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나쁜 사람
10.
그 밤 수혁과 만난 이후 그는 나의 집을 가끔보다 자주 찾았다. 누가 먼저 연락을 하든, 누가 연락을 하지 않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만나자.’
그것이 우리의 신호였다. 일하던 중에도 폰을 보는 일이 잦아졌다. 출근 길이든, 일하던 중이든 ‘만나자’ 짧은 문자가 띄워지면 목덜미가 뜨거워졌다.
우리가 만나는 장소는 언제나 나의 집이었다. ,만나자, 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지만, 그래도 다른 곳에서 만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집으로 온 수혁은 무언가에 쫓기는 듯, 혹은 허기진 듯 서둘렀다. 그것이 그의 방식인지, 아니면 육체적 갈급함 때문인지 알 수 없었고, 알려고 들지 않았다. 그의 젊음을 알았다면 비교해 볼 수 있었겠지만.
현관문을 열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셔츠 윗단추를 풀고 있었고, 집 안으로 들어서며 나를 안았다. 때로는 현관 바닥에서, 때로는 침대에 걸쳐진 채로, 옷을 다 벗지도 못한 채 나의 안에 그를 풀어냈다.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온몸의 체중을 실은 채 숨을 몰아 쉬는 그를, 그의 머리를 안고, 그의 등을 쓰다듬고,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수혁과 만남은 정기적이 되어가고 있었다. 안될 일이지만, 정 선생님과의 만남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없이 내어주는 사람과 소멸할 듯 내어줘야 하는 사람. 양쪽의 에너지 사이에서 나를 맞추어가고 있었다.
커피 자판기 앞 테이블에 앉아 창 밖을 바라보았다. 복지관 담장을 따라 심어놓은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통창 넘어 시원하게 펼쳐졌다.
“요즘 피곤해 보이세요.”
행정실 이 선생님이었다.
“아, 일이 좀 늘어서 그런가 봐요.”
“우리 센터 언어치료가 좋다고 소문났나봐요. 선생님 오시고 언어치료 환자가 엄청 늘었어요.”
“언어치료 지원이 늘어서 환자가 늘어난 것 같아요.”
“그래도 커피 마실 시간도 있는걸 보니 그렇게 바쁜 건 아닌가보네요.”
날 선 목소리. 생활복지사인 김 선생님이었다. 업무가 겹치는 것도 없고 딱히 이벤트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김 선생은 어딘가 뾰족했다. 생활복지사인 김 선생은 정 선생과 함께하는 일이 훨씬 많았다. 정 선생과의 관계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공공연한 비밀이었기에, 정 선생님의 동료들은 오히려 잘 대해주는 경우가 많았다. 김 선생님만 제외하고.
“네, 그렇잖아도 마침 일어나려던 참이었어요.”
더 얽혀서 좋을 것이 없다 생각되어 일어서던 참이었다. 저 앞 복도 끝에서 정 선생이 보였다. 평소라면 짧게라도 인사를 하고 일어섰겠지만, 지금은 좋은 때가 아니었다. 정 선생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김 선생님!”
정 선생의 목소리였다. 그것은 나를 부르는 소리였지만, 행정실 김 선생님 역시 뒤를 돌아보았다.
“찾는 사람이 많아 좋겠어요.”
김 선생이 말했다. 얼굴이 화끈했다.
취업한 지 두 계절이 지나기도 전에 복지관의 거의 유일한 젊은 남자를 채어간 이혼녀라고. 들리지 않는 비난이 들리는 듯했으니까.
‘네, 이것도 능력이거든요.’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중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난처해 하는 이 선생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 다 계셨네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두 김 선생님이.”
그새 곁에 온 정 선생이 말했다.
“저는 오늘도 바빠서 많아서 이만.”
김 선생이 쌀쌀맞게 등을 돌렸다. 이 선생도 우물쭈물하며 자리를 떴다.
둘만 남게 되자, 나도 모르게 그에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왜 이렇게 눈치가 없어요?”
