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 11. 사랑이라 믿고 싶었다

11. 사랑이라 믿고 싶었다

by lee

11.

지안은 독특한 아이였다.

정 선생님은 아이들에게는 무조건적인 애정과 관심이 필요하다 믿었지만, 나는 동의하지 못했다. 무조건이라는 단서를 달 수는 없다고. 이것은 그와 나의 몇 안되는 의견 차이 중 하나였다. 모든 개개인은 각자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에너지의 주파수가 맞는 사람을 발견할 때, 그들은 서로 그것을 느낀다. 그런데 간혹, 상대방의 주파수와 관계없이 사람을 끄는 힘을 가진 이들이 있다. 매력이라고 혹은 매혹이라 불리는 힘이 바로 그런 것일 것이다. 지안은 어떤 매력을 가진 아이였다. 일곱살 난 아이에게 매력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이 합당할까, 잠시 망설였지만, 그것 외에는 지안에게 향하는 자신의 관심을 다르게 표현할 수 없었다.

지안은 자폐 스펙트럼 환자였다. 스펙트럼이라는 단어가 붙는 만큼 자폐는 그 양상이 다양하고 개인마다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지안은 그 중에서도 의사소통의 발달 지연, 사회적 사회작용의 결함과 함께 언어적, 비언어적 의사소통의 한계를 보였다. 지안은 자발적 발화, 그러니까 단어 수준의 모방이나 의성어 발화도 관찰되지 않았다.


“지안아, 안녕하세요.”

“……”

“지안아, 이게 뭘까? 딸랑딸랑 소리가 나고, 모양이 동그랗네?”

“……”

“공. 공이에요.”

“……”

“굴려볼까요?”

“딸랑딸랑”

“오, 소리가 나네?”

“……”

“공이 굴러가요. 딸랑딸랑, 지안아, 공이 어디 가지?”

“……”


지안에게는 소통하려는 의사가 없어 보였다. 청각 자극에 대한 둔감성, 그리고 반응의 결여. 반응을 촉구하는 상황에서 반복되는 상동 행동. 이것은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아이들의 일반적인 반응이었다. 하지만, 내가 다른 교구를 찾거나 창 밖을 보고 있을 때면 느껴지는 시선이 있었다. 고개를 돌리면 지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동자를 마주하며. 그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지안은 나를 정확히 응시하고 있었다. 흩어지는 시선이 아닌, 또렷한 초점으로. 그것이 자폐 아동들에게 드물지만 불가능하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특별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사로잡히는 듯..


평일에 한 두 번씩 일정하지 않게 오던 수혁의 문자가 잦아졌다. 그 메시지는 언제나처럼 ‘만나자’ 세 글자였다. 그런 날이면 일들을 제쳐놓고 일찍 집으로 향했다. 혹시나 저녁을 거르진 않았을까 집으로 가기 전 슈퍼에서 간단한 요깃거리들을 사는 것도 그날의 루틴이었다.


“혹시 먹을 거 있어?”


어느 날 밤, 여느 때처럼 몸을 안은 후 수혁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저녁 안 먹었어요?”

“응. 바로 오느라.”

“잠시만요.”


먹을만한 것이 없다는 건 그보다 내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냉장고를 열어보았다. 파프리카와 말라가는 당근, 10구짜리 계란박스 안에 남은 3개의 계란. 하지만 그를 배가 주린 채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계란프라이 해줄까요?”

“응. 뭐든.”


그는 짝이 맞지 않는 식탁 의자 네 개 중 한 자리에 처음으로 앉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앉아 계란프라이 세 개를 한 점도 남김없이 다 먹었다. 그 날 이후, 수혁의 메시지를 받는 날이면 슈퍼에 들리게 되었다. 그 날 이후 수혁이 다시 그 의자에 앉는 일은 없었음에도.

슈퍼에서 까망베르 치즈, 모닝빵, 방울토마토와 저녁 할인이 붙은 초밥을 샀다.


‘초밥은 뺄까?’


오늘이 지나면 쓰레기통으로 직행할 것을 알면서도 모두 계산했다.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코롱을 뿌렸다. 그리곤 옷장 앞에 서서 수혁에게 문자를 보냈다.


‘무슨 색 입을까요?’

‘하얀색.’


