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 13. 그건 그렇게 될 일이었다

13. 그건 그렇게 될 일이었다

by lee

13.

지안의 세션이 끝나가고 있었다. 지안은 늦여름 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이마에 옅은 땀이 밴 모습에서 긴 바지에 도톰한 맨투맨을 입고 있었다. 지안은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지안이 자신과 눈맞춤을 성공했노라 알려주고 싶었지만, 어쩌다 우연히 찾아오는 찰나를 치료의 효과로 설명하긴 부족했다. 계절이 바뀌도록 변함없는 것도 있었다.


“다음 세션이 마지막이네요.”


지안의 치료시간이 끝나고 지안의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보통 치료를 이어나가기 원하는 부모는 세션이 끝나기 전 다음 진단서를 발급받아 온다. 마지막 세션까지 아무 말이 없는 것은, 더 이상 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암묵적인 의사이고 이는 치료세션에 만족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네, 그동안 애써주셨는데 감사해요.”

“지안이가 차도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저도 아쉽습니다.”


자폐 스펙트럼 아동에게, 몇 달의 치료로 효과를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지안을 더 이상 만나지 못하는 아쉬움을 그렇게 표현했다.


“아니에요. 언어치료 시작하고 지안이 행동이 많이 좋아졌어요. 여기서는 짧게 보시겠지만, 집에서는 달라진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간의 노고에 대해 인사치레라 생각하기에 지안이 엄마의 눈빛은 진지했다. 그녀가 말을 이어나갔다.


“정말이에요. 지금은 이사 때문에 잠시 치료를 중단하게 됐지만……지안이 아빠도 저도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이사요? 이사를 하세요?”


치료를 이어가지 않는 이유가 나때문은 아니었구나. 조금 안도했다.


“네, 주택이 낫지 않을까 해서요. 아파트에서는……이웃들 항의도……”


나중에 말한 이유가 주된 원인일 것이라 짐작이 되었다.


“너무 멀지 않은 곳이라면, 다시 언어치료 받을 생각 있으시면 제 휴대폰으로 연락주세요. 저도 지안이를 조금 더 맡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것은 진심이었다. 지안은 이상하게 마음이 가는 아이였으니까.


“감사해요.”


내 말에 진심으로 감격한 듯 지안의 엄마가 내 손을 잡았다.


“아이 아빠도 오늘 같이 왔는데, 인사드리라고 해야겠어요.”

“일부러 그러실 것까지는요. 괜찮습니다.”

“아니에요. 이제 집이 멀어지면 아빠가 데리고 와야 할 수도 있으니까요. 마침 같이 온 날 인사드려야겠어요.”


지안의 엄마가 남편을 부르러 간 사이, 나는 지안과 마주 앉아 있었다. 지안의 마음을 알 수 없는 눈동자를 읽으려 애쓰며, 그 안에서 느껴지는 기지감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드르륵’


치료실의 문이 열렸다. 인사를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나는 얼어붙고 말았다. 문 앞에 나란히 서있는 지안이의 엄마와 아빠.


“지안이 아빠 권수혁입니다.”


수혁과 마주한 순간 지안에게서 받았던 느낌이 무엇이었는지 알았다. 지안의 눈동자, 그것은 수혁의 눈동자였다. 지안에게서 보고 느꼈던 것, 그것은 수혁이었다. 당황함을 감추기 어려웠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지안의 엄마가 물었다.


“지안이가……아빠를 많이 닮았네요. 너무 닮아서 놀랐어요.”

“다들 그래요. 아빠 판박이라고.”


지안의 엄마가 웃으며 말했다. 남편에 대한 애정과 아이에 대한 사랑이 가식 없이 담겨있는 미소였다.

눈 둘 곳을 찾을 수 없었다. 수혁의 얼굴을 바라볼 수도, 지안을 쳐다보기도 어려웠다. 지안의 엄마, 그러니까 내가 바람을 피우고 있는 남자의 아내를 바라보는 것은 더욱 힘들었다.


“아내가 말씀드렸겠지만,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별말씀을요.”

“이사만 정리되는 대로 치료 다시 시작하도록 할게요. 선생님 감사해요.”


지안의 엄마의 목소리가 먹먹해져 있었다. 수혁은, 아니 지안의 아빠는 그런 아내의 어깨를 안고 토닥거렸다. 나의 앞에서. 그 모습이 너무나 따뜻하고 다정했다. 몸이 떨려왔다.

내가 기대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한 계절이 지나도록 우리 집을 찾는 동안 수혁은 단한번도 가정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나 역시 묻지 않았다. 하지만 상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동창회에서 그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그에게서 ,좋은 가정, 을 기대했었다. 그는 그럴만한 사람이겠노라고. 하지만 나를 찾는 밤 상상한 수혁은 다른 모습이었다. 일에 지친 남편, 남편에게 무신경한 아내, 소외된 아빠의 모습, 뭐 그런 것들?

그것이 으레 바람피우는 남자의 전형이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내가 바랬던 것인지 솔직할 수 없었지만, 현재 앞에서 펼쳐진 그림은 아니었음은 확실했다.

두 눈으로 확인한 그의 가정은, 장애가 있는 아이를 돌보는 헌신적인 아내와 그런 가정을 책임감있게 지키는 모범적인 남편 그 자체였다. 하지만 수혁은 아내와 아이가 있는 집으로 가는 대신 내 집을 찾았다. 아이와 놀아주고 아내를 포옹하는 대신 내 몸을 탐했다. 그에게 나는 무엇이었을까?


“이만 가보겠습니다.”


숨 막히는 상황을 정리한 것은 그였다. 네 사람이 동시에 일어났고, 세 사람이 열린 문밖으로 나갔다. 이제 방 안에 남은 것은 나 혼자였다. 뜨겁게 나를 안고 황급히 떠나고 난 뒤, 집 안에 홀로 남을 때처럼. 귓가에 웅웅 소리가 울리는 듯했다. 그것이 실제 소리인지, 귀에만 들리는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창문을 열었다. 바람에 올라탄 낙엽이 흩날리고 있었다. 그 바람에는 더 이상 가을볕의 따뜻함이 담겨있지 않았다. 그것이 매서워 서둘러 문을 닫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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