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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육육진심 Mar 19. 2024

백설공주의 새엄마와 미녀와 야수의 야수가 부모라면?

부모의 자기애 및 자기혐오가 아이와의 관계에 미치는 영향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예쁘니?  

대표적 나르시시스트 부모인 백설공주의 새엄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오직 자신 뿐이어야 한다고 믿는 백설공주의 새엄마는 대표적인 나르시시스트죠. 

자기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빠진 이들은 자신을 중심으로 세계가 돌아간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애성 성격장애’는 나르시시스트라고 불리는 사람들 중에서 정신병적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의 진단명인데요.

“자신의 중요성을 과장되게 인지한다. 무한한 성공, 권력, 탁월함, 아름다움 혹은 이상적인 사랑에 대한 공상에 사로잡혀 있다. 스스로를 특별한 존재라고 믿는다. 특별하거나 지위가 높은 사람 혹은 유명 인사들만이 자신을 이해할 수 있고 또 그런 사람들하고만 어울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할 정도로 타인의 찬사를 요구한다.(DSM-5)”     


나르시시스트는 말 그대로 자신을 과도하게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자신이 특별하고 중요한 사람이라는 걸 확인받기 위해, 다른 사람의 인정과 칭찬을 수시로 받아야 하는데, 그 공급자가 주로 '가족'이라는 거죠.      


백설공주의 새엄마와 같은 사람이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으면, 아이는 어떻게 성장할까요?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아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아이에게 자신의 감정을 돌봐달라는 요구를 합니다.

 

아직 자아에 대한 확고한 정체성이 없는 어린 시기부터 아이의 동정심과 연민, 수치심과 죄책감 등을 이용해 나르시시스트인 부모의 요구를 수용하도록 조종하죠. 


심지어 아이가 자신보다 더 뛰어난 점이 있으면 질투를 느끼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부모가 되었나고요?     


이들은 정신병리적 문제를 겪고 있는 거죠. 어린 시절 무심하고 냉담한 부모에게서 충분한 관심과 애정을 받지 못하고 자랐기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 안에 사랑과 인정, 칭찬과 감탄 등을 채워 넣으려는 겁니다.      


이러한 부모는 아이가 세상으로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곳엔 아이가 놀랄만한 경이로운 대상이 넘쳐나니까요. 


그러니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자신의 병든 내면에 아이를 꽁꽁 가둬놓고 다른 곳에 관심을 가지 못하게 합니다.      


안타깝지만,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도 자신이 좋은 부모라는 것을 과시하거나 자녀를 통제함으로써 느껴지는 성취감,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는다는 기쁨 등을 누리기 위함이죠.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어떤 점이 다를까요?     


자녀의 삶에 아무 때나 ‘침범’한다.      


이들은 아이에게 고유한 감정과 생각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독립적인 존재임을 인지하지 못하죠. 자신은 늘 누군가의 사랑과 관심에 의존하며 살아왔기에 ‘자율성과 독립성’이 무엇이고 왜 필요한지 모르는 겁니다.      


이들에게 아이만의 시간과 공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존중할 수도 없죠. 

아이는 마치 자신의 소유인 것처럼 자신이 원하는 대로 느끼고 생각해야 합니다.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모든 면에서 아이가 자신에게 융합되길 바라죠.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생각’이 아니라 ‘고집’만 있다.    

  

이들은 “엄마가 다 생각이 있어서 그래.”라고 말하며 아이가 자신의 말에 순응하길 바라지만, 사실 (합리적인) 생각이 아니라 (쓸데없는) 고집만 남아 있는 거죠.      


그래서 누군가 옳은 말을 해도 자신이 원하는 것과 다르면 절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아이를 위한 생각은 결국 자신을 위한 고집일 뿐이니까요.      


이들은 자신의 감정은 있는 그대로 표출하면서 아이가 감정을 표현하면 불편해합니다. 정서적인 연결을 거부하며 아이와 친밀한 관계의 가치를 알지 못하죠.     

