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의 베드 핏의 원인인 부모의 마음속 독이 되는 감정, '분노'
지난 시간에 이어 '분노라는 감정이 정말 불필요한 감정'인 건지, 또 '분노는 어떻게 발달'하는지에 대해 알아볼게요.
새 옷만 좋아하는 사치스러운 한 임금이 멍청이 눈에는 보이지 않는 세계 제일의 옷을 입었다고 자부하며 벌거벗은 채 돌아다니다 사람들에게 조롱과 비웃음을 받습니다. 남들에게 추앙받고 싶던 임금님, 왜 이런 꼴이 되었을까요?
아들러는 사람들이 화를 내는 이유가 자신에게 대항하는 상대의 저항을 빠르게 힘으로 진압하기 위함이라고 보았는데요. 분노를 표출하는 사람들은 그 순간,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집결해서 자신이 상대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입증하려 한다는 겁니다.
누군가 나의 의견을 무시하거나, 가까운 사람들이 나만 소외시키면, 우리는 '자기 가치(self-worth)'를 상실하게 됩니다. 사람들에게 '나는 능력 있고 중요한 사람이야'라는 나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니, 서운함과 슬픔, 외로움과 짜증과 같은 감정들이 축적되어 화가 나는 거죠.
이럴 때 아들러의 주장대로 분노를 드러내서 상대방의 잘못을 비난하면, '내가 너보다 더 대단하다.'는 우월감을 느끼면서, 자기에 대한 가치감을 ‘일시적’으로 높일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향상된 '자기 가치'는 진짜 자존감과는 거리가 멀죠. 말 그대로 상대가 자발적으로 잘못을 인정하며 나의 판단과 생각이 옳음을 인정한 게 아니라 힘으로 얻어낸 것이니까요.
매일 새 옷을 입는 임금이 신하들에게 세계에서 가장 멋진 옷을 만들라고 독촉합니다. 화를 내며 새 옷을 가져오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도 하죠. 임금의 명령대로 하지 않으면 어떤 불이익이 있을지 모르니 꾀를 낸 것이 보이지 않는 세계 제일의 옷이었던 겁니다.
임금은 자신의 권력으로 신하들에게 '당신 멋지고 대단한데!'라는 칭찬을 받았지만, 그건 거짓으로 꾸며진 시인일 뿐이죠. 실은 '힘 있다고 허세나 부리고 함부로 사람들을 대하는 인간'이라는 평가절하를 당하고 있으면서요.
그러니 분노를 통해 사람들에게 우월하다는 인정을 받는 건,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보이지 않는 옷을 입은 채 나는 힘세고 멋지다고 우기는 만용에 불과합니다.
사실, 부모가 아이에게 화를 내는 이유가 ‘나는 너보다 더 큰 힘을 갖고 있으니, 내가 하라는 대로 해.’라는 생각으로 마음대로 아이를 통제하면서,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란 걸 과시하려 한다는 가정은 너무나 비약적이죠.
때로는 아이의 잘못된 행동을 멈추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분노를 이용하는 부모도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부모가 그런 목적으로 화를 내는 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아이의 삶을 망치기 위해 화를 내는 부모는 없다고 봅니다.
아이가 성급한 판단과 결정을 할 때 불필요한 시행착오를 겪지 않도록 도움을 주고 싶은데, 빠르고 효과적인 수단이 분노라고 여기는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거나,
내면에 어릴 적부터 오랫동안 해소되지 않은 '미해결된 문제'가 있거나,
'신체적으로 지나치게 피로'하거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부당한 대우를 당한 일'이 누적되어 분노를 잘 조절하지 못하는 성격으로 인해 자주 분노를 표현하는 걸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정당한 이유라고 해도 부모의 지나친 분노가 자녀와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요인인 점은 분명하죠.
로즈와인(2021)은 사람이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면 이를 이루기 위해 어떤 도움이 필요한데, 그런 점에서 분노가 유용하다고 주장합니다. 스티븐스(2023)도 분노가 자신이 취약하다는 느낌에서 우리를 보호한다고 하여, 분노가 부정적인 감정만은 아니라고 보았죠.
"하지 마! 그건 나쁜 행동이야!"
