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

by Josh

'자, 회의를 위한 회의를 시작하지.‘부장이 말했다. 매일매일 보지만 부장같이 생긴 부장은 실로 부장같이 차려입고 다닌다. 강남에 수백 수천 개 회사가 있겠지만 카드 셔플처럼 모든 회사들의 모든 부장들을 무작위로 좍 섞어버려도, 아마 부장을 맞바꿈한 수백 수천 개의 회사는 그대로 잘 돌아갈 것 같다. 나는 긴 회의용 원목 테이블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올해 연도가 적당하게 적당한 위치에 찍힌 가죽 장정의 두꺼운 사내수첩과 거래처에서 무심결에 가져온듯한 삼색 볼펜이 있었다. 내가 가져왔는지 누가 가져다줬는지 자각조차 할 수 없었다. 수첩을 열어볼까 생각도 했지만, 솔직히 안에 든 메모 같은 것들엔 실체라는 게 담겨 있을 가능성이 도저히 없었으므로, 일단은 닫아두었다.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 중 한두 명이 필기를 하는 것 같은 기색을 보이면 나도 그때쯤은 수첩을 열고 뭔가를 쓸 텐데. 뭘 쓸까. 쓰기 위한 쓰기. 무언가를 휘갈겨 써도 아마 나는 그걸 다시 읽을 수도 없을 것이고 쓴 내용도, 썼다는 사실도 금세 잊어버릴듯 하다.

정사각형 흰 리놀륨 바닥이 회의실을 가로로 약 스무 칸, 세로로 약 오십 칸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아무리 바닥이라도, 정신병원도 아니고, 타일에 무늬라도 있어야지, 이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아, 그냥 비타민D가 부족해서 분노 조절이 안되는 것일 뿐이야. 우리가 출근하기 전에 청소 아주머니가 새벽 첫 차를 타고 와서 바닥을 쓸고 닦고, 우리가 출근할때 쯤 돌아가겠지. 그 분들은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하는 일을 한다. 최소한 가시적으로 세상에 일정한 변화를 가하고 있다. 나는 무슨 일을 하는 것일까. 아니, 무슨 일의 어떠한 일부를 담당하고 있는 것일까.


‘자료를 위한 자료는 준비 되어 있지?’ 부장이 말했다. ‘네 부장님, 자료를 위한 자료를 위해서 취합을 위한 취합을 해왔습니다. 대리, 나눠드려.’ 차장이 아주 자신과 의욕에 넘쳐서 대리에게 자신이 지시를 위한 지시를 했다는 사실을 부서원들 앞에서 선언하듯 말했다.‘네 차장님, 나누어드리겠습니다.’대리가 열정적인 탈레반 요원처럼 일어나서 기발하고 훌륭한 테러 계획서 기안을 나눠주듯 우리에게 주의 깊게 자료를 위한 자료들을 돌렸다.


나는 자료를 위한 자료들에 쓰인 종이들이 문득 불쌍해져서 눈살을 찌푸렸다. 나무는 이산화탄소를 마시고 산소를 만들어 주는데. 벌목되고 자료를 위한 자료들에 쓰일 운명을 나무들은 알았을까. 잉크도 솔직히 조금 불쌍해진다. 석유에서부터 시작해야하나, 이 석유는 어떤 운명으로.. 그 찰나, 옆에 있는 주임이 그런 어정쩡한 표정을 짓는 나를 두고 농담을 위한 농담을 했다. 그러자 10여명 되는 부서원들이 웃음을 위한 웃음을 지었다. 20대가 두어 명, 30대가 세네 명, 40대가 두어 명, 회사에 쫓겨나지 않고 살아남은 사실 그자체로서 대단한 50대가 한 명. 남자 여자가 적당한 비율. 통계청의 평균치에 부합하는 비율. 그들의 웃음소리의 조합은 주물틀에 찍어내는 보급형 부엌칼 같은 웃음소리들의 조합이다. ‘어떤 걸 집어도 똑같아요.’ 다이소 직원이 면밀하게 부엌칼을 살피는 나에게 힐난하듯 말할 것 같다.


