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 1. 계절의 시작

1장. 계절의 시작

by lee

1.

말 못 하는 상황은 매우 답답하다. ,30분 동안 말하지않기, 같은 것이 벌칙이 될 수 있는 건, 침묵이란 그만큼 힘든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말 없는 하루는 고요하다. 지금 직장을 갖기 전, 나는 하루 대부분을 껍질 속 달팽이 마냥 혼자 집 안에 파묻혀 지냈다. 말할 사람도 없었지만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매우 편안했다. 나는 말이 필요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

이런 나의 직업은 아이러니하게도 언어치료사다.

언어치료사의 하루는 말에서 말로 끝난다. 센터를 찾는 환자들의 공통점은 말을 잘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구조적인 문제이든 혹은 심리적인 문제이든. 말하고 싶다는 의지와 관계없이. 그 점에서 사실 나는 내 환자들과 다를 것이 없다. 그저 학습된 사회화로 때와 장소에 적절한 구사를 할 뿐.

상대방의 입을 열기 위해 수 배, 수십 배의 말을 해야 하는 직업. 아이러니했다. 말할 생각이 없는 환자와 말하기를 싫어하는 언어치료사라니. 서로의 역할이 바뀔 수 있다면 그 얼마나 균형 있을까.

오전의 마지막 세션이 끝났다. 하루에 적어도 다섯, 많게는 예닐곱 명의 환자를 상대하며 주어지는 쉬는 시간은 세션과 세션 사이, 그리고 점심시간뿐이다. 오롯이 휴식하고 싶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사무실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뒷목이 뻐근해지며 관자놀이에 압통이 느껴졌다. 편두통이었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계절이면 으레 편두통을 앓았다. 의사는 예민한 사람들은 기압 차이 때문에 두통을 느낄 수도 있지만, 병은 아니니 스스로 다스려 보라는 처방을 내렸다.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있어도 창문으로 스미는 볕에서 봄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복지관에서 일한 지 두 계절이 지나가고 있었다.


복지관 면접이 있던 날이었다. 전날부터 내리던 눈은 발이 푹 빠질 만큼 깊게 쌓여있었다. 하늘에서는 여전히 함박 눈송이가 쏟아지고 있었다. 하늘에서 서서히 형체를 드러내며 땅으로 추락하는 눈송이들이 주먹처럼 아프게 느껴졌다.


‘하필 이런 날 면접이야.’


면접은 오후 두 시. 투덜거리면서도 늦지 않기 위해 도착 예정 시간보다 일찍 집을 나섰다. 하지만 배차간격 8분의 버스는 20분이 넘도록 오지 않았다. 시계를 봤다. 12시 40분. 복지관까지는 차로 30분 거리. 아직 시간의 여유가 있었지만 택시를 타기로 마음을 바꿨다.

하지만 좀처럼 배차가 떨어지지가 않았다. 하늘이 하얗도록 눈은 그칠 기미가 없었고, 나리는 눈발에 까만 코트가 하얗게 덮여갔다.


‘가지말까.’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습관이었다. 벅찬 상황이 오면 도망가버리는. 대면하고 싶지 않는 상황은 눈 감아버리는. 하지만 이번엔 그럴 수 없었다. 달랑달랑한 은행잔고가 회피보다 무서웠으니까.

한참을 시도한 끝에 어렵게 잡은 택시에 올라탔다.


“00 복지관이요. 몇 시쯤에 도착할까요?”

“지금 엄청나게 막힐 텐데…… 몇 시까지 가셔야 하는데?”


택시 운전사가 백미러로 뒷자석에 앉은 나와 눈을 맞추며 물었다.


“1시 반까지 가능할까요?”

“날아가면 모를까 한 시 반까진 못가요.”

‘십 분 전에만 도착해도……’


가고 싶지 않은 마음과 늦고 싶지 않은 마음. 나는 지금 그 면접을 보고 싶은 것일까 보고 싶지 않은 것일까.

절대 그 시간에는 못 간다 했지만 그럼에도 택시기사 아저씨는 어떻게든 시간을 맞춰주려는 듯 차선을 여러 번 바꿔가며 속도를 내보려 했다. 하지만 와이퍼로 감당할 수 없을만큼 눈송이는 굵어졌고 가리는 시야만큼 도로는 뚫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1시 40분, 45분, 50분. 시간은 배려없이 정확히 흘러가고 있었다. 지도 앱을 켜고 복지관 위치를 확인했다. 도보 500m 거리. 택시 안에서 마냥 기다리기보다 걷기로 마음먹었다.


“여기서 내릴게요.”


택시에서 내린 나는 잰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왼손엔 지도앱을 켜고 오른손으론 외투의 깃을 꼭 쥐고. 빙판이 되어버린 길에 구두굽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저 앞에 빨간 건물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14:00’


정각 두 시였다. 예정된 면접 시간.

나에겐 두 개의 선택지가 있었다. 첫 번째, 버스든 택시든 지하철이든 무엇이든 타고 이 불편함에서 빠져나가는 것. 두 번째, 저 빨간 건물 안으로 들어가 늦어서 죄송하다 면접 기회를 달라 청하는 것.

나의 마음은 전자를 향하고 있었다. 싫었다. 피하고 싶었다. 이 모든 불편함을.


“아니, 어떻게 이 날씨에 오셨어요?”


나는 어느새 건물에 당도했었다. 면접에 온 것이 뜻밖이라는 듯 누군가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작은 체구에 적당히 짧은 단발머리, 중년으로 보이는 여성이었다. 현관에 걸려있는 거울에 내 모습이 비쳤다. 방금 감고 나온 듯 젖은 머리카락, 두껍게 눈 쌓인 코드.


“오늘 면접……”

“대설 주의보라 면접 일정 연기했는데 문자 못 보셨어요?”


