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의 베드 핏의 원인인 부모의 '수치심' 이해하기
아이와의 베드 핏의 원인인 부모의 수치심에 대해 알아보고 있는데요. 지난 시간에 이어 오늘은 수치심은 나쁘기만 한 감정인지, 과도한 수치심을 보이는 사람들은 어떤 특징을 보이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는 능력은 생존에 필수적이죠.
제가 자주 드는 예인데, 길에서 갑자기 곰을 마주치면 곰이 나를 해칠 것인지, 나를 피해 도망갈 것인지(곰이 다치지 않았다면 가능성이 희박하지만) 단 몇 초의 순간에 곰의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나를 점심으로 생각했다고?’라는 판단이 서면 바로 도망쳐야죠.
그렇게 다른 대상의 마음을 읽는 능력을 ‘마음이론’ 또는 '조망수용능력'이라고 다른 글을 통해 설명했는데요.
https://brunch.co.kr/@459430a354354ac/39
교토대학교의 다카하시 히데이코 교수는 '수치심'과 '마음이론'간의 관계에 대해 흥미로운 실험을 했습니다.
‘정장을 입어야 하는 파티에 평상복 차림으로 갔다.’
‘남대문이 열렸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 예절을 몰라 쩔쩔맸다.’와 같은 수치심을 느꼈던 상황을 떠올리자, 뇌의 내측 전두피질과 위측두고랑 부위가 활성화된 겁니다. 그 부위는 ‘마음이론’에 관여하는 곳이죠.
왜 그랬을까요?
나의 실수를 본 상대의 마음을 읽고,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알기 때문이죠.
지펴가 열려도 아무도 보지 못하고 집에서 나오기 전에 알았다면 수치심을 느끼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미 밖으로 나와 돌아다니다가 화장실에 가서 알게 되면 누군가 ‘어머, 저 사람 지퍼 열린 것도 모르나 봐.’라고 비웃었을 거라는 생각에 얼굴이 화끈해집니다. 나를 비웃은 상대의 마음을 읽어버린 겁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추론하는 능력, 즉 '마음이론'이 발달하면서 수치심도 생겨난다는 겁니다.
공동체에서 살아가기 위해, 상대의 마음이 어떤지를 알고 자신의 행동을 적절히 조절하는 것은 필요하니까요.
이렇듯 수치심은 꼭 나쁜 감정만은 아닌 겁니다.
우리가 방금 한 행위가 갑자기 창피하다고 느꼈다는 바로 그 사실에서 수치스러운 행위는 우리에게 어떤 축소가 발생했음을 알린다.
그러한 축소는 다음 행위에 대한 경고를 의미하며, 우리의 자존감을 낮추라는 요청이기도 하다(Fisher, 2023).
하버드대학의 영문과 교수인 피셔의 말대로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상황에서 정당하고 합리적으로 발생하는 수치심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해야 할 것의 경계선을 자각하도록 돕는데요.
동생의 장난감을 억지로 뺏으려다 부모에게 들킨 아이가 느끼는 창피함은 앞으로 같은 행동을 하지 않도록 자신에게 알려주는 신호가 되는 거죠.
이렇듯 우리는 수치심을 통해 ‘완벽하다고 믿고 있는 자기 영역’과 ‘실제 자기 영역’ 간에 차이가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도덕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새치기를 하거나 다른 사람의 약점을 들춰내는 모습을 보이면, 아이는 부모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때 부모가 수치심을 느끼고 자신의 행동을 변화시키면, 아이는 적절한 수치심이 왜 필요한지 알게 되는 거죠.
수치심은 다양한 형태의 목적과 이상을 지향하도록 우리를 자극하며, 그러한 목적과 이상의 일부는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수치심은 자주 우리에게 '진실'을 들려주기도 한다.
수치심은 우리가 될 수 있는 어떤 존재, 즉 좋은 일을 하는 착한 사람이 되려는 욕구를 표현한다(Nussbaum, 2015).
너스바움의 주장처럼 ‘내가 수치심을 느끼는 부분은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을 반영’합니다.
홧김에 아이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한 것이 부끄럽게 느껴진다면, 그 수치심 안에는 ‘나는 아이에게 긍정적인 표현을 하는 아빠가 되고 싶어.’라는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이 드러나 있는 거죠. 그렇게 수치심은 진실을 말해줌으로써 내가 바라는 사람이 되도록 종을 울려 줍니다.
아이는 자기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동화 속에 살다가 자신의 능력과 한계를 알게 되면서 현실로 추락하는데요. 이때 부모가 그러한 아이의 모습을 부끄럽게 여기면, 아이는 자신을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인식합니다.