오고 있는 길인지 그에게서 바로 답장이 왔다. 자수가 놓인 하얀 브래지어와 팬티를, 그 위에 허벅지 중간 길이의 나이트 가운을 걸쳤다.

벨이 울리고 문을 열면, 언제나처럼 그가 서있었다. 약간 지친듯한 표정으로, 담배 냄새를 풍기며.

한 번쯤 웃고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현관문이 닫히고, 그가 내 양 손목을 허리 뒤에 놓고 결박하듯 쥐었다. 손목만 잡혔을 뿐인데 꼼짝할 수 없었다. 그대로 침대로 간 그는 나를 침대 위로 던지듯 밀었다. 매트리스 위로 엎드려 쓰러진 상태에서 이미 반쯤 벗겨진 나이트 가운을 벗겨 냈다. 등 뒤에서 몸을 안은 채 브래지어 위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몸을 돌려 그를 보았다. 수혁이 손을 떼고 내 몸을 바라보았다. 벗기다 만 속옷 아래로 지난날 만들어 놓은 빨간 손자국이 남아있는 몸.


“예쁘다.”


그의 짧은 말에도 가슴이 벅차 올랐다. 그의 손길, 입술, 숨결, 그가 나를 다루는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그가 다루는 방식이 거칠어지면, 말 대신 그의 얼굴을 바로 바라보았다. 그럴때면 그는 고개를 돌리거나 손으로 내 눈을 가렸다. 그는 나를 바로 보지 못했다. 그의 눈빛이 사랑인지 욕망인지 알 수 없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나는 수혁을 안고 있었다. 내 품 안에 있는 그가 마치 내 아이처럼 약해보였다. 수혁의 몸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키가 크고 군살이 없어 나이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젊지 않은 몸이었다. 조금 나온 아랫배, 마른듯한 팔과 어깨, 쇄골과 어깨뼈를 만지작거렸다. 그를 만질 때 뱃속 깊은 곳부터 우러나오는 따뜻함, 그 기분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애정이었다.


“가야겠다.”

“뭐 좀 먹을래요?”


가야겠다는 그의 말에 한번도 그를 잡은 적이 없었지만, 오늘은 말을 던져보았다.


“가야 돼. 늦었어.”


수혁이 바닥에 흩어진 옷을 주워 입으며 말했다.


“조금만 먹을래요?”


왜였을까. 오늘 그를 더 붙잡고 싶었던 것은. 바지 사이로 다리를 넣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내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가야 돼.”


그는 말했고 나는 다시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베란다로 나가 담배를 물었다.

등 뒤로 철컥 문 열리는 소리 그리고 잠시 뒤 도어락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베란다로 나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건물 밖을 나가는 수혁의 뒷모습이 보였다. 한 쪽 눈을 감고 손바닥을 펼쳤다. 엄지와 검지로 작아지는 그의 뒷모습을 잡아보았다. 그는 잡힐 듯 잡히지 않게 계속해서 걸어나갔다. 이윽고 그의 모습이 손가락으로 잡을 수 없을 만큼 작아졌다. 그는 돌아갈 곳으로 돌아갈 것이고, 나는 이곳에 남겨질 것임을 알았다. 그럼에도 결심할 수 없었다. 그를 사랑하지 않겠노라고.


감당하기 벅찬 마음이 밀려들었다. 그것은 미움이나 원망보다 큰 것이었다. 바로 죄책감이었다. 그는 가로등이 꺼지기 전 돌아가야 할 곳이 있는 사람이었다. 별들이 희미해질 때까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이가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이 붙잡고 또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배신이었다. 나를 믿고 있는 이를 배신하고, 수혁을 믿고 있는 이를 배신하게 하는 것. 내가 놓지 못한 것은 쉽게 놓아버린 과거에 대한 미련이었다. 그 사이에서 나를 사랑하는 것과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것들을 쉼 없이 손가락 사이로 흘려 보내고 있었다.


계절은 겨울을 준비하고 있었다. 부유하던 공기에 찬 기운이 얹혀지면 스스슥 바람 소리부터 달라졌다. 장마와 태풍으로 맑아진 대기를 뚫고 내리쬐는 가을볕의 바싹 마른 냄새에도 서늘한 습기가 맡아졌다. 소리로, 냄새로, 계절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치료하는 아이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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