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 4. 이혼 그 뒤

4. 이혼 그 뒤

by lee

4.

갑작스러운 이별이란, 일종의 기만이 아닐까. 이별은 전조를 보인다. 그것에 눈 감을 뿐.

나의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남편을 만나 결혼까지는 꼭 다섯 달이 걸렸다. 그는 동아리 선배였다. 동아리 술자리에서 몇 번 말을 섞었고, 캠퍼스 복도에서 눈길을 주고받았던, 그것이 전부였다. 그가 학교에 다니는 동안, 그리고 졸업한 후에도 그저 우리는 얼굴만 아는 사이였다.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는 수백 명의 사람 중 한 명일 뿐.

그에게서 연락이 온 것은 관장과의 일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잘 지내니?’


짧은 문자로 시작된 인연은 다섯 달 후 결혼이라는 종착역에 닿았다. 처음부터 나를 좋아했었다는 말 때문은 아니었다. 우리 둘을 모두 아는 대학 친구들이 부추긴 탓도 아니었다. 내겐 기대고 싶은 어깨가 필요했을 뿐, 이 사람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결혼식은 치러졌다.

결혼식 사진 속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마치 배우처럼. 흰 드레스는 화려했지만, 드레스를 입은 내 모습은 어딘가 부자연스럽고 어색했다.

결혼 직후 우리는 독일로 건너갔다. 새로운 땅, 낯선 언어, 알 수 없는 풍경들, 그때만 해도 그 모든 것이 모험처럼 느껴졌다. 슈퍼에서 서툰 독일어로 물건을 사다가 엉뚱한 것을 집어와도 우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 정도라면 세상 어디서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밤이면 좁은 원룸에 앉아 독일어 책을 펼쳤다. 노란 백열등 아래에서 낯선 단어들을 하나하나 외워갔다. 창문 너머 가로등 불빛이 새벽이 되어 어슬어슬 사라질 때면, 그 순간만큼은 이 결혼이 실수만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믿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살림은 윤택해졌다. 원룸에서 방 3 개 짜리 주택으로 집을 옮겼다. 밥 그릇 두 개, 국 그릇 두 개로 시작했던 부엌살림은 빌레로이 앤 보흐 시리즈로 바뀌었다. 이케아에서 산 얇은 극세사 이불 대신 헝가리 구스다운을 들였다. 하지만 달콤한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바빠졌고, 나는 점점 움츠러들었다. 하루 종일 집에 혼자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말다툼이 늘어났다.


“하루 종일 뭐 했어?”

“내가 뭐 놀고 있었는 줄 알아?”



무심한 질문에 날이 섰다. 그럴때면 그는 대꾸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각방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퇴근은 점점 늦어졌다. 어떤 날은 밤을 새우고 아예 돌아오지 않는 날도 있었다.


“야근 때문에 회사 근처에서 잤어.”


그의 대답은 짧았고,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묻는 순간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질 것 같았기에. 그럴 때면 나의 공간으로 숨어들었다. 8제곱미터의 작은 내 방. 혼자 있는 밤, 그를 기다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잠들지 못했다. 불면의 밤이면 떠오르는 것은 한국, 그리고 수혁이었다. 캠퍼스 벤치에 앉아 그의 어깨에 기대어 해가 뜨는 것을 보았던 밤, 그의 허밍소리, 그리고 어루만지던 부드러운 그의 손길을. 수혁이라면, 그라면 나를 이렇게 혼자 잠들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겨울은 길었고, 눈은 지독하게 내렸다. 창문 밖 풍경은 아름다웠지만, 집 안의 공기는 무거웠다. 우리는 같은 공간에 있어도 서로 다른 세계에 머물렀다. 그의 시선은 늘 핸드폰 화면에 머물렀고, 나의 시선은 얼어붙은 창밖에 걸려 있었다.

아이조차 없었기에 우리를 이어주는 끈은 더 약했다. 함께 식사하는 일이 종종보다 가끔에 가까워질 때 쯤, 우리는 마주 앉아있어도 더 이상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노력없이 얻어어지는 유일한 것은 바로 시간이다. 노력 없이도 시간은 흐르고,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나이 듬이라는 결과를 선물한다. 시간의 속도에 마음의 나이듬이 따라가지 못하더라도.

어느 봄 아침, 나는 이혼하기로 결심했다. 그와 함께 한 지 열 두 번의 겨울이 지나고 난 4월이었다.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새벽이었다. 발코니 밖 플라타너스에 새 순이 맺히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여름의 초록 나뭇잎을 상상했다. 나는 그대로 앉아 남편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이제 끝인 것 같아.”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남편에게 말했다. 이혼 통보를 들은 그의 반응은 담담했다.

함께 살던 집에서 내 짐을 정리했다. 짐이라고 해봐야 살림을 챙길 것은 아니었기에 챙길 것은 내 옷가지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있던 공간에서 나의 자리를 빼고 나서도 집은 크게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남편과 아내라는 두 사람의 관계에서 한 사람이 빠져도 표가 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혼 절차는 놀라울 만큼 간단했다. 협의이혼서의 내용을 눈으로 읽고 마지막 장에 각자 사인을 했다. 펜 끝이 종이를 스치는 소리가 귀에 맴돌았다. 손끝이 떨렸다. 그를 보았다. 그는 익숙하다는 듯, 차분하게 펜을 놀렸다.

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회색 도시 위에 하얀 눈발이 소리 없이 쌓여갔다.


“후회해?”


남편에게 물었다.


“결혼? 아니면 이혼?”


남편이 되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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