“아……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쏘아붙이는 말투에 그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표를 내야 되냐구요.”
“아……”
사실 사람들 앞에서 관계를 드러낸 것은 지난 번 대문 앞에서 정선생을 기다렸던 건 나였을지 모른다. 이건 정당한 화가, 합당한 불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멈추지 못했다.
“저는 별 다른 뜻 없이……”
“그렇게 큰 소리로 불러대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일하는 데지 연애하는 데는 아니라고 수군거리지 않겠어요?”
그랬다. 그건 화풀이였다. 나도 알고 있었다. 아까 경험한 그 불쾌함,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또는 그것이, 김 선생이 나에게만 날카로운 이유가 나에게 잘못이 조금은 있던, 아니면 완전히 억울한 일이든, 명백한 것은 정 선생 탓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방금 전 모욕감을 그에게 풀어내고 있었다.
“좀 가라앉고 나면 나중에 이야기해요.”
얼굴이 굳은 그가 말했다.
수혁이 떠올랐다. 수혁을 생각했다. 저 복도 끝에서 손을 흔들던 것이 수혁이었다면, 김 선생의 비아냥에도 앞에 있었던 것이 수혁이었다면, 그래도 나는 그를 탓했을까. 이렇게 치졸한 감정으로 나의 바닥을 보였을까?
늦여름의 노을은 아름다운 만큼 빠르게 사그라져버렸다. 붉게 하늘을 물들이고는 흔적도 없이 어둠 속으로 잠식되어 버린다. 이토록 아름다운 시간이 이토록 짧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그것을 바라볼 시간이 짧기 때문일까, 아름다운 것은 시간의 속성과 관계없이 아름다운 것일까?
나는 운동장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대문 옆 삐죽히 삐져 나온 남자 신발이 보였다.
‘숨을거면 완전히 숨지.’
그의 신발 끝에서 미안함이, 그보다 깊은 곳에서 애잔함이 느껴졌다.
“정 선생님?”
“오셨어요?”
그가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뺐다.
“오시는 줄 몰랐어요. 뭘 듣고 있어서.”
그가 허둥지둥했다.
“신발이 다 보이던걸요.”
“아, 그랬구나. 미안해요, 숨어있으려고 했는데.”
아마도 낮에 내가 한 말 때문이었으리라.
‘숨긴 왜 숨어요.’
목소리보다 먼저 나오려는 눈물 때문에 말을 삼켰다.
‘숨어야 할 사람은 당신이 아니에요.’
“미안해요.”
그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풀꽃이었다. 이름 모를 여러 꽃들을 다발로 모아 잎줄기로 둥둥 묶어 줄기에 키친타월을 적셔 감싸놓은 꽃다발이었다.
앞에 있는 남자를 보았다. 이 큰 덩치의 남자가 허리를 구부리고 꽃을 꺾는 모습을 상상했다.
꽃다발을 다시 보았다.
손톱보다 작은 잔잔한 하얀 꽃묶음. 그것은 수수한 아름다움과는 달랐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이겨내는 아름다움이었다. 늦은 노을의 붉음에도 지지 않는 아름다움이었다. 풀꽃은 풀꽃대로의 모습으로 아름다움을 빛내고 있었다. 눈물이 터져 나왔다.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눈물이 났다.
“미안해요.”
그가 다시 말했다. 그가 팔을 벌려 나를 안았다.
“미안해요.”
그가 다시 속삭였다.
‘미안한 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을 속이고 있어요.’
뱉지 못 하는 말을 속으로 외쳤다. 그의 품은 따뜻했다. 그것은 욕정을 뱉어낸 후 뜨겁게 입김을 뿜는 수혁과는 다른 품이었다. 그의 품이 따뜻해서 더욱 눈물이 났다. 셔츠 어깨가 젖는 것도 아랑곳없이 그는 나를 가만히 안고 있었다. 노을이 어둠이 되고 저녁 달이 하얗게 빛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