 주요한 국가 의사를 결정해야 했고, 주술에 의지하여 실행해야 했던 비능률적이고 보수적 사회시스템을 지니고 있었다. 또 농업혁명에 따라 늘어난 과잉인구의 해소는 신神을 위한 인신 공양이나 순장 명목의 '희생'으로 해결해야 하는 비인도적이고 비능률적인 문화를 가지기도 했다. 주 1)

한편 상商나라 서쪽의 제후국이던  주周나라는 서역으로부터 앞선 문물을 받아들이기 좋은 위치에 있었다. 그들은 발달된 청동기와 철기 문명을 남 먼저 도입해 경작지를 넓히고 농축업의 생산성을 높였으며, 늘어난 인구를 군사력으로 활용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등 진보적이고 합리적인 국가 체제를 갖추어 중원의 주도권을 잡게 된다. 

BC 1046년, 마침내 문명과 체제에서 앞선 주周나라는 상나라를 무너뜨리고 중원의 패권을 쥐게 된다. 그들은 신탁神託에 의존하던 신정일체의 비능률을 버리고 인본주의 국가를 탄생시켰다. 과학적인 사유를 토대로 본격적인 인문주의 문명을 수립한 것이다. 이것이 주나라가 고전적인 이상적 정치체제로 이해된 이유일 것이다. 

주 1) 인신 공양과 순장에 관한 다양한 해석이 있다. 그중에는 16세기 초까지 중남미의 아즈텍 문명 등에 있었던 인신 공양 풍습과 20세기 중반까지 중국에 실재했던 '인육 매매'에서 보듯 단순히 부족한 단백질 보충 목적이거나, 원시적 미신 또는 정적의 제거나 정권 안정 수단 등의 이유도 있을 것이다.

사진 / 대나무로 만든 책 죽간

중원의 전래 삼황오제의 전설은 농경과 목축, 직조와 의술, 군사와 정치 등 기초적 문명을 수립하는 과정을 말해 주고 있다. 이러한 합리정신을 이어받아 발전시킨 초기 주나라는 자립 능력을 가진 소국과민小國寡民(작은 나라 적은 국민)의 제후국들이 자유경쟁을 통하여 더 나은 국가시스템으로 발전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주나라로 대표될 수 있는 동아시아의 인본주의 문명은 그리스 보다 1,000년을 앞선 인간 문명의 역사적 진전이었다. 동아시아의 문명적 선진성은 근대 후반인 18세기까지 이어진다. 서구가 동아시아 문명을 앞선 것은 긴 인류사에서 겨우 250년 남짓에 불과한 일이다.

그 바탕엔 인본 정치를 이루기 위해 오랫동안 축적한 경험과 학술적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것은 경험 가운데 실증된 학문적 체계였다. 우리가 아는 '제자백가' 보다 훨씬 앞서 수준 높은 문명의 주춧돌을 이미 놓았던 셈이다.

태공망 강상姜尙

제자백가는 그 원류를 따라 올라가면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을 도와 주周나라를 세운 태공망 강상姜尙 (강태공: BC1211~BC1072)에 이른다.
그는 젊어서 학문에 너무 빠져 와이프에게 이혼까지 당하게 되었는 데, 70세가 넘도록 백수로 지내다 위수 낚시터에서 만난 문왕文王에 의해 발탁되어 주나라의 태사(왕의 스승 겸 권한대행)가 된다. 그때쯤 그는 이미 우주자연과 인간사에 대한 모든 이치를 통달한 전설적 대학자이자 정치가가 되어 있었다.

그림/ 문왕文王의 조부 고공단보古公亶父(태공太公)가 꿈에서라도 바라던 인물이 비로소 나타났다 하여 태공망太公望이라고 불렸던 강상姜尙. 그는 80세가 되어 태사로 등용된다.



그는 주나라 문왕에서 시작하여 무왕, 성왕成王, 강왕康王 4대에 걸쳐 태사太師를 지냈으며, 딸은 주 무왕의 왕후가 되었다. 주나라 건국 후 그는 후작으로 봉해져 산동 지방 제齊나라의 시조가 된다.
강상은 중원 역사상 최고最古의 '테크노크라트'이자 정치가이며 군사 책략가로 평가된다. 그는 자연철학을 기반으로 한 음양가와 도가는 물론, 유가와 법가, 병가를 아우르는 넓고 깊은 학문 세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후대에 이르러서 그는 제자백가의 종사宗師라 불리게 된다. 전국시대에 제자백가를 배출하며 학문의 고전기를 이루었던 제齊나라 직하학궁의 기틀은 그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동아시아 인본주의 문명의 터전

제나라는 산둥반도를 중심으로 바다와 접해 일찍이 상업과 해외 무역이 발전하여 개방적이고 활달한 기질을 가진 문화국가였다. 한편 그와 경쟁한 진나라는 보수적 농경 국가로 법치를 바탕으로 부국강병을 이루어 후일 천하 통일을 도모하게 된다. 
이것은 비숫한 시기 그리스 세계의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발전과정과 너무 닮아 있어 놀랍다. 

동아시아 고대 문명은 상이한 두 문화가 어울려 다양성을 이루며 꽃피었다. 춘추 전국 시대 550년은 피비린내 나는 전란 가운데서도, 인본주의 문명을 이루기 위해 치열한 모색과 탐구가 이어진 도전의 역정이기도 했다. 여기서 보편성을 갖춘 인문 사회 정치적 명제들이 체계화된다. 이것을 종합한 첫 결실이 '관자管子'라고 할 수가 있다. 그 주인공은 제나라의 명재상 관중管仲과 그의 후학들이었다.


재상 관중管仲

관중의 이름은 이오夷吾, 자는 중仲이다. 그래서 보통 관중管仲이라고 불린다. 그가 출생한 연도는 대략 BC 725년이며 BC 645년에 세상을 떠났다고 추정된다. 태공망 강상姜尙(BC1211~BC1072)으로 부터 400년 뒤에, 공자(BC551~ BC479)보다는 약 200년 앞서 살았던 사람이다.

관중은 귀족의 후예였으나, 그가 태어났을 때는 이미 몰락한 빈곤한 집안이어서 청년 시절을 밑바닥 생활 현장에서 보낼 수밖에 없었다. 생계를 위해서 중원 각지를 떠돌아다니며 장사를 해야 했다. 이것은 중원 각국의 지리와 풍속을 익히고 세상의 이치를 배우는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 청년 장사꾼 관중은 총명하고 배우기를 좋아했으며 큰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생활 현장 가운데서 고금의 학문을 섭렵하며 무예를 익히고 병법을 연구했다.

그는 일찍 주요 나라의 지형, 민속, 경제, 정치 문화를 기본적 소양으로 갖출 수가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최고 국가 경연자로서 재상을 역임하며 제나라를 중원 제국 중 가장 활력 있고 부강한 국가로 성장시킬 수가 있었다. 그는 현실정치에서 쌓은 경험과 방법론을 토대로 오늘날에 보아도 손색이 없는 탁월한 국가 경영론인 '관자管子'를 쓸 수가 있었다. 그의 후학들은 이것을 더욱 확충해 발전시키게 된다.

BC 7세기, 중원의 주도권을 다투며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동아시아의 상황은 오늘날 세계와 놀랍도록 닮아 있다. 그가 펼쳤던 경영철학은 2,6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의 공감을 자아 내고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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