나라는 존재가 한없이 작고 쓸모없다는 생각과 그래서 수치스럽다는 감정을 지속적으로 경험하면, 우울과 분노 같은 적대적 감정이 축적되어, 누군가 자신의 수치심을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그 사람과의 관계를 차단해 버리는 방어적인 사람이 되는 거죠.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자신 없는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에 관해 솔직하게 말하지도 않고 상대가 허심탄회하게 속마음을 말하는 것도 반기지 않는데, 바로 수치심 때문이죠.
나의 약점과 잘못이 드러나거나 상대의 결점과 실수가 보일 때, 부끄럽고 불편한 감정을 느끼는 겁니다. 다른 사람 앞에서 아이가 작은 말실수만 해도 지나칠 정도로 아이를 혼내는 부모는 수치심을 피하고 싶어 아이를 비난하는 거죠.
이들은 사람들과 만나는 일이 즐겁지 않습니다. 언제 어디서 자신의 수치심이 드러날지 모르니까요.
자신의 민낯을 보이는 것이 두려우니 웬만하면 인간관계의 영역을 축소시키며 자신이 안전하다고 믿는 곳에서만 생활하려 하죠.
어떤 일을 할 때 제대로 하지 못해 자신과 상대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까 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을 ‘수행 불안’이라고 하는데, 수치심에 사로잡힌 사람은 미리 부정적인 결과를 예측해서 어떤 일이든 자신 있게 해내지 못합니다.
공적인 상황에서 의견을 말하거나 심지어 자신을 소개하는 순간에도 긴장과 초조함으로 인해 말을 더듬거나 몸이 굳어진다면 신체적 반응 아래 감춰진 수치심을 먼저 들여다봐야 하죠.
수치심은 이유 없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동기와 목적이 있죠.
아이가 영어로 된 동화책을 읽어달라고 하는데 행여 모르는 단어가 나올까 봐 나중에 읽어준다면서 상황을 피하면, 당연히 수치심을 느낄 일도 없겠죠. 물론 영어 단어를 모르는 게 부끄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과도한 수치심에 시달리는 사람은 실패나 실수할 가능성을 낮추기 위해 아이와의 사이에서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시도하지 않고 무관심한 태도로 수행불안을 보입니다.
수치심에 노출되지 않는 방법으로 한치의 부끄러움 없는 '가짜 자아'를 만들기도 하는데요.
이러한 가짜 자아는 ‘나는 부끄러움이나 모욕감을 느낄 약점을 전혀 갖고 있지 않기에 수치심 따위를 느낄 수 없다’고 생각하죠.
이런 사람들에게 세상은 연극 무대와 같습니다.
어릴 때 드레스를 입으면 공주라고 믿으며 우아하게 걷고 품위 있는 말투를 흉내 내거나, 허리에 장난감 칼을 차면 장군이 되었다고 상상해서 겁 없이 뛰어다닌 것처럼, 가짜 인격을 만들어 그게 실제 나라고 여기며 수치심을 감추는 겁니다.
만약 누군가 ‘너 공주 아니잖아. 너 장군 맞아?’라는 의심을 하면, 거짓말을 하거나 상대를 비난하며 가짜 자아를 지키려고 애쓰죠.
심리학자인 매슬로우는 건강한 사람이라면 타인에게 상처를 주거나 편견이나 질투를 느끼거나, 부주의하거나 나태함으로 인해 피해가 발생할 때, 수치심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심리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수치심을 활용해서 이상적인 자기와 현실적인 자기 사이의 간극을 줄여 심리적인 안정감을 유지한다는 겁니다.
아이의 생활에 지나치게 개입하지 않고 아이와의 경계를 지키는 엄마가 되고 싶은데, 매사 잔소리를 하며 아이의 행동을 지적할 때,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면서 수치심이 느껴진다면, 이때 수치심은 아이와의 건강한 관계를 만들기 위해 현실의 나를 조정해야 한다는 신호를 보내는 거죠.
마치 조미료처럼 적당히 넣으면 수치심은 우리 삶에 감칠맛을 내지만,
너무 많이 넣으면 내가 가진 본래의 맛을 잃게 만듭니다.
아이와의 사이에서 나의 '수치심'은 어떤 맛을 내고 있나요?
다음에는 과도한 수치심의 수렁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참고문헌
Nussbaum, M. (2015). 혐오와 수치심(조계원 역). 서울:(주)민음사.
Fisher, P. (2023). 열정에 대하여(백준걸 역). 서울: 도서출판 앨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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