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늦여름
12.
정 선생과의 연애가 깊어질수록 수혁을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커졌다. 하지만 생각과 반대로 수혁과의 관계는 진해지고 있었다.
수혁은 언제나처럼 갑자기 나를 찾았고, 그의 시간을 맞추기 위해 정 선생님과의 약속을 취소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 핑계는 사소한 것들이었다. 피곤해서, 갑자기 친구를 만나야 해서.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핑계들은 습관처럼 굳어졌다. 그는 늘 이해하려 했고, 나는 그 이해심에 기댔다.
그는 정말 몰랐던 것일까, 아니면 알면서도 모른 척했던 것일까. 남편의 책상 위 영수증을 못 본 척 덮어두었던 그때의 나처럼.
“선생님, 토요일에 약속 있어요? 00 전시회 가실래요?”
정 선생님이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주말은 수혁이 오지 않는 날이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정 선생님이 데려간 전시회는 이전에 내가 스쳐 말했던 작품전이었다. 이전에 가보고 싶었는데 못 가보았다는 나의 말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너무 좋았어요. 진짜 가보고 싶었던 전시였는데.”
“지영 씨가 좋다니 저도 좋아요.”
그가 내 손을 잡고 내 코트 주머니 속에 손을 넣었다.
“저녁은 뭐 먹을까요? 화덕 피자 맛있는 곳을 알아왔는데. 지영 씨 피자 좋아하죠?”
“네, 아무거나 먹어요.”
그때 주머니 휴대폰 진동이 느껴졌다. 수혁의 메세지였다.
‘만나자.
오늘 저녁 8시.’
“그 피자집이 어디예요?”
“00이에요. 차로 좀 가야 하는데 그래도 아직 5시니까 천천히 출발하면 너무 늦지 않게 도착할 거 같은데요?”
‘레스토랑에 도착하면 6시 조금 넘을 것이고, 주문하고 먹으면 빨라도 7시, 거기에서 우리집까지……’
내 머리 속은 빠르게 8시 약속을 맞출 계획을 짜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8시라는 시간을 맞출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선생님, 죄송해서 어쩌죠. 오늘 저녁에 실시간 온라인 강의가 있는 걸 깜빡했어요.”
“주말에요?”
“……”
“어쩔 수 없죠. 모셔다 드릴게요.”
집으로 오는 내내 나는 그의 표정을 보지 않으려 애썼다. 그를 보는 순간 내 발걸음이 수혁에게로 향하지 못할 것 같았으니까.
수혁은 8시가 훨씬 넘어 도착했다. 여느 때처럼 담배 냄새를 풍기며. 이제 그는 불을 켜지 않아도 익숙하게 침대로 갈 수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격정적이고 거칠게 그리고 빠르게 욕망을 드러냈다.
내 위에서 숨을 고르던 그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말했다.
“너, 그 사람이랑 자주 만나는 것 같더라.”
“누구?”
“정 선생.”
나는 수혁에게 정 선생님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다. 영화관에서 남자친구가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 전부일 뿐. 수혁 역시 애인이 있느냐는 질문을 한 적은 없었다.
“그게 왜요?”
,어떻게, 보다 ,왜, 라는 질문이 먼저 나왔다..
“아니, 그냥. 네가 다른 남자랑 있는 걸 상상하면 기분이 별로라서.”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아내와 아이가 있는 사람이었다. 다른 남자를 운운하며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그의 말이 오만하게 들렸다. 하지만 동시에 가슴 속에 무엇인가 끓어올랐다. 질투의 감정? 가지지 못할 것에 대한 탐욕? 비밀스러운 관계에서 오는 흥분?
그는 나의 죄책감이다. 그는 나의 두려움이다. 그렇기에 그의 앞에서 나는 감춰야 할 것이 없었다.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는 관계이지만 이 관계 안에서만이 나는 자유로움을 느꼈다. 자격도, 책임도, 의무도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그를 뒤에서 안고 목덜미부터 키스를 시작했다. 온몸이 녹아내릴 듯이 서로를 끌어안았다.
“어제 수업은 잘 들었어요?”
“네……”
“답장이 없어서 걱정했어요. 수업들어야 되는데 잠든 건 아닌가 하고.”
정 선생님이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정 선생님의 얼굴을 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정 선생님의 눈빛에서 지난밤 나를 바라보던 수혁의 눈동자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정 선생님이 눈을 피하는 내 손을 잡았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죠?”
“…네……”
“걱정하지 마요. 지영 씨는 그냥 있으면 돼요.”
그가 잡은 손을 꽉 쥐었다. 손이 따뜻했다. 그 따스함을 느끼며 나는 미소지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마음을 짓누르는 무엇인가가 느껴졌다. 나의 비밀을 눈치챈 건 아닐지. 아니, 어쩌면 그는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늦여름의 햇살에 눈이 찡그러졌다. 나를 향한 기대와 다정함. 그는 빛 같은 사람이었다. 그것이 눈이 부신 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도망가고 싶었다. 어둠 속으로. 수혁의 품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