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 2. 봄, 누구에게나

2. 봄, 누구에게나

by lee

2. 봄, 누구에게나

2010년 봄이었다. 봄. 단어만으로도 새로워지는, 설레지는 계절. 겨울이 추울수록 봄을 기다리게 되고, 여름이 더울수록 봄을 그리워한다. 계절들의 처지에서 봄만큼 질투받는 계절이 또 있을까?


그 봄, 나는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했다. 사회복지학과가 속한 사회대는 경상대와 법대가 앞뒤로 나란히 도미노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걸어서도 3분, 뛰어서는 일 분도 걸리지 않을 거리의 세 건물이었기에 경상대 학생들은 법대 수업을, 법대 학생들은 경상대 수업을 듣기도 하고, 타 단대 동아리에 들기도 했다. 사회대 동아리가 전공에는 도움이 될 것 같았지만, 희생, 봉사 정신을 필두로 세운 것이 맞지 않았다. 타 단대 동아리들을 기웃거리던 나는 화려한 신입생 모집 포스터 중 한 곳에 관심이 갔다.


‘투자 동아리: 투지’


산뜻한 다른 포스터와 달리 신입생 유치에는 관심도 없는 듯 어두운 브라운 톤에 동아리명만 크게 쓰여있었다. 가입 조건이나 활동 설명도 없는 허술한 포스터.


‘불친절하네.’


친절함. 모두에게 자신만의 좌우명이 있다면 ‘친절’은 내가 지니고자 했던 덕목이었다. ,친절은 친절로 돌아온다.’ 뭐 이런. 나의 기준에서 그 동아리는 탈락이었다. 친절하지 않은 태도. 동시에 그곳에 호기심을 가지게 된 이유였다. 이렇게 불친절한 동아리가 유지가 될까? 하는.

경상대 동아리 방들은 건물의 가장 아래 층, 반 지하에 가까운 복도에 일렬로 있었다. 외부 투자가 많은 경상대는 로비며 강의실, 심지어 화장실까지 시원하고 깨끗하게 꾸며놓았지만 지하 동아리 방은 복도의 바닥마저 낡아있었다. 군데군데 녹이 슨 철문 앞에 걸린 허술한 명패. 철제 문을 밀자 철문이 바닥에 긁히는 듣기 싫은 쇳소리가 울렸다.


“안녕하세요.”


6인용 책상 두 개가 길게 연결되어 있었고, 짝이 맞지 않는 의자들이 책상 주변 여기저기에 놓여있었다. 왼쪽에는 철제 사물함들이 입을 벌리고 있었고, 반지하의 창문은 한 낮임에도 들어오는 빛이 모자라 형광등을 켜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책상에 다리를 올리고 퍼져있던 몇몇이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아, 신입생이시구나. 상석으로 모셔야지!”


모집요강의 불친절함과 달리 엄청난 환대였다. 그 수선함과 호들갑스러움은 편안한 것은 아니었다. 예의만 갖추고 일어나고자 했던 처음 의도와 다르게, 간식으로 시작한 다과는 거절할 수 없는 식사대접과 급조된 동아리 전체 회식까지 이어졌다. 그렇게 나는 서류도, 지원도 없이 동아리의 회원이 되어 있었다.


동아리 방은 나의 공강시간 아지트였다. 그 곳엔 언제나 누군가 있었고, 좋은 에너지로 가득했다. 동아리에는 경상대 학생뿐만 아니라 공대, 자연대, 법대생들도 많았다. 나이도 다양했다. 선배라는 이름으로 어른인양 구는 20대 초중반의 맨차일드가, 그때의 나에게는 진짜 어른처럼 보였다. 그들을 어른으로 생각할 만큼 나 역시 소매가 긴 옷을 입고 다 큰 척 하는 아이에 불과했었다.

많은 것들이 일어났던 계절이었다. 낡고 환기되지 않는 동아리 방에서 하고 싶은 공부를 했고, 맛없는 소주를 먹었고, 선배들의 과장된 군대 이야기를 들었고, ,누구 누가 어땠다더라, 라는 가쉽들을 들었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그것은 정말로, 내가 모르던 세계였다.

그리고 나의 확장된 세계에는 그 사람이 있었다. 나의 마음에 처음 발 들인 남자.


복학생이었던 수혁은 동아리 선배였다. 얼굴이 하얗고 키가 크고 맥주에 소주를 섞어 마시는 것 외에 아는 것이 별로 없던 사람이었다.

신입생. 봄. 캠퍼스. 첫사랑을 배우기에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배경이었다.

첫 중간고사 기간 나는 동아리방에서 공부를 하다 별이 보일 때 쯤 도서관으로 가 밤을 새곤 했었다. 시험이 끝나갈 무렵, 청청한 밤 하늘에 별들이 빛나던 밤이었다. 시험이 끝난 사람들은 자리를 떠나고 몇 명 만이 남아 있었다. 나는 주섬주섬 가방을 꾸려 도서관으로 향했다.

깊은 밤이 조용한 이유는 어둠이 소리를 삼켜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4월의 밤 공기기는 어둠처럼 짙고 서산했다. 발자국은 조용한 어둠 속에 혼자만의 소리를 뒤에 남기고 있었다.


“도서관 가니?”


등 뒤에서 낮게 깔리는 목소리. 돌아 본 곳엔 그가 있었다.


“도서관 가는 길이면 같이 가자.”

“선배는 시험 끝나지 않았어요?”

“끝났어. 그래도 같은 방향이니까, 데려다줄게.”


