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육육진심 Apr 01. 2024

분노 후에 남겨진 것들

부모의 분노는 아이와의 관계에 무엇을 남길까?

아이와의 관계에 ‘베드 핏’을 유발하는 부모의 ‘분노’에 대해 알아보고 있는데요.

이번 시간에는 구체적으로 분노가 아이와의 사이에 어떠한 상흔을 남기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이전 글에서 분노를 적절히 활용하면, 괴롭힘이나 소외와 같이 부당한 상황에서 자신을 보호하고, 불합리한 일을 바로잡기 위한 정의로운 태도를 갖게 된다고 말씀드렸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화’는 양육과정에서 항상 관리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전문가들은 왜 자녀와의 관계에서 분노라는 감정을 잘 다루어야 한다고 경고할까요?     



부모가 분노를 잘 다뤄야 하는 이유 첫째, '분노는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긴다.'     

 

세네카는 “화가 사치보다 더 나쁜 이유는 사치는 자신만의 쾌락을 좇지만 화는 남의 고통을 즐기기 때문이다. 화는 악의와 시기심을 능가한다. 악의와 시기심은 그저 다른 사람들이 불행해지기를 바라고 그들에게 불운이 닥쳤을 때 기뻐한다. 하지만 화는 자신이 증오하는 사람에게 불운이 찾아와서 피해를 입혀주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화는 자신이 직접 그들을 해하고자 한다.”라며 분노의 파괴적 성격을 비판합니다.

   

부모가 화가 난다고 자신의 감정을 고스란히 분출하는 건 아이에게 상처를 주는 처벌적인 행위라는 겁니다.


물론 아이가 모르고 한 행동이 아닌, 의도적으로 부모나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기 위해 저지른 일에 침묵하는 것은 바람직한 양육태도가 아닙니다. 부모와 아이 모두 부당하고 불합리한 일에 대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솔직히 밝히는 것이 맞지요.


다만 세네카는 화를 똑같이 화로 되갚아 주는 행동의 위험성을 알려주는 겁니다.

부모가 화가 났다는 사실을 아이에게 표현하되, 자신이 받은 고통과 피해를 되돌려주어서는 안 된다는 거죠.      

왜냐면 분노가 지나간 자리엔 어떤 식으로든 ‘흔적’이 남기 때문입니다.     


저는 분노가 어떤 식으로 부모와 아이의 관계에 흔적을 남기는지 ‘정서 랙(lag)의 도미노 효과’를 통해 설명합니다.


                                                                      

위의 도식에 나와 있듯이, 만약 아이가 ‘유전적으로 까다롭고 예민한 기질’을 갖고 태어났다고 가정해 볼게요.


이 아이에게 ‘둔감하고 산후우울증을 앓고 있는 엄마’라는 환경적 요인이 가해지면, 아이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엄마를 통해 경험하는 감정이 ‘우울과 무기력, 슬픔과 절망’ 뿐이니까요.


엄마가 아이가 느끼는 정서를 잘 ‘반영’해줘야 아이도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하게 되는데, 엄마는 아이가 기쁘거나 흥분되거나 신이 나도 늘 똑같은 ‘우울’이라는 감정으로 반응을 보이니, 아이의 정서는 미숙한 상태에서 발달하지 못하죠.      


이렇게 되면, 정서적으로 상호작용이 잘 안 되는 아이로 인해 엄마의 스트레스 수준이 올라갑니다.

우울증으로 인해 심리적 에너지가 낮은 상태에 스트레스까지 가해지니, 아이를 돌보는 일에 쉽게 피로를 느끼죠.

엄마는 아이와의 대화와 접촉을 점점 피하게 되고, 결국 아이가 경험하는 엄마와의 관계 즉, '환경적 맥락'도 변하게 됩니다.      


이렇게 엄마의 무관심하고 거부적인 태도와 반응으로 인해 아이와 엄마 간에 정서적 유대가 불안정해지면, 아이의 분노 조절을 방해하는 유전물질이 활성화됩니다.


예전에 ‘잘 놀라는 쥐’ 기억나시나요? 환경에 의해 잠들어있던 아이의 분노 관련 유전물질이 깨어나는 거죠.

 https://brunch.co.kr/@459430a354354ac/32

후성유전이란 다양한 맥락 또는 상황에 따라 유전 물질이 활성화되거나 비활성화되는, 즉 발현되는 방식을 일컫는다(Moore, 2023).