집단에서 누군가를 배제시키는 따돌림은 특히 아이의 경우, 마음에 깊고 거친 자국을 남깁니다. 매일 보는 친구들이 자신을 무시하고 비난하는 일을 견디는 건 엄청난 고통이니까요.
언젠가 무더위가 한창인 무렵, 마당에 묶여있는 강아지를 보았는데, 목줄이 너무 짧아 작열하는 태양을 피하지 못해 낑낑거리며 제자리만 맴돌고 있었죠.
아이는 아무리 싫어도 학교를 가야 합니다. 그리고 피할 수 없는 학대를 견뎌내야 하죠. 태양빛이 너무 뜨거워 탈수증세를 일으키면서도 목줄 때문에 움직일 수 없는 강아지처럼요.
이렇게 다른 사람으로부터 정당하지 않은 대우를 받는다면, 우리는 분노를 통해 내가 화가 났다는 것과 상대의 행동이 잘못됐다는 사실을 알려야 합니다.
중요한 건 "하지 마! 그건 나쁜 행동이야!"라고 분노를 표현하면서, 아이는 예상했던 것보다 자신이 약하지 않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분노는 살아가며 겪게 되는 다양한 위험에 대한 '보호장치'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분노를 드러내는 대상 및 상황을 통해 '내가 어떤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인지를 시사하기도 합니다.
하버드대학 석좌교수인 필립 피셔는
“상대방이 인지한 분노는 내가 피해 또는 무시로 간주하는 행위가 발생했음을 그와 주변 사람들에게 알린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일에 화를 냈을 때 나는 많은 경우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종류의 무시 또는 나의 가치에 대한 암시적인 폄훼가 나의 분노를 촉발하는지를 발견한다는 사실이다.”라며 분노가 우리 삶에 매우 유용한 감정이라고 피력합니다.
무슨 말이냐면,
어떤 사람은 새치기를 당해도 순순히 참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순서를 지키라며 상대에게 화를 내기도 하죠.
내가 기다린 시간과 타인으로부터 무시당하는 느낌으로 인한 피해를 그냥 넘길 수 없다고 판단하면, 우리는 화를 내는 겁니다.
이 상황에서 분노가 생겨날 때, 머릿속에선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따라가 볼까요.
새치기를 하는 상대는 내가 나약해서 새치기를 당해도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나는 나의 권리조차 지킬 수 없는 무능한 인간으로 취급받는 것을 참을 수 없다.
따라서 나는 내가 무력하지 않다는 사실을 분노를 통해 보여줄 것이다.
분노가 유발되는 상황을 보면,
내가 어떤 부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지(무능하다는 평가)를 알 수 있고,
내가 그것에 중요한 가치를 두는 이유(어린 시절부터 나약하며 능력이 없다는 비판 때문에 내재된 불만)가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나의 분노를 통해 내가 무엇을 중시하고 어떤 유형의 무시와 거부를 싫어하는지를 확인하며 '나란 사람의 정체성‘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됩니다.
16개월밖에 안 된 아이가 양부모에게 학대를 당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우리 사회는 분노로 끓어올랐습니다. 사람들은 변명만 늘어놓는 양부모를 엄중하게 처벌해 달라며 시위를 하고 탄원서를 작성했죠. 자신과 직접 관련이 없는데도, 아이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연민은 사람들의 분노를 일으켰고, 그러한 분노에는 스스로를 지킬 수 없는 아이의 생명과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는 그들의 가치관이 반영되어 있었습니다.
이처럼 분노는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인간의 가장 중요한 권리인 존엄이 훼손될 때 이를 강력하게 막는 저항의 수단이 된다는 점에서 무조건 부정적으로 취급되서는 안 되는 감정인 거죠.
우리는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화를 내진 않았습니다.
다른 감정과 마찬가지로 분노도 처음에는 단순한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더 복잡하고 정교하게 발달해 가니까요.
유아가 화를 내는 이유와 사춘기 아이가 화를 내는 이유는 감정의 질적인 측면에서 다른데요.
아이는 처음에는 ‘분노=화’라고 인식하지만, 성장하면서 부모뿐만 아니라 친구, 주변 사람들, 미디어와 학교에서의 교육 등을 통해 ‘분노=슬픔’, ‘분노=실망’, ‘분노=사랑’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합니다.
“너 정말 계속 이럴래?!”