도서관으로 가는 플라타너스 길은 어둠이 더욱 짙었다. 이제 순 맺기 시작한 플라타너스의 풋풋한 냄새가 공기에 퍼졌다. 걸음을 딛을 때마다 공기를 가르는 발자국 소리가 더욱 크게 느껴졌다.

도서관 가는 그 길이 더 길기를 바랬다. 도서관 앞, 록키 계단이라고 부르던 층계가 높은 계단엔, 계단 칸마다 라이트가 빛을 쏘고 있었다. 계단을 오르던 그가 걸음을 멈췄다. 나도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너를 좋아해.”


내가 그의 눈을 보는 동안, 그는 내 눈을 바라보지 못했다. 대신 다시 한 번 말했다.


“너를 좋아해.”

“좋아요.”


내 대답은 ,좋아요, 였다. 내가 하고 싶던 말이 ,저도 좋아해요, 아니면 ,저도요, 었는지 모르겠지만. 그가 웃던 얼굴이 떠오른다. 처음이었다. 그가 그렇게 크게 미소짓는 모습은.


키가 크고 얼굴이 하얗고 안경을 쓰다는 것 외에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주말마다 농구를 하고 쓸모없는 외국어를 공부한다는 것. 피아노와 기타를 좋아하는 그의 취미는 작곡이었다.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피아노로 표현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감성적인 사람이었다.

함께 저녁을 먹고 캠퍼스를 걷는 것이 우리가 가장 좋아하던 시간이었다.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를 걸을 때면 수혁은 낮은 허밍으로 노래를 불러주곤 했었다. 그와 함께하는 것은 즐거웠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도 즐거웠다. 무엇이 더 좋은지 우열을 가릴 생각은 하지 않았고, 무엇이 더 소중한 것인지 순위를 매길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때에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아마 가장 적절한 수식어는 ‘친절’ 이 아니었을까? 친절한 사람. 나는 상대방을 좋아한다는 오해를 종종 받았는데 그건 친절함이 가져온 오해였다. 친절하다는 표현은 단순하지만, 친절해 보이기 위한 태도와 행동은 그 범주가 넓었다. 잘 웃어주는 것, 거절하지 않는 것, 안부를 챙기는 것 등. 그리고 수혁은 나의 친절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하나 지적하기엔 매우 사소한 행동들이었다. “네가 그렇게 웃으니까 니가 좋아하는 줄 알잖아.” 와 같은.

봄이 지나 여름을 타고 가을로 향하는 우리의 계절은 잔잔히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친절한 사람이었고,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수혁은 그만의 방식으로 나를 사랑했다. 내가 그의 여자친구라기보다 여동생처럼 여기질 정도로.


“선배는 왜 나랑 자자고 하지 않아요?”


어느 날 밤, 집으로 데려다 주는 그에게 물었다. 그 날, 그 시간에, 그 말을 계획했던 것은 아니었다. 불어오는 꽃내음에 취한 것이었는지, 우거진 나무줄기 아래 그늘이 시원했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취기를 빌려 용기를 내 본 것이었을지도.


“뭐?”


그가 걸음을 멈췄다.


“뭐라고 했어?”

“나랑 안 자고 싶어요?”


재차 묻는 그에게 말했다. 그때 나는, 정말이지 무슨 용기였을까.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곤 손으로 내 머리를 흐트러트리듯 쓰다듬으며 물었다.


“왜 그런 말을 해?”

“그냥, 원래 그런 거 아니에요?”


그건 정말이었다. 그때까지 그는 포옹과 짧은 입맞춤 외 나를 만지는 일이 없었다.


“원해.”


낮은 그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근데, 아직은 아니야.”


그가 나를 향해 몸을 돌리며 이어 말했다.


“네가 너무 소중하니까.”


그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나에게는 첫 연애였다. 그는 나에게 첫사랑이고 이건 첫사랑과의 첫 연애였다. 그가 좋았다. 그의 애정 어린 눈빛과 관심과 함께하는 시간이 좋았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사랑이란 화학적 반응이고 뉴런의 불꽃이 꺼지면 소멸해버릴 것이니까. 그래서 소중해서 만지지 않는다는 그를 완전히 다 이해할 순 없었다. 그것이 어느 만큼 많은 자제력이 필요한 일인지. 여자를 모르지 않았을 그가 얼마나 진심이었는지도.


나를 아낀다던 그는 나를 안을 기회가 없이 헤어졌다. 나를 여자 이상으로 아끼던 그에게는 예상하지 못한 이별이었고, 나에게도 쉽지 않은 이별이었다. 그것은 채 겨울이 온 지 모르던 잔디에 하얗게 서리가 얼던 초겨울이었다. 우리는 함께 벚꽃을 보지 못하고 헤어졌다.

친절함 때문이었다, 결국에는. 그는 나의 친절을 걱정 또는 질투했고 나중에는 ‘넌 나보다 다른 사람들이 더 중요하지’ 까지 발전했다. 나는 수혁과의 관계에서 무엇을 더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에게 나는 첫사랑이 아니었지만, 그는 내가 자신의 첫사랑이라고 말했다. 순서가 중요한 게 아니라 마음의 크기가 중요한 것이라며. 나에게 첫사랑은 첫사랑이 아닌 것처럼, 그에게 나는 첫사랑인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수혁과 같은 사람은 흔하지 않다는 것을, 그가 드물게 좋은 사람이었다는 것은 헤어진 후에 알게 되었다. 첫사랑, 수혁은 남자의 기준이 되어있었다. 다른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나도 모르게 그들과 수혁과 비교했다. 그가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는지를 되새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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