이런 작위성에 나는 정말로 넌덜머리가 낫지만 나도 미소를 위한 미소를 짓지 않으면 안 된다. 안면근육을 기민하게 움직이면서 이거 정말 난처하다고 호소하는 미소를 가까스로 지어냈다. 다행히 넘어갔다. 왜 다행히라고 느꼈는지는 모르겠다. 왠지 국가에서 불온하다고 규정하고 금지하고 있는 종교를 몰래 믿다가, 의심을 받았는데 용케 걸리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부장이 자료를 훑어보았다. 금색 돋보기 안경 너머로 자뭇 아주 흥미롭고, 자신의 인생보다 중요한 회사의 사운이 그 자료에 걸려있다는 비장함이 담긴 표정이었다. 물론 그것도 표정을 위한 표정일 것이다. 그 자료를 위한 자료는 지난 주의 것이어도, 지난 달의 것이어도, 작년의 것이어도 별다른 차이는 없을 것이다. 투명한 난쟁이가 장난을 쳐서 작년도 자료를 바꾸어놓아도, 아무런 반응이 없어서 실망한 표정을 지을 만한 자료를 위한 자료다. 그저, 그 흰색 종이 위 잉크를 전사한 뭉치는 그럴듯한 형태와 자세를 갖추고 자료임을 주장하고,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한다. 어디까지나 그것은 자료를 위한 자료이기 때문이다.


이윽고 부장은 헛기침을 한두 번 한 뒤에, 부장은 자료를 위한 자료를 염불처럼 읽었다. 불경은 어쩌다가 깨달음이라도 주지, 그가 자료를 읊는 음성들은 가만히 떠있는 공기 분자만 괴롭힐 뿐이었다. 부장이 가진 투명한 촉수를 이용해 자료를 위한 자료에 뻗어, 내용믈울 뽑아내서 그대로 그의 성대를 투과시켜 그대로 발화하는 것 그 이상 그 이하의 의미도 아니었다. 그렇게 추출되어 나온 그 발화는 나의 오른쪽 귀로 들어와 왼쪽 귀로 나갔다. 보드카라면 증류를 두 번 한 의의가 분명히 존재할 텐데. 자료를 위한 자료라지만, 나와 부장에 의해 두 번 투과 및 오염되어 허공 뿐인 회의실에 참담하게 뿌려지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그래도 나는 열정적으로 무표정과 졸음이 전혀 몰려오지 않는다고 웅변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윽고 한두 명이 수첩을 열어서 나도 수첩을 열고 펜을 집었다.


자료를 읊던 부장이 멈춤을 위한 멈춤을 했다. 그리고 대리가 발표를 위한 발표를 했다. ‘네, 부서원 여러분들도 다들 아시다시피, 지금 우리 부서의 상황과 현안은 조직은 자료에 나와 있는 내용과 같습니다... 나름 어려운 펜딩 이슈들이지만 보시는 것처럼 일단 이 수치를 위한 수치를 보고 검토를 위한 검토를 하시면 대충 결론이 날 것으로 보입니다.. 질문을 위한 질문이 있으신 분은 말씀해 주세요.’후배가 질문을 위한 질문을 했다. 모든 것은 아주 순조로웠다. 회의를 위한 회의는 아주 도덕적이고 훌륭하고 생산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나도 펜을 쥔 오른손의 검지와 엄지를 놀리면서 어느 나라 언어인지 모를 철자들의 나열을 회사 수첩에 적고 있었다. 갑자기 나는 내 안위를 위해 수첩의 종이을 학대한다는 기분이 들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렇게 멍하니 나의 배교와, 배교의 도구로 쓰인 수첩의 가혹한 운명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문득 불편한 진공을 느끼고 고개를 퍼뜩 드니 부서원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다시 한번 나의 신앙을 시험하려는 종교 심문관들 같은 표정에 식은땀이 났다. ‘저기, 예, 그러니까..’ 처벌이나 심판을 각오하고 말을 꺼내자 대리가 내 말을 끊고, 내 어깨 너머 창문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네 저 가게요. 김치찌개와 된장찌개가 아주 맛있습니다. 이번에는 저기로 가시죠.’나는 재빨리 답변을 받아 말을 이었다. ‘네 저도 가봤는데 괜찮았다고요.’ 어쩌다가 질문을 위한 질문에서 점심을 위한 점심 얘기로 넘어왔는지에 대한 경위는, 나의 배교와 종이의 운명에 대해 고뇌하다가 잃어버렸지만, 어쨌든 위기는 넘긴 셈이었다. 억울하기도 했다. 참석을 위한 참석에 충실히 참여했는데, 나에게 이런 위기를 주는 건 회의를 위한 회의답지 않은가.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대리가 말한 그 가게는 솔직히 괜찮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니, 그 백반집이 파는 김치찌개나 된장찌개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점심을 위한 점심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곳에서 식탁 위에서 점심 대화를 위한 대화를 하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살면서 김치찌개와 된장찌개를 수천 번은 먹어오지 않았을까. 권태로워졌다. 김치찌개와 된장찌개는 관념적으로는 우리 집 개가 매일 맛도 모르고 먹는 고품질 사료와 어떤 일치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너무 무서운데. 아무렴 어쩌겠는가. 모든 것은 모든 것을 위해 있어야 하고 점심을 위한 점심도 수행되어야한다. 나는 마틴 루터처럼 반박문을 거창하게 꺼내어 들고 패기 있게 얘기할 깜냥도 결기도 아직은 가지고 있지 않다. 그저 회의를 위한 회의의 도중에서 파문될뻔한 위기를 구해준 백반 집과 동료에게 감사를 해야 하지 않겠나.