 

이들이 말하는 자신의 ‘생각’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가 원하는 대로 하게 만들어야 해.’라는 이기적인 욕구만 있을 뿐, 감정 하나 느끼는 것조차 부모에게 허락을 맡아야 하는 아이를 위한 배려나 이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수치심과 죄책감을 이용해 자녀에게 정서적인 벌을 준다.   

   

나르시시스트 부모에게 정서적 학대를 받은 아이는 성장하면서 때때로 부모에게 저항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부모는 자신의 처지를 낙담하며 아이로 인해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를 호소하죠.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며, 정말 모욕적이고, 부모를 그렇게 대하면 안 된다는 식’으로 아이에게 수치심과 죄책감을 느끼게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필요할 때 아이에게 보였던 작은 친절함마저 회수해 버립니다. 아이는 부모를 잃을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히면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죠.     

 

나르시시스트 부모가 내리는 벌은 단순히 아이로부터 사랑과 관심을 착취하는 것만이 아니라, 가뭄에 비 오듯 주어졌던 애정마저 주지 않음으로써, 아이로 하여금 부모의 말을 듣지 않으려 했던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틀렸다는 ‘자기 회의’에 빠지게 만듭니다.      

   

나르시시스트 부모 옆에 있는 자녀는 외로움과 절망감을 느낀다.      


이들은 아이의 이야기는 대충 넘겨 들으면서 자신의 말은 경청하라고 요구합니다.

아이가 힘들다고 해도 “걱정 마. 엄마 말대로 하면 잘 될 거야.”라고 아이의 고민과 걱정은 압축해 버리고 자신의 문제는 과대포장하죠. 


과연 이런 부모에게 진정한 연민과 공감을 받을 수 있을까요.      


이러한 부모는 아이를 진심으로 안아주지 못합니다. 아이가 고통스러워해도 가식적이고 인위적인 위로를 건네는 것처럼 보이죠. 


당연히 아이는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모든 상황과 문제를 자신과 결부 지어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자기 참조적 태도를 보이니, 이들에게 아이는 우선순위가 될 수 없는 겁니다.           


그런데, 백설공주의 새엄마처럼 미녀와 야수의 야수도 거울을 봅니다. 

하지만 거울을 깨뜨려 버리죠. 흉하게 변한 자신의 모습을 혐오하니까요.      

자신의 모습을 혐오하고 경멸하는 야수가 부모라면?

이렇게 자기를 혐오하는 부모는 나르시시스트보단 좀 나을까요?  


자기 혐오자인 부모는 언제나 자신을 비난하고 자책하기에 죄책감과 열등감이 넘쳐흐릅니다.      


윤리학자인 너스바움에 의하면 ‘혐오는 인지적 구성에 의해 형성되는 생각’으로, 오염원이 나의 내부로 들어와 나의 존재를 위협할 것 같은 위기에서 유발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자기를 혐오한다는 것’은 ‘자기를 무언가를 더럽히는 오염원과 동일하게 취급’하는 거죠.      


나를 더럽히는 원인이 바로 나이기에, 나 자신이 미워하고 싫어하는 대상이 됩니다. 


자기혐오에 빠진 부모는 자신의 외모, 성격, 행동, 능력 등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않고, ‘왜곡된 당위의 법칙’을 적용합니다.      


‘왜곡된 당위의 법칙’이라고 하니, 대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쉽게 설명하면 이런 거죠.    

  

예전에 예능 프로그램에서 상대가 어떤 말을 해도 “당연하지.”라고 말해야 이길 수 있는 게임이 있었는데요.       

“너 연예인 OOO랑 사귀지?”라는 곤란한 질문에 설사 그렇지 않다고 해도 “당연하지.”라고 답을 해야 공격권이 넘어오니, 무조건 “당연하지.”라는 말을 하는 거죠.      


자기 혐오자인 부모는 무조건 ‘당연하지,’라는 답을 자신에게 강요합니다.  

    

나는 좋은 남편이자 아버지라고 인정받기 위해서는 나만의 시간 따윈 갖지 말아야 해. 