아이가 약속을 어기고 귀가 시간을 지키지 않아 화가 난다면,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지는 않을까 걱정되는 두려움’이나 ‘부모에게 연락조차 하지 않은 아이에 대한 서운함’과 같이 복합적인 감정들이 분노로 표출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보세요.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걱정했어. 앞으론 늦으면 미리 연락을 해주면 좋겠다.”
부모가 아이의 안전을 염려하고 아이에게 중요한 사람으로 대우받고 싶은 마음을 화로 표현하면, 아이도 공격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말이든 ‘화’라는 옷을 입고 등장하면, 거부감이 생기기 마련이니까요.
미국 위스콘신 그린베이 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인 마틴은 성인이 된 후에도 분노와 같은 정서는 상호작용, 모델링, 보상, 처벌과 같은 경험을 통해 변화하며 발달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분노라는 감정은 성인이 되어서 더 강해질 수도 있고 반대로 잘 통제될 수도 있다는 건데요.
즉, 분노는 계속해서 발달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발달’이란 방향을 정하는 일입니다.
분노는 감정이고, 감정은 경험을 통해 발달하며, 발달의 방향은 어떠한 경험을 했고 그 경험을 어떻게 해석하며 받아들였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거죠.
내가 분노를 발달시키려는 방향이 어떻게 설정되어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는 겁니다.
자주 화를 내며 분노에 대한 감각을 기민하게 갈고닦는 이유가 불합리한 상황에서 나를 보호하기 위함인지, 내가 원하는 것을 빠르고 효과적으로 얻기 위함인지, 상대에게 무시당하지 않고 내가 더 낫다는 우월함을 드러내기 위함인지와 같이
나의 분노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좌표를 알지 못하면 그 종착지는 내가 소중하다고 여긴 것들이 모두 추락할 수밖에 없는 낭떠러지일 수도 있으니까요.
아마 내가 아이에게 화를 내는 건 아이 때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아이의 말과 행동이 건드린 나의 상처가 나를 분노하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죠.
부모가 자신이 해결하지 못한 내면의 문제로 인해 아이에게 자주 화를 내면
아이는 자신이 한 행동보다 과도한 처벌을 받는다고 느낍니다.
아이가 하루에 얼마나 많은 지적과 비판을 듣고 사는지. 반대로 얼마나 많은 인정과 격려를 듣고 사는지.
때로는 잘못해도 대가를 치르지 않고 용서받고 이해받는 ‘행운’이 있어야 세상이 좀 덜 무섭게 느껴지지 않을까요?
'내가 한 것 = 내가 받는 것'이라고 믿으면, 세상이 공평한 게 아니라 오히려 냉정하다고 느껴질 겁니다.
왜냐면 사람은 미숙에서 성숙으로 나아가는 존재고, 아이는 아직 미숙한 상태니까요.
미숙하니까 미숙한 대접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면, 그래서 아직 성장 중인 아이가 저지르는 잘못과 실수에 대해 연령과 상황과 같은 맥락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엄격하게 따져서 벌을 준다면, 아이는 매일 재판장에 끌려가는 기분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잘하면 상도 받겠죠. 그런데 어떻게 잘하기만 할까요.
그리고 잘못하면 바로 대가를 치르는데, 긴장해서 잘할 수나 있을까요?
그러니 분노하기에 앞서, 내가 아이에게 내리는 이 처벌이 과한 건 아닌지,
나는 아이에게 잘못을 저질러도 그냥 용서받고 이해받는 ‘네 잎클로버’를 주고 있는지, 직진하려는 화를 멈춰 세우고 질문해 보세요.
때때로 잘못해도 혼나지 않고 "괜찮아."라는 이해와 수용을 받게 되면, 아이의 마음엔 네 잎클로버가 자라나겠죠?
단 몇 초면 됩니다.
부모가 화를 내려는 순간, ‘네 잎클로버’만 떠올려도
아이는 오늘 '행운'을 얻게 될 테니까요.
참고문헌
Adler, A. (2016). 아들러의 인간이해(홍혜경 역). 서울: ㈜을유문화사.
Fisher, P. (2023). 열정에 대하여(백준걸 역). 서울: 도서출판 앨피.
Rosenwein, B. H (2021). 분노란 무엇인가(석기용 역). 서울: 하빌리스.
사진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