머리 속이 멍해졌다. 아침부터 부산을 떨었지만 휴대폰을 확인하지 않았다. 메시지 함에는 스팸이나 광고로 늘 몇 개의 숫자가 찍혀있었기에. 그보다도 나에게 문자로 연락할만한 그런 사람은 없었으니까. 주머니에 손을 넣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새 메시지 12’


00캐피탈, --통신사, 00은행…...조금 더 내려간 곳에 문자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00복지관에서 알려 드립니다. 대설 주의보 때문에 예정된 면접이 취소 되었습니다. 다음 면접 일정은 00월 00일…’


‘이렇게 될 거였어.’

‘택시가 안 잡힐 때 돌아갔어야 했어.’


알림을 확인하지 않은 것보다, 이 자리에 온 것이 후회되었다. 도망이 항상 나쁜 것이 아니라고, 나를 납득시키고 싶었다.


“이렇게 오셨는데 괜찮으시면 오늘 면접 보시죠.”


사무실 한구석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너무 젖으셨는데, 몸 좀 말리시고 30분 뒤에 면접 시작하겠습니다.”


내가 정신을 차린 것은 복도 자판기 앞이었다. 어떻게 자리를 옮겼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내 앞에는 모락모락 김을 내고 있는 커피를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도.

면접의 기회를 준 그 사람은 누구였을까? 오늘 걸음을 헛되지 않게 해준 그의 친절에 나는 목례라도 했을까? 이 앞에 놓인 이 커피는 누가 두고간 것일까?

길게 연결된 복지관의 복도는 통 창문이었다. 길게 이어진 통 창문을 채우게 나리는 눈발은 거장의 작품 같기도 했고, 영화관 스크린처럼 보이기도 했다. 방금 전까지 그 속에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눈발을 보며 소름이 돋았다. 방금 전 추위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억 속에 가장 차가웠던 그 날, 그날의 눈발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날카로운 기억을 떨쳐버리려 자판기 커피를 들이켰다.


“김지영 씨”


말쑥한 키가 큰 남자가 이름을 불렀다. 종이컵의 커피는 어느새 식어있었다. 나는 뜨거운 김이 날라간 미지근한 커피를 한 입에 털어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를 따라간 곳에는 급조한 듯한 면접장이 준비되어 있었다. 창문 앞에 긴 책상 하나, 그리고 의자 세 개가 놓여있었고 책상과 3미터쯤 떨어진 곳에도 의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면접관은 총 세 명이었다. 삼십대 중반 정도의 남자와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편안한 인상의 남자, 그리고 짧은 머리에 컬을 많이 넣은 화려한 인상의 중년의 여성이었다.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2010년 졸업으로 되어있네요? 졸업이 꽤 오래 전인데 일을 오래 쉬셨나 봐요?”


서류에 펜으로 무언가를 쓰며 중년의 여성이 물었다.


“네, 졸업과 동시에 결혼해서……”


이미 뱉어진 말에 후회했다. 그냥 심플하게 ,네, 라고 대답했어도 되는 것이었고, 다른 사유를 들었어도 되는 것이었다.


“결혼하고는 일을 쉬신 건가요?”


끝내지 못한 답변에 남자가 재차 물었다.


“결혼과 동시에 이민을 하였었고, 올해 돌아왔습니다.”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 이어 대답했다.


“이혼하고 돌아왔습니다.”


서류만 쳐다보던 세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면접 때 굳이 굳이 이 이야기를 꺼낼 생각은 없었지만, 결혼했다는 사실을 말한 만큼 이혼사실도 빼놓을 수 없는 화두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생활은 저희 채용 조건과 무관합니다.”


중년의 여성이 담담히 말했다.


“실무경력이 짧은 점은 아쉽네요.”

‘안 되겠구나.’


나쁜 일이 벌어지는 것보다 나쁜 것은, 나쁜 일이 벌어지기 전의 기분이다. 맥이 풀렸다. 실망감이라기보다는 ,그럼 그렇지, 라는 기분이었다. 닥치지 않은 불운에 불안해하기보다 불운의 형체를 마주하는 것이 나았다. 오히려 긴장이 풀렸다.

세 면접관 뒤의 통창문으로 시선이 갔다. 그 사이 바깥은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겨울의 시간은 여름보다 짧다. 무채색의 세상은 짙은 어둠이 되어있었고 눈송이는 더욱 선명히 흰 빛으로 날리고 있었다.

이후 질문들은 훨씬 쉽게 대답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복지관 업무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지, 실제 경력은 어느 정도인지, 유동적인 근무시간이 가능한지 등등.


“다른 질문 더 있으세요?”


중년의 여성이 다른 면접관들에게 물었다. 둘은 대답이 없었다.


“그럼 이만 마치도록 하죠. 눈 오는 날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면접을 마무리하면서야 그 여성이 관장이라는 것을 알았다. 복지관 여자 관장은 드문 일은 아니었지만 그것을 염두에 두지 못했던, 덜렁 이력서만 내놓고 기본적인 정보도 알아보지 않은 것이 뒤늦게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나는 채용 합격 문자를 받았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면접일도 제대로 알지 못했고, 충분한 경력도 없었고, 면접 당시의 분위도 역시 그저 그랬다고 생각했기에. 그 때문에 합격 통보는 의외였고, 그랬기에 기뻤다. 지금의 답보 상태에서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시작처럼.

시작.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살짝 두근거리는 마음이 들 정도로. 기분 좋은 설렘에서 이전 날의 봄이 떠올랐다.

영원 같은 봄날이 영원하지 않은 것처럼, 끝없는 듯한 겨울도 춥기만 한 것은 아니다. 어디엔가 움트고 있는,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다음 계절이 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