나는 아이들의 사랑을 얻기 위해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무조건 들어줘야만 해. 

나는 가족에게 존경받기 위해 어려운 일이 생겨도 좌절하지 말고 인내해야 해.     


이렇게 무조건 ‘~해야만 해’라는 원칙을 자신에게 적용하면 내면에는 혹독한 채찍질을 하는 감시자가 절대 권력을 갖게 됩니다.      


'오늘은 피곤하니까 아이들이랑 놀이터에 가지 말까?'라는 생각이 들면, 채찍질이 시작되는 거죠.      

'무슨 소리야. 좋은 아빠라면 애들이랑 한 약속은 어기지 않아.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만 해.'    

  

‘무조건!’, 어떤 조건도 달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든 해야 한다는 ‘왜곡된 당위의 원칙’을 지키다 보면 자기는 망가지고 파괴됩니다.      


자기혐오게 빠진 사람은 왜 이런 법칙을 자신에게 강요하는 걸까요?



미녀와 야수의 '야수'처럼 흉하게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을 혐오하고 경멸하기 때문입니다. 


자신과 관련이 별로 없는 일이라도 결과가 나쁘면 자신이 못났기 때문이라고 자기 탓을 하죠.      

이러한 '자기혐오'는 '열등감'과 깊은 관련이 있는데요.      


모든 아기는 연약하고 무력하며 그 상태가 오래 지속된다는 것을 고려할 때, 그들에게 삶이란 무한한 어려움 그 자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모든 정신적 삶은 다소 차이가 있지만 심한 열등감과 함께 시작된다는 사실을 직시할 수밖에 없다(Alder, 2016).      


아들러의 말대로 아이는 태어나서 다양한 실패를 경험하고 성장합니다. 그러니 열등감을 느끼는 건 자연스러운 겁니다. 


문제는 이 열등감을 어떤 일을 성공적으로 해내기 위한 동기로 삼는 것이 아니라, 열등감 자체에 과도하게 몰입해서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생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거죠.      


호나이는 자기혐오에 빠진 사람들에겐 ‘희망을 짓밟는 경향(crushing of hope)’이 있다고 말하는데요. 


공황장애를 겪는 사람이 상태가 좋아져도 ‘너는 절대 공황 증상을 극복하지 못할 거야.’라며 스스로 희망의 불씨를 사그라 뜨린다는 거죠. 이런 증상이 심해지면 자학을 하기도 합니다.      


승진을 못하거나, 직장에서 따돌림을 당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말실수를 하거나, 아이에게 잔소리만 해도 자신에 대한 혐오에 빠져, 자기 머리를 쥐어박고, 팔을 할퀴거나, 뺨을 때리는 등 자신을 학대하는 모습을 보이죠.      


이러다 보면 자기를 파괴하는 행동이 일상이 됩니다. 계속해서 자신을 괴롭히며 자신을 싫어하는 감정을 멈추지 않는 거죠. 손톱을 물어뜯는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 자신의 목을 조르는 것처럼 매우 위험한 행위까지 점점 파괴의 범위가 확장됩니다.     

 

자신을 의심하고 깎아내리고 비웃는 부모를 보고 자란 아이는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는 일은 즐겁거나 행복한 일이 아니라 상처와 고통뿐이라는 편견을 갖게 되겠죠.      


심지어 친구가 줄넘기를 잘한다며 인정하고 칭찬해 줘도 아이는 자신의 성취를 부인하며 친구가 자신의 기분을 좋게 만들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고 믿는 겁니다.    

  

그럼, 나르시시스트인 백설공주의 ‘새엄마’와 자기 혐오자인 미녀와 야수의 ‘야수’가 만나 결혼을 해서, 부모가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아이에게 가정은 건강한 성장을 경험할 수 없는 최악의 환경이 되고 말겠죠.      

나르시시스트와 자기 혐오자가 나의 부모라면?