후성유전의 영향을 받아 아이는 화를 조절하지 못하는 유전자가 활성화된 아이는 작은 일에도 폭발적으로 감정을 드러냅니다. 이렇게 아이의 정서는 이전 단계의 영향을 받아 도미노처럼 무너지면서 발달이 느려지게 되죠.      


저는 이것을 ‘정서 랙(lag)의 도미노 효과’라고 부릅니다. 다시 말해, 정서에 ‘랙(lag)’이 걸리는 건데요.

보통 컴퓨터가 작동 속도가 느려지거나 먹통이 될 때 ‘랙’이 걸렸다고 표현하는데, 여기서 ‘lag’은 ‘~보다 뒤쳐지거나 뒤떨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정서 랙(lag)의 도미노 효과’는 유전과 환경적 요인들로 인해 아이의 정서발달이 뒤처지거나 먹통이 되면, 부모가 아이를 양육피로감이 누적되고, 그로 인해 아이의 분노가 촉발하여 다시 아이의 정서발달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연쇄적인 현상을 뜻합니다.    

  

아이가 분노를 통제하지 못하면 까다롭고 예민한 기질은 더욱 자극을 받게 되고 그러면 도미노가 무너지는 과정이 반복되며 부모와 자녀 사이가 악화되는 거죠.


부모와 아이가 자주 화를 내면, 두 사람의 마음에 분노를 향한 지름길이 생깁니다.

더 빨리, 더 쉽게 분노를 향해 돌진하니 멈추지 못하게 되죠.      


혹시 부모인 나와 아이가 모두 분노를 잘 조절하지 못한다면, 정서발달에 랙이 걸린 이유를 찾아 도미노가 무너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정서발달에 랙이 걸리면 부모와 아이 모두 분노라는 감정을 조절하지 못합니다.

아이가 다루기 힘든 기질을 갖고 있다고 해도 부모가 수용적이고 민감한 양육태도를 보이면 도미노는 넘어지지 않습니다. 아이의 분노와 관련된 유전자를 깨우지 않을 테니까요. 또한 부모가 스트레스만 잘 관리해도 아이에게 짜증을 덜 내게 되죠.      


이와 관련된 연구가 있어 소개해드릴게요.


류우리와 장석진(2015)은 초등학교 5, 6학년 아동 500명을 대상으로 부모자녀 관계와 아이의 분노표현에 대한 연구를 실시했는데요.


연구 결과, 부모가 자신의 요구만을 아이에게 강요하지 않고 아이의 능력보다 더 큰 기대를 표현하지 않으며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잘 공급해 주고 아이가 원하는 것을 허용하며 지원해 주면, 자녀는 화가 날 때 여과 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내거나 무조건 속으로 참지 않고 적절한 방식으로 분노를 표현했습니다.

        

부모와 아이가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아이의 분노조절능력이 달라진다는 겁니다.


또 다른 연구로 중고등학생 542명을 대상으로, 부모와의 관계가 아이가 분노를 어떻게 느끼고 표현하는지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한 이은승(2009)은 부모 중 특히 어머니에게 사랑과 존중, 인정을 많이 받는다고 느끼는 아이일수록, 화가 날 때 자신의 감정을 더 잘 조절한다고 주장합니다.


부모 중 특히 어머니에게 격려와 지지를 많이 받는 아이가 화가 날 때 감정을 잘 통제한다는 거죠.


이렇듯 부모와 아이와의 관계는 아이의 분노경험과 표현방식과 관련이 깊습니다.

그 이유는 부모의 분노가 아이의 마음에 상흔을 남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상처는 친구와 선생님, 사회생활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게 만들어 정서발달에 랙이 걸리고 말 겁니다.

말 그대로 본 대로 하고, 받은 대로 돌려주는 아이가 되는 거죠.


많은 부모들이 아이에게 화를 내고 싶지 않다고 말하면서, 정작 어느 부분에서 무너지는 도미노를 멈출 것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균열의 틈을 알면서도 무기력하게 놔두면 언젠가 댐은 터집니다.

