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떠나가버린 떠나지 못한
14.
첫 연애, 첫 키스. 그것이 나에게 남았던 수혁의 잔상이었다. 그가 나를 상처줄 수 있다는 것을, 과거의 수혁에 머물러 있던 나는 의심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그의 뒷모습에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수혁은 도서관 계단에서 뺨을 붉히던 남자가 아님을. 퇴근길 수혁이 품고 가는 여자는, 남자를 모르고 사랑을 몰라서 함부로 그를 도발하던 어린 여자가 아님을.
황급히 욕정을 풀고 서둘러 집으로 향하던 모습에서 혹은 자신의 고픈 배는 채워야 하지만 나의 허기진 마음은 다룰 줄 모르던 모습들에서 어쩌면 나는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나는 그의 도피처였다는 것을. 그것에 아주 조금은 사랑이 있을 것이라 여겼던 것은 그저 나의 바람이었을 뿐임을.
어두워진 하늘에 눈싸라기가 떨어졌다. 아주 작은, 땅에 닿기도 전 스러져버리는 싸락눈이었다. 기다리는 이가 없어도 계절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짙은 남색 하늘에 하얀 싸락눈이 별빛처럼 선명히 빛나고 있었다.
창문 밖에 흩날리는 싸락눈에서 이 년 전 겨울, 인생에서 가장 추웠던, 인생을 통틀어 가장 죽고 싶었던 그날이 떠올랐다.
추운 날이었다. 살을 에는 추위라는 것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만큼 칼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모르겠다. 그렇게 나빴던 날씨에, 평소에 하지 않던 마중은 나가보고 싶었던 것은. 저녁이 하기 싫었기 때문이었을까? 좋아하던 식당의 따뜻한 소고기 롤이 먹고 싶어서였을까. 아니면 그냥 지나쳐간 결혼 기념일을 늦게라도 기념하고 싶어서였을까? 어쩌면 뭔지 모를 여자의 촉이었을지도 모른다.
몸에 붙는 까만 니트 원피스를 입고 얇은 검은색 스타킹을 신었다. 부츠를 신으려다 다리 선이 보이는 힐을 신었다. 그리고 발목까지 오는 긴 코트를 입었다. 이 코트를 벗었을 때 예쁘다는 말을 기대하며.
남편의 사무실은 시내에 있었다. 사무실은 내가 좋아하던 레스토랑 바로 옆이었다. 독일로 넘어와 처음 갔던 레스토랑이기도 했다.
리셉션 직원과 눈인사하고 남편의 사무실로 직행했다. 퇴근 시간에 가깝기는 하지만 굳이 방해할 생각은 없었다. 사무실은 어깨높이까지는 불투명 유리 그리고 그 위는 통 유리로 되어 있었다.
나는 까치발을 하고 사무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있는 남편,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안면이 있는 여자 동료. 한국에서 파견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이혼을 하고 아이와 둘이 살고 있다는 직원이었다.
여자는 남편 쪽으로 몸을 숙이고 무엇인가 설명하고 있는 듯 보였다. 남편은 여자의 손에 있는 페이퍼보다 여자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남편의 입가에는 한쪽 입술이 약간 더 올라가는, 그래서 의식적으로 웃을 땐 양 입꼬리를 맞추려는 버릇이 있지만 숨길 수 없이 웃게 될 때 나오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눈이 책상 위로 향했다. 겹쳐져 있는 두 사람의 손. 남편의 손이 여자의 손을 덮고 있었다. 손가락 깍지를 낀 채.
나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왔다. 리셉션 직원에게 인사를 했는지 안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겨울 저녁은 변덕스러울 정도로 금새 달라져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이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흐트러트렸다.
‘변덕스러운 건 너야.’
바람이 말하는 듯했다.
‘안 하던 짓을 해서 그래.’
바람을 맞으며 걸음을 뗐다. 아직까지도 집까지 어떻게 갔는지 잘 떠오르지 않는다. 기억하는 것은 이대로 차에 치이고 싶다는 생각이 떠올랐다는 것, 그리고 눈이 잘 떠지지 않을 정도로 날리던 따가운 눈발, 두꺼운 코트 속까지 에이던 추위, 뺨을 베며 지나가는 바람, 감각으로 느껴지는 그 날의 추위…...
그 일에 대해 나는 침묵했다. 아마도 남편은 리셉션 직원을 통해 사무실을 다녀간 것을, 그 여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오랜 냉전 끝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남편이었다
“그 여자를 사랑해.”
“사랑? 웃기지마. 그런 건 착각이야. 그냥 지금 기분이고 감정인 거야. 우리는 사랑을 안 했어? 안 해봤어?”
“난 너를 사랑했었어.”
남편이 대답했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넌 날 사랑하지 않았잖아.”
대답하지 못했다. 사랑 없이 결혼했던 것은 나였다. 나에게 결혼은, 회피였다. 남편에게 줄 사랑이 없다는 것이 그에게도 느껴지지 않았을리 없었다.
도망가기만 했다. 수혁에게서도. 복지관에서도. 그리고 남편에게서도.
‘도망간 곳에 낙원은 없어.’
도망친 곳에서 더 큰 절망을 맞이할 때마다 떠올랐던 생각이었다. 회피, 회피였다. 눈을 감으면 술래가 찾을 수 없을 거라 잠시 나를 속이려 했었던. 잠시 눈 감으면 마치 그것을 피해 갈 수 있는 양. 그것은 나에 대한 나의 속임이었다.
창문 밖 눈싸라기는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어두워진 공기 속 하얀 싸락눈이 생생했다. 겨울이었다. 다시 겨울이 온 것이었다.
주머니 속 휴대폰 진동음이 울렸다. 아마 수혁일 것이라 생각하며 휴대폰을 들었다. 아내의 어깨를 안고 아이의 손을 잡고 등을 보였던 남자, 이제는 아마 그 변명을 들을 차례라 짐작하며.
문자의 내용은 짧았다.
‘첫 눈이다.
너를 만난 것도 겨울이었어.’
정 선생님이었다. 처음 이 복지관에 면접을 보러 왔던 날이 떠올랐다.
“이렇게 오셨는데 괜찮으시면 오늘 면접 보시죠.”
‘정 선생님이었구나.’
그날 나에게 면접 기회를 주고 내 앞에 커피를 뽑아놓았던 사람. 미처 내가 기억하지 못했더라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 겨울, 그날, 그날의 나를.
‘ㅊ, ㅓ, ㅅ, ㄴ……’
나는 휴대폰을 켜고 화면 속 글자를 한 음절 음절 꼭꼭 눈에 새기며 읽었다. 하나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글자 글자 담긴 마음을 짐작하려는 듯이.
정성 들여 글자를 눈에 담고 휴대폰을 덮었다. 눈을 감았다. 아주 오랫동안. 다시 눈을 뜬 나는 긴 메시지를 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