부장은 아주 흡족한 모습이었다. 부장답게 반쯤 벗겨진 머리의 두피도 위엄있게 빛났다.‘여러분들의 노력들로 또 이렇게 위기들을 잘 넘겨가고 있군(솔직히 무슨 위기들이 있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내가 회사생활을 근 30년 넘게 해왔는데 이렇게 유능한(내가요?) 부서원들이 모여있는 곳은 처음이야(진부함에 욕을 퍼붓고 싶었다). 말은 안하지만 아주 감사히 여기고 있어요(지랄하지마라). 마침 말도 나왔고, 오늘 점심은 저 백반집에서 하도록 하지.’몇명이 박수를 위한 박수를 쳤다. 나도 쳤다. 진짜 웃음이 살짝 터져나왔다. 머리가 반쯤 벗겨진 부장을 필두로, 부서를 위한 부서원들과 권태로운 사료 찌개들을 먹는 것과, 이런 박수를 위한 박수.


그리고 티타임을 위한 티타임이 거행되었다. 미사의 제례 순서만큼이나 정확하고, 회사의 고명하신 선배들께서 정립해오시고, 따라서 어떤 의문이나 질문을 가지면 아주 불경한, 시류에 맞게 변화해온 아주 생산적인 회의를 위한 회의의 마지막 단계다. 미사로 치면 신부님이 성체함에 성체를 넣고, 강복하고, 파견성가와 함께 퇴장하는 순서. 녹차를 위한 녹차와 커피를 위한 커피와 홍차를 위한 홍차. 나는 단언한다. 예언자처럼 앞으로 나눌 대화의 내용들을 읊을 수 있다. 당신은 박수를 치고 무릎을 탁 치면서 나를 경배할 것이다. 부장은 골프 얘기를 한다. 차장은 몇번 쳐보지도 못한 골프에 대해 추론과 추리를 더해서 맞장구를 친다. 팀장은 자녀들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자녀들을 가지는 건, 육아를 하는 건 힘들지만 정말 아름답고 행복한 일이라고 항상 마무리를 짓는다. 그리고 결혼을 하라고 말하면서 기혼자인 자신의 우월함을 팀장 자신의 권위에 더한다. 대리는 주식 얘기로 화제를 돌린다. 주식을 위한 주식을 하다가 돈(돈을 위한 돈은 결단코 없다!)을 잃은 팀장의 권위가 손상된다. 손상된 파열음을 듣지 못한 주임은 마라탕 얘기를 한다.


나의 예언은 그대로 실행된다. 티타임은 그렇게 시행된다. 공산품보다도 더 공산품처럼. 그러면 이 역할극에서 나는 뭘 할까. 중간 중간 웃음 소리를 삽입해주는 역할이다. 그리고 가끔씩 그들이 하는 골프 얘기나 결혼과 육아와 자녀 얘기나 주식 얘기나 마라탕 얘기를 그대로 되풀이해주면 된다. 나는 골프도 결혼도 육아도 자녀도 주식도 마라탕도 모른다. 관심이 없다. 무감하다. 권태롭다. 나는 부모에게 강제로 주일 미사에 끌려온 초등학생처럼 앉아 있다. 그런데 그 초등학생은 주일 미사가 끝나면 밖에 나가서 놀기라도 하겠지. 그러나 나는 책상을 위한 책상으로 돌아가서 일을 위한 일을 해야한다. 그리고 점심을 위한 점심을 모이로써 먹는다. 그걸 생각하니 갑자기 분노가 치민다. 그런데 무얼 위한 분노인가. 그들이 나를 손상시키를 했나, 그들이 나를 모욕하기라도 했나. 그럼에도 나는 손상되고 모욕당했다. 나는 단단히 끝장났다. 파견성가도 가끔씩은 파견성가처럼 끝나지 않고 신부가 계단을 올라가다가 거꾸러지는 날이 있는 법이다. 나는 티타임이 끝나고 회의를 위한 회의가 끝나기 직전, 나는 순간 엄청난 조바심을 느꼈다. 단숨에 책상에 올라갔다. 그리고 소리를 질렀다. 소리를 위한 소리는 아니었다. 비명이었다.