그러니 분노가 가 아이와 나 사이에 남기는 잔혹한 흔적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가 분노를 잘 다뤄야 하는 이유 둘째, ‘분노 이전의 나’와 ‘분노 이후의 나’는 다르다.     


마치 분노하는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를 접할 때면, 분노가 만연하는 이유 중 하나가 화를 내는 것이 생존과 번영에 유용하기 때문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는 폭력 수위가 높아질수록 분노하는 사람들의 요구를 수용해 주는 경향이 크죠.

난폭운전을 하는 사람들을 마주치면, 그들에게 경고를 주기보단 피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이성을 잃은 사람들의 보복은 두렵기 마련이니까요.      


우리 사회에서 ‘분노’는 힘을 드러내는 수단이 되었죠.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자주 분노를 이용합니다.      


문제는 아이가 어떠한 거름망도 없이 분노와 관련된 어른들의 부정적인 특성을 내면화한다는 겁니다.      


저기요. 여기 아동학대 해요. 경찰에 신고해 주세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중학교 3학년쯤 되어 보이는 남학생이 아버지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습니다.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아버지가 말을 듣지 않는 아들을 혼내자, 아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도와달라고 소리를 지른 것 같았죠.


아버지는 사람들의 시선에 당황해서 얼굴이 상기되었고 아들은 그런 아버지를 쳐다보며 비웃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놀라 주춤거리자 아이는 더 크게 경찰에 신고해 달라고 외쳤습니다.

마치 아버지의 학대로 피해를 받아 화가 난 것처럼 위장한 채로 말이죠.      


길거리에서 아버지의 훈계 때문에 속이 상한 아이의 마음도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버지를 학대범으로 몰 정도로 아이를 분노하게 했을까요?

아니면 아이는 가짜 분노를 이용해 아버지에게 수치심을 안겨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요?     


분노를 악의적으로 이용한 아이는 그러한 행동을 하기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을 겁니다.

만약 아들이 아버지에게 서운함을 표현하고 집에 가서 이야기하자고 요청했다면, 아이는 분노를 조절하고 다루는 힘을 키웠을 테죠.     


어떤 사람들은 극심한 화를 내고 나면 자신의 약한 부분이 드러났다고 여기며 창피해합니다.

오히려 분노하기 전보다 자신의 결점이 더 늘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죠.

우리는 수치심을 느끼면 분노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분노했다는 사실에 또다시 수치심을 느끼죠.      


우리가 내뱉은 분노와 관련된 언어와 행동은 분명 우리를 다르게 변모시킵니다. 


만약 화가 치미는 순간 아이에게 고통과 창피를 주지 않는 수준에서 분노를 표현했다면, 무조건 화를 쏟아내서 아이를 벌주는 나와는 다른 모습인 거죠.      


중요한 건 ‘분노를 토해낸 후 변한 내가 과연 진정으로 원하는 나의 모습인가?’입니다.      


화를 잔뜩 품은 말을 쏟아낸다는 건 잔인한 말들을 내 안에서 만들어 냈다는 것이고, 그 말에 실린 감정 또한 오롯이 내 것이기에, 분노 이후 나는 전과 달리 더 많은 분노의 언어와 감정을 소유한 사람이 됩니다.       

    

분노 후에 남겨진 것들에 시선을 가져가보세요.

전보다 더 메마르고 거칠어진 부모를 보며, 아이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도 그렇게 변해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분노가 지나간 자리엔 감정에 랙이 걸려 작동을 멈춘 나의 아이와 전보다 더 많은 잔인한 언어와 날 선 감정의 옷을 입은 나만 남게 되겠죠.      


아이와의 관계는 어느 날 갑자기 망가진 게 아닙니다.
별 것 아닌 일에 냈던 짜증과 사소한 것에도 걱정하던 불안에
분노라는 효모가 들어가 거대하게 부풀어졌던 거지요.

그러니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견고하게 도미노를 세워야 합니다.
분노라는 감정이 아이와의 관계를 무너뜨리지 않도록 말이죠.


참고문헌

세네카 (2013). 화에 대하여(김경숙 역). 서울: 사이.

Moore, D. (2023). 경험은 어떻게 유전자에 새겨지는가(정지인 역). 경기: 도서출판 아몬드.


사진출처

https://pixabay.com/

매거진의 이전글 분노가 '네 잎클로버'로 바뀌는 순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