“축구 경기에 참석하지 않는다고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니잖아? 그래봤자 너는 줄곧 후보선수였는데 오늘 경기에 나간다는 보장도 없고. 엄마는 오늘 중요한 모임에 가야 하니 네가 아빠가 올 때까지 동생을 봐야 해.”

“다른 애들은 오늘 다 온다고 했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엄마가 너 때문에 모임에 못 가도 좋아? 그러면 사람들이 엄마를 약속도 안 지키는 몰상식한 사람이라고 볼 텐데. 그래도 괜찮다는 거야?”

“......”
 “그런 기분 나쁘다는 표정 짓지 마. 엄마 약속이 훨씬 중요한 거야. 너는 다음에 가도 되니까 동생이나 잘 봐.”     


퇴근한 아빠는 울상을 짓고 있는 첫째를 보자 심장이 뜁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엄마가 나는 축구 경기 못 가게 하고 엄마는 친구들 만나러 가고......”

“그거야. 엄마는 중요한 모임에 가는 거잖아.”

“내 축구 경기도 중요해!”

“아빠가 휴가라도 내고 축구 경기에 가게 할걸. 미안해. 그런데 엄마는 모임에 빠지는 걸 싫어하잖아. 엄마가 아빠 같은 사람 만나서 하고 싶은 것도 못하고 사는데, 너까지 그러면 속상할 거야.”

“아빠는 엄마 편만 들잖아. 아빠 미워!”

“그래. 아빠가 뭐 잘하는 게 있겠어? 그러니 아무도 아빠를 안 좋아하지. 아빠도 알아. 아빠만 사라지면 다들 잘 살 텐데.”     


이런 부모에게서 자란 아이의 미래가 그려지세요?


사람들은 세상을 보고 온갖 역경이 도사리고 있는 위험한 곳이라고 말하지만, 이 아이에겐 집이 가장 무서운 곳인 거죠. 실은 제가 예를 든 것보다 더 잔혹한 일들이 집이라는 곳에서 벌어지곤 하니까요.     


자기만을 사랑하는 부모와 자기를 가장 싫어하는 부모, 그 속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기대지 못하고 정서적인 욕구를 홀로 자급자족하며 크는 아이     

그리고 그 아이가 부모가 되면, 악순환은 다시 시작됩니다.      


나의 어린 시절은 어땠나요?     


나의 부모의 삶을 이해하는 일은 부모가 된 나를 알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입니다. 

하지만 재차 말씀드렸다시피, 부모를 원망하고 탓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섭니다.  

    

그럼, 부모에게 그동안 쌓인 감정을 말하고 사과를 받으면 될까요?

아니요. 어쩌면 부모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거나 사과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살아온 삶 전체가 오류 투성이가 될까 봐 두려우니까요. 


바로잡은 건 나를 위해서니, 부모가 아닌 내가 해야 합니다.      

최소한 나는 나의 아픈 부분과 그 이유를 알고, 그것을 직면할 수 있는 용기가 있으니까요. 

(그러니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겁니다.)


만약 나르시시스트와 자기혐오에 빠진 부모에게 받은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다면, 속상하고 억울하고 답답하겠지만, 망가진 부분은 내가 직접 수리해야 합니다. 


백설공주의 새엄마 같은 엄마와 미녀와 야수의 야수 같은 아빠에게 자랐더라도,
삶에는 빛과 같은 존재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통해 진심 어린 사랑과 관심을 나누며
건강한 애착을 경험할 가능성은
언제나 남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그래야 아이와의 관계에서도 희망을 발견할 수 있으니까요.


앞으로 나의 부모를 이해하고 화해하는 과정에 대해서도 알아보겠습니다.            



참고문헌

Nussbaum, M. (2015). 혐오와 수치심(조계원 역). 서울:(주)민음사. 

Adler, A. (2016). 아들러의 인간이해(홍혜경 역). 서울: ㈜을유문화사.


사진출처

https://blog.naver.com/dlwjddms94/222229335384    

https://blog.naver.com/kwac